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성철용 (Homepage) |
2006-08-09 17:06:47, 조회 : 597, 추천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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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진산 북악산(北岳山) 산행 Photo 에세이 (2006.8.8/홍련사, 삼청각-숙정문-촛대바위 전망대/ 나 홀로)
*. 천연의 요새, 서울 서울은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요새가 되는 내사산(內四山)으로 북악산(北,348m ), 낙산(東, 125m), 남산(南,262m), 인왕산(西,338m)이 있다. 이 내사산(內四山)을 외사산(外四山)인 북한산(北, 836.5m), 용마산(東,348m), 관악산(南,629m), 덕양산(西, 124.9m 행주산성)이 밖으로 둘러싸고 있다. 게다가 한강은 동서로 흐르고, 청계천은 그 반대로 서동으로 흘러서 서울은 천연적으로 한강의 범람에서 안전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다. 이태조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무렵인 태조 4년에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짓고, 한양(漢陽) 방위를 위하여 석성과 토성의 성곽을 쌓고 드나드는 문으로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지었다. 그 사대문(四大門) 중 '서대문'은 일제에 의해 헐려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동: 흥인지문, 일명 동대문. 보물 1호 서: 돈의문(敦義門). 일명 서대문 지금의 신문로에 언덕에 있었으나 1915년에 헐어 없어졌다. 남: 숭례문(崇禮門): 일명 남대문. 국보1호 북: 숙정문(肅靖門) 일명 숙청문(肅淸門), 북대문
*. 경복궁의 진산 북악산(北岳山) 정년퇴직하고 남은 시간을 어디에 쓸까 하다가 여생을 한국의 산하를 글로써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일환으로 몇 년 전에 외사산(外四山)과 내사산(內四山)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놓았는데 북악산만은 쓰지를 못하였다. 1968년 1월 17일 북괴군 124군 부대의 김신조 외 30명이 청운동까지 잠입한 사건 이후 지금까지 38년 동안 일반인 출입 금지지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배려로 그 일부나마 국민에게 개방된 것이다. 노 대통령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처음 대통령이 되고서 제일 기분이 좋았던 것 중의 하나가 북악산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혼자 누리는 게 은근히 기분도 좋고 특권을 누리는 것 같아 기분 좋았는데 나중 몇 번 더 와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자’고 마음먹었다.
요번에 개방된 '북악산'은 '북악산 산행'이 아니라 '북악산 관람'이고, 그림에서 보듯이 '홍련사 입구- 숙정문-촛대 바위'까지만이다. 오전10시부터 2시간 간격으로 4회를 각각 1:30분 동안 인터넷으로 예약한 100명의 인원이 관람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관람은 나 혼자뿐이어서 군에서 나온 분과 해설사 분이 끝까지 동반하여 주어서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 왜 이렇게 관람객이 없을까? -서울 시민 누구나 지하철 표 한 장 사들고 가볍게 나가서 즐길 수 있고, 가난한 연인들이 하루를 보내기도 어렵지 않은 그런 공간으로 만들어질 것 -노 대통령의 말 그러나 북악산의 들머리는 삼청각, 홍련사여서 지하철 역 광화문에서 내려서는 걸어서 40분 이상의 코스인데, 삼청동까지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가더라도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삼청터널은 자동차 전용도로여서 보행자 출입금지 구역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왕복으로 택시를 이용하여야 하는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요번에 개방된 코스는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겨우 1시간 30분 코스였고 1차 개방의 종점인 촛대바위에서도 북악산 정상까지는 1.7km로 30분 코스이니 더 개방된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희망대로 가난한 연인이 하루를 즐길 수 있는 곳은 더구나 아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혼자 누리기 미안해 북악산 개방 결심"이라는 신문기사 같이 큰 선심이나 쓰듯이 맘먹고 개방하였다'는 말이나, 입구에 있는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북악산'이란 현수막이 오히려 부끄럽기 짝이 없다. 누가 왕복 1.1km의 숙정문과 촛대바위 뒤통수만 보러 인터넷까지 예약을 하고 왕복 택시를 타고 오겠는가. 이상의 말은 시비를 따지자는 말이 아니라 그 다음 코스를 조속히 개발하고 보완해서 노 대통령의 진의대로 더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올 수 있는 북악산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 어리둥절한 이정표 이정표도 그렇다. 홍련사에서 나무 층계로 0.2km 올라오면 그림과 같은 최근에 만들어 놓은 듯한 이정표가 있는데 이게 잘못된 것 같다. 분명 군인들을 위하여 써놓았을 리는 없는 초소의 위치를 북악을 찾아오는 시민들에게 여보란 듯이 '23초소 0.2km/ 78초소 0.2km'로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초소는 군 시설로 이를 카메라에 담으면 위법이라고 경고판까지 써놓았으니 이런 이정표는 누구를 위해 만든 것인가. 그 이정표에는 당연히 '숙정문 몇 km/ 촛대바위 몇 km/ 정상 몇 km'를 표시했어야 할 것이다.
*. 북대문 숙정문(肅靖門) 서울 사람들도 남대문, 동대문이나 지금은 없어진 서대문까지는 알아도 북대문이 '숙정문(肅靖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태조4년에 건립하였을 당시에도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었고, 문을 나서면 북악산이 가로 막아서서 성북동 골짜기로 오르내리는 문이라서, 북대문인 숙정문보다 동소문(현 혜화문)을 통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였다.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학적으로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북악산의 양 팔에 해당하므로 동령에 해당하는 숙정문과 서령에 해당하는 창의문(지금의 자하문)에는 문을 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라에서도 두 문을 폐쇄하고 그 앞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던 문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음(陰)에 해당하는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 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있다. 이 문이 열릴 때도 있었다. 가뭄이 심할 때나 홍수가 있을 때였다. 음양5행설에 의하면 남(南)은 양(陽)이요, 북(北)은 음(陰)이다. 맑은 날은 양(陽)이요, 비 오는 날은 음(陰)이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음기(陰氣)가 많은 숙정문을 열고, 양기(陽氣)가 많은 숭례문은 닫은 가운데 숭례문(남대문)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반면에 금년처럼 비가 많이 올 때에는 숭례문(남대문)은 열고 숙정문(북대문)을 닫고 숙정문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이와 같이 숙정문은 항상 닫혀 있는 문이라서, 세상 사람들은 창의문(彰義門, 紫霞門)을 흔히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전망대에서
 숙정문에서 왼쪽의 성곽을 따라 10여분을 오르면 촛대바위가 있고 바로 그 아래 30여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남산(木覓山)을 중심으로 한 서울 시내가 한눈으로 들어오는 곳이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에 올라 서울을 조망하는 것처럼 감개가 무량하다. 옛날 이태조가 서울로 천도할 때는 인구 1만 명이었다는 한양이, 이제는 인구 1천만을 뛰어넘는 세계 10대 도시 중의 하나가 된 서울이, 그때 살아있었을지도 모르는 소나무 사이에서 고즈넉하게 보였다.
*.'서울'의 어원에 관한 전설 조선 태조 당시에는 서울을 한양(漢陽)이라 불렀다. -漢陽(햔양)의 '漢'은 '한강'이란 뜻이요,' 陽'은 '水之北曰陽'('수지북왈양', 물의 북쪽을 '陽')이라 하여 생긴 말이다. '서울'이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민간어원설이 전한다.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이란 말의 어원을 밝히는데, 언어학적인 방법이나 사실 등을 고려하지 않고, 다만 음이 비슷하거나 자기가 알고 있는 생각과 결부시켜 해석하려는 것을 말한다. - 조선 초, 태조가 이 성을 쌓을 때. 성 둘레를 어떤 범위로 삼아 성을 쌓야 하나를 크게 고민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낮에 보니 안쪽만 녹아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눈이 안에만 내렸다는 설도 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정하여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눈의 경계 따라 성을 쌓도록 정인지에게 명하였다. 그래서 이 서울의 성곽을 ‘눈성’ 또는 ‘설성(雪城)’이라 하였다. -서울을 '서울'이라고 하게 된 것은 위 이야기처럼 '雪'(설)로 '울'타리를 하여 주었다 하여 '설울'이라 하였는데, '불삽-부삽, 솔나무- 소나무, 불나비-부나비'처럼 우리말에서 두 낱말사이에 'ㄹ'이 탈락하는 음운탈락현상에 따라 '설울-서울'이 되었다는 것이다.
*.촛대바위에서
전망대 바로 위가 촛대봉 전망대요, 그 앞의 봉 위에 삼각점 같은 것이 솟아 있고 거기는 올라가지 말라는 주의 사항이 있어 여기서 오늘의 일정을 접고 발길을 올라오던 길로 돌려야 했다. 너무 단순하고 짧은 북악산 산행 아닌 관람에 실망한 나를 갑장인 해설사 선생이 위로하여 준다. -지금 우리는 촛대 바위보다 높은 위치에서 촛대바위 뒤통수만을 보고 있어 평범한 바위 같지만 밑으로 내려가서 보면 13m나 되는 촛대 모양의 우람한 바위지요. 저기 보이는 삼각점 같은 것은 측량 표지가 아닙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 강점기에 왜놈들이 조선의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서 쇠말뚝을 박은 자리에서 쇠말뚝을 뽑고 저렇게 표시한 자리입니다. 이곳 북악산은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김신조 등 124군 부대가 침투한 직후부터 일반인이 출입금지 지역이라서 이곳은 휴전과 같이 서울 한복판에 자연 생태계가 고스란히 보전 된 곳입니다. 지금은 1차 계발계획으로 단순하지만, 2차, 3차까지 진행되면 북악산 관람은 더욱 다양해 질 것이고, 그때에는 양적인 성장 발전만 거듭해온 우리나라가 청계천, 한강 등의 역사 유적과 함께 북악산도 선인들의 얼을 찾아볼 수 있는 곳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도 한 가지 아쉬워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촛대봉의 사진과 설명을 다른 국립공원처럼 만들어 둘 수는 없는가. 그래서 ‘북악산 정상 1.7km(30분)’이라는 이정표를 뒤로 두고 오르던 길을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대통령의 배려를 감사하면서 하산할 수 있게 말이다. |
북악산을 가보려 하시는 분들은 당분간 북악산 산행은 너무 단조하니, 북악을 진산으로 하는 경복궁 관람과 함께 하여야 할 것 같다. 경복궁은 화요일에, 북악산 관람은 월요일에 쉬는 날이니 이를 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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