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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 이야기

ilman 2013. 9. 21. 13:54

소수서원(紹修書院) 이야기/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55호)을 가고 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우리 창녕성씨(昌寧成氏) 종친회 따라 우리나라 선조 사적지 탐방을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우리 창녕성씨(昌寧成氏)  종중에 한없는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서원(紹修書院))에 대하여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이 기회에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서원(書院))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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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書院) 이야기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講論)하기도 하고, 석학(碩學) 또는 충절(忠絶)로 돌아가신 분을 제사 지내던 사학기관(私學機關)이 서원(書院)이다. 

그 최초가  1543(중종 38)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그 후 퇴계 이황의 건의로 사액서원인 소수 소원(紹修書院)이 되었다.
  서원(書院)은 민간 사설 교육기관으로 당시 유생들은 향교(鄕校)보다도 서원(書院))에 들어가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쟁이 심하던 조선 중기에 와서는 선비들은 학문 연마보다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노론 소론 등 붕당(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을 일삼음은 물론, 양민(良民)에게 서원을 내세워 금품을 토색(討索)하는 폐단도 많았다. 그래서 흥선 대원군은 당시 유명한 도산서원, 송악 서원, 화양서원, 만동묘, 소수서원 등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전국의 서원 철폐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47개를 남겨 둔 것은 서원이 조선조가 지향하는 이념인 성리학(性理學)을 숭상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어서 그랬고, 철폐한 것은  그 폐단을 없에기 위함 때문이었다. 
   나는 이 번 여행에서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하회마을의 화천서원(花川書院)과 경산서원(경산書院) 세 곳의 서원을 한꺼번에 방문하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여기서의 이야기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중심으로 한다.

 

*.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55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조선 조 중종 37년(1542년) 당시 풍기 군수였던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선생이 주자(朱子)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안향(安珦) 선생의 연고지인 순흥(順興)에  선생을  배향하고 이 고장 유생(儒生)들을 가르치기 위여 세운 서원으로 처음 이름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다.

 회헌 안향(晦軒 安珦, 1243년 1306년 64세 졸)은 고려 원년에 진사과에 급제, 후 도첨의 중찬(都僉議 中贊) 등을 거치면서 원(元) 나라를 다녀와서 우리나라 문교 진흥에 힘쓰며  유학을 크게 발전시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요, 동방 신유교(新儒敎)의 비조(鼻祖)가 되신 분이다.
그 후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安玹)이 명종 원년에 경상감사가 되어 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면서 안씨 문중의 경기체가 '죽계별곡(竹溪別曲)'의 저자 안축(安軸)과 그의 동생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고, 이어  주세붕(周世鵬)을 추가하여 현재 소수서원에서는 안향, 안축, 안보, 주세붕 네 분을 배향하고 있다. 배향(配享)이란 신주를 모신다는 뜻이다.
  그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 선생이  나라님께 건의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아서, 소수서원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奴婢)를 하사 받으며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사액서원이 되었다.
. '소수(紹修)'란 이미 무너진 교학(敎學)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이며, 사액서원(賜額書院)이란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으로 이는 현대로 말하면 한국 최초의 사립대학교가 소수서원이란 말이다.

*. '숙수사지' 당간 지주

  소수서원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이 당간지주였다.
당간지주(幢竿支柱)란 절의 위치를 알리는 불교적인 상징적인 조형물로, 불교의식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던 돌기둥(石柱)이다.

그런데 불교적인 당간지주가 왜 서원에 있는 것일까?

조선 시대에는 척불 숭유(斥佛崇儒) 정책에 따라 절을 폐하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운 경우가 많았다. 

원래 소수서원의 자리도 통일신라 시대에 숙수 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였던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니 숙수사 당간지주는 이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 중에 하나다. 

그 숙수사가 없어진 것은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에 유배 와서 숙수사를 중심으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절이 통째로 불태워 진 것이다. 

*. 보호수 느티나무
숙수사 당간지주 바로 옆에 500년 수령(樹齡)의 느티나무가 창창하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정자나무로서,동구 밖 마을의 입구를 지켜 주는 나무다.

느티나무는 잎이 크고 무성하여 짙은 녹음을 만들어 주며, 몇 백년을 사는 수령에다가, 가을이면 곱고 아름다운 단풍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이 느티나무에게 물어 보면, 말해 줄 것 같다. 이 근처에 있는 부석사(浮石寺) 못지 않게 당시 수석사는 큰 절이었다는 것을.

 

*. 취한대(翠寒臺)와 경자암(敬字岩)

  소백산 국망봉(國望峰, 1,420.8 m)에서 발원한 죽계천(竹溪川)이 운치 있게 소수서원을 동쪽으로 감싸고 흐르고 있다.

 죽계천은 근재 안축 선생의 죽계별골(竹溪別曲)의 주무대였다.

그 죽계천 가에 퇴계 선생이 세웠다는 정자 '취한대(翠寒臺)'는 소수서원 유생들이 풍류(風流)를 나누던 곳으로 그 이름 '취한대'는 퇴계 선생이 명명한 이름이다.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

'는 뜻의 옛 시 '松翠寒溪(송취한계)'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 취한대 바로 위의 강가에 있는 바위가 '敬字岩'이다.

'敬'자 위에 '白雲洞'이란 글을 보면 신재 주세붕 선생이 쓴 것이 분명한데 '' 이란 글자는 유교의 근본 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릿글자, 붉게 쓴 ' ' 이란  글자에는 세조 찬탈과 관계된 피맺힌 사연이 숨겨 있다.

 세조(수양대군)가 조카 단종(端宗)을 내 쫓고 왕위에 오르자 세조 3년(1457) 그의 친동생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이곳 영주 순흥으로 유배를 왔다. 대군은 단종 복위 운동을 펴다가 사전 발각되어 이 고을 많은 이들이 '정축지변(丁丑之變)의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 시신이 죽계천에 수장되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의 붉은 피가 죽계를 따라 10 여리나 흘러서 지금도 그곳을 '피끝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풍기군수 주세붕선생이 그때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바위에 쓴  '' 자를 음각하여 놓고 붉은 칠을 하여 원혼을 달래 주었다 한다. 

 

*. 소수서원 정문 지도문(志道門) 근처 이야기

  서원 밖에서 볼 때 서원 왼편에 솟아 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서 영귀봉(靈龜峰)이라고 한다.

그 영귀봉 주변에는 수령이 수백 년 된 적송(赤松)이 장관인데, 이 소나무에서 선비의 충렬을 배우라는 뜻으로 그 소나무 숲을 '학자수(學者樹)'라 하였다.

소혼대(消魂臺)는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이 작별의 정을 나누던 곳이다. 소혼대(消魂臺)란 '머리를 식힌다'는 뜻으로  "暗然消魂者 唯別而已矣"란 옛 시구에서 따온 말이라 한다.

정문 옆에 있는 성생단(省牲壇)는

 매년 봄, 가을에 안향 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살아있는 가축의 건강이나 크기 등의 적합 여부를 살피고 난 후 소, 돼지 같은 가축을 잡던 제단 터다. 
정문인 지도문(志道門) 우측의 건물은  1543년 주세붕 선생이 세운 정자로 죽계(竹溪) 강물을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굽어보며 학문을 이야기하던 곳으로 경렴정(景濂亭)이라 한다. 여기서는 초서의 대가였던 고산 황기로가 퇴계 이황 스승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는 '景濂亭'이란 초서 현판을 주의 깊게 감상해야 할 일이다.

 

*. 강학(講學) 영역 이야기

 
1. 강학당(講學堂) 2. 지락재(至樂齋), 학구(學求齋) 3. 일신제(日新齋), 직방제(直方齋) 4. 장서각(藏書閣)

 서원은 크게 강학(講學)과 제향(祭享)의 두  영역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래서 소수서원의 건물 배치는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고려하여 하학 상달식(下學上達式)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독서를 통하여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至樂齋)를 시작으로 하여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제(學求齊),

날마다 익힌 학문을 새롭게 한다는 일신제(日新齋),

언제나 깨어 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제(直方齋),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明倫堂)이라 부르는 강학당(講學堂 제1403호)에 들어가서 세상의 이치를 밝힐 수 있게 된다는 그런 건물 배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인재가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무려 4,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강학당(講學堂)에 가거든 명종이 하사한 친필 편액을 볼 일이다. 그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만-.

장서각(藏書閣)은 물론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당시 유명한 서원들은 많은 장서를 보관하고 있어 현대의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

다음은 유명한 서원의 장서 수량이다.

도산서원 907종 4,338책, 소수서원  141종 536 책, 병산서원 1,071종 3,039 책 등이다.  

 

 *. 제향(祭享) 영역 이야기

제향(祭享) 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1. 문성공묘(文成公廟, 보물 제1402호)와2.전사청(典祀廳), 3.영정각(影幀閣)

등의 건물이 있다.

문성공묘(文成公廟)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회헌 안향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으로 1542년 주세붕이 세운 사묘(祠廟)다.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라 부르는 것은 여기만으로 특이한 일이다.

이곳에서 매년 봄, 가을 두 번의 제[祭, 향사]를 지낸다.

문성공묘 뒤편의 전사청(典祀廳)은 제기(祭器)를 보관하고 제물(祭物)을 준비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는 전당 후 묘(前堂後廟)라 하여 '강학(講學)' 공간 뒤에 '제향(祭享)'공간을 두는 것인데, 여기서는 서방(西方)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 때문인가. 강학(講學) 공간의 측면인 서쪽에 제향(祭享) 공간을 배치하였다.

 

 

 

 영정각(影幀閣)은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과 '주세붕 초상(보물 제717호') 등 보물급 영정을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새로 영정각(影幀閣)을 지어 영정을 모시고 있다.

여기에 모신 영정으로는 주자, 문성공 안향, 주세붕, 한음 이덕형 등이 더 있다,

 우리들은 소수서원을 거쳐서 하회마을 답사여행을 마치고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을 탐방하였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이었던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이 풍산읍에 있던 풍악 서당(豊岳書堂)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에서 비롯하였다. 선생이 돌아 가시자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이 고장 유림들이 모여 위패를 이곳에 모셨다. 
그 후 철종 때 나라님께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서원(書院)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과 사당 중 하나다.

정문인 복례문을 지나 누하 진입 뮨(樓下進入門)을 통하여 층계를 올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당과 동제 서재가 있다.

이 병산서원의 매력은 무엇보다 만대루(晩對樓 )에서 내다보는 탁 트인 자연경관이다. 

나의 하회마을 답사는 마을 구경보다 낙동강(花川)을 건너 부용대에 올라서 하회마을을 굽어 조망하는 것이다.

나룻배를 타고 화천(낙동강)을 건너니 백사장을 거닐다 보니 나도 하나의 신선 같구나 하였다. 부용대(芙蓉臺)에 가다 보니 그 기슭에서 만난 서원이 화천서원(花川書院)이었다.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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