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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 산행기/ 포토 에세이

ilman 2007. 2. 11. 11:01
 
두타산 산행기/ 포토 에세이
일만성철용  (Homepage) 2005-06-25 23:22:14, 조회 : 1,182, 추천 : 3

두타산 산행기
(2005.6.23(목)/천은사→쉬움산→두타산→두타산성→학소대→삼화사→관리소/고양우정산악회 전:)

*. 나의 국토사랑

잘 가노라  닷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마라
부디 긋지 말고 촌음(寸陰)을 아껴 쓰라
가다가 중지(中止)곳 하면 아니 감만 못하리라.
                                   -남파 김천택

우리나라 최초의 고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을 지은 남파 선생의 글은 오늘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산에서 남보다 빨리 가지 못하는 나는 ‘잘 가노라 닫지’  못하였고, '못 가노라 쉬지 말라' 하여야 할 텐데 산에 오를 때는 항상 맨 끝에서 너무 자주 쉬며 산에 올랐다.
항상 좋아서 산을 찾았지만 산에 오르는 일은 나에게는 힘에 부치는 고행이었다. 그래도 산행을 ‘긋지’ 않고 산을 탐하며 살았다.
산에 가서는 ‘가다가 중지곳’ 하지 않고 아무리 힘들어도 정상에 올랐다.
산에 갈 때마다 카메라를 가지고 구석구석을 뒤지며 다녔고, 집에 돌아와서는 우리의 산하의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찾아 서점을 드나들며 인터넷 검색을 뒤져가며 촌음(寸陰)을 아껴 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산행기를 써왔다.
6월 들어 먼 산을 4번이나 다녀오고 그 산행기를 썼다.
2일에는 충북 속리산 만수봉, 7일에는 강원도 설악산 12선녀탕, 16일에는 경북 국립공원 속리산의 백악산 그리고 23일에는 강원도 두타산을 다녀왔다. 다가오는 29일에는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트레킹 5박 6일을 떠난다.
이렇게 금년 들어 지금까지 쓴 산행기만도 23편이나 된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산을 향하는 것일까?
평범하게 보내던 하루도 산에 가서 보면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몰려 있었다.  

젊어서는 그냥 남들 따라 좋아서 다니면서 그냥 지나치던 곳도 나이 들어 찾아갔더니 전에 못보던 다른 얼굴을 보게 되었다. 글을 쓰겠다는 눈으로 보면서 그러한 것을 찾아 해석하고 정리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해야할 소임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어 소재를 찾아 떠나는 나를 발견하곤 하였다.
적지 않은 해외여행을 통하여 우리나라 산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은 요즈음 내 마음 속에서 일고 있는 우리 국토에 대한 자긍에서 비롯된 것 같다.

  *. 이승휴가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짓던 터 천은사(泉隱寺) 

  산수(山水)가 겸비한 동해안의 4대 명승지는 어디 어디일까?
설악산의 '천불동(千佛洞)계곡, 내연산의 청학동 계곡, 노인봉의 청학동 소금강과 그리고 두타산의 무릉  계곡(武陵溪谷)이다.  
  두타산(頭陀山)은 동해시와 삼척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백두대간의 주능선 상에 있는 산이다.
두타산 서쪽으로 3km 능선으로 이어진 1403.7m의 청옥산은 1352m의 두타산보다 51m나 높지만 예로부터 두타산에 청옥산(靑玉山)을 포함하여 말할 정도로 두타산(頭陀山)은 명산의 하나다.
청옥산과 두타산은 동해안 바다 가까이 있는 산이어서 등반 고도차가 1,200m나 되기 때문에 나의 느린   등반 속도가 산우들의 산행에 부담이 되면 어쩌지- 하고 떠나올 때부터 퍽이나 걱정하였다.   

  새벽 5시 30분에 일산을 출발한 고양우정산악회 관광버스는 영동고속도로로 해서 5시간만에 두타산 천은사(天恩寺) 주차장에 우리를 풀어 놓았다.
우리들의 오늘 일정은 천은사(天恩寺)를 들머리로 하여 쉬움산[五十井山)을 거쳐 두타산(頭陀山)으로 해서 삼화사(三和寺)로 하산한다, 
 
 천은사(天恩寺) 가는 길 우측에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허’ 안내판이 있다.
두타거사(頭陀居士) 이승휴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지만 만년에는 외가 두타산 구동(龜洞)에 용안당(容安堂)이라는 건물을 짓고 우리나라와 중국 역대의 사적을 한시로 엮은 명저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이 천은사 자리에서 썼다.
10년 동안 대장경(大藏經)을 독파하고는 자기 집 용안당의 이름을 간장사(看藏寺)라 고쳤다가 살던 집을 절에 시주하였다. 그러니까 천은사 터는 옛날 두타거사 이승휴의 집터이고 옛날 이 절은 그 아래 있었던 모양이다.
천은사는 신라 경덕왕 때에 인도에서 두타(頭陀)의 세 신선(三仙)이 백련(白蓮)을 가지고 이곳에 이르러 사원(寺院)을 세우고 절 이름을 백련대(白蓮臺)라 하였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이름을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능을 수측하면서  이 절을 그 원당사(願堂寺)로 삼고부터 임금의 은혜를 입었다하여 천은사(天恩寺)라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천은사 마당에는 5층탑과 2개의 석등이 극락보전(極樂寶殿) 앞에 있으나 모두 최근에 만든 것으로 고풍스럽지가 않았다. 이 절은 대웅전 대신 극락보전(極樂寶殿)에다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미래불 아미타불을 모신 절이다.

 *. 왜 두타산(頭陀山)이라 하였을까
'두타(頭陀)'란 불교적인 용어다.
인간 세상의 괴로움을 떨치고 의식주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마음을 밝히려고 수도하는 사람을 두타(頭陀)라고 한다.
그래서 산과들로 다니면서 온갖 괴로움과 쓰라림을 받아가며 불도를 닦는 스님을 두타승(頭陀僧)이라고 한다.
30도가 넘는 오뉴월 염천에 만사를 제쳐 두고 먼 길을 달려와서 두타산을 탐하여 오르고 있는 우리의 산행도 두타행(頭陀行)이라고 하여야겠다.

*. 쉰움산 가는 길

천은사를 막 벗어나니 이정표가 있다. 두타산↗5km/3시간 ↗, 쉰움산↗1.5km/1시간
첫 번째 쇠다리가 나타나는데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만들다 만 것인가. 군인들의 유격훈련 모양의 다리가 벌써부터 기를 죽이고 있다.
여름 가뭄 때문에 계곡엔 물 한 방울이 없어서 두 번째 다리부터는 다리를 통하지 않고 계곡을 그냥 건너간다.
길은 계속 오름길이었지만 도중 도중 큰 바위가 전망대처럼 조망을 열어주고 있고 거기 앉아 쉴 때마다 건너편 산에는 천인단애 바위절벽들의 풍경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이제는 천은사에서는 보이지 않던 두타산 영봉이 나무숲 사이로 멀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어디서인가 징소리가 들려온다. 두타산에는 토속신앙처가 많다더니 저 바위 아래서 누군가가 무당을 통하여 치성을 드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 그런가. 쉰움산 가는 산길에는 돌탑이 유난히 많았다.
첫 번째 만나는 샘은 메말라 있었고 그 아래 고인 물 속에 청개구리가 있는데 표주박은 있으나 먹을 수가 없는 물이었다.
이 쉰움산은 영험한 곳이라서 토속신앙의 기도 처로 유명한데, 옛날부터 가뭄 때에 기우제를 올리는 장소란다. 그 주위에는 넓적한 수많은 돌을 싸놓고 흰 실타래와 흰 종인가 비단인가로 바위를 감아 두고 기도했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쉰움산에서 두타 정상까지는 3.5km로 2시간 25분을 더 가야한다.
꽃들이 꽃밭에 모여 살듯이 기암 기석이 노송과 어울려 있는 길을 지나니 헬리콥터 장이 나타난다. 

바위 무리가 보이고 로프가 길게 오르더니 거기가 바로 쉬움산이었다.
삼척읍지(三陟邑誌)에 쉰움산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두타산의 동쪽 기슭, 삼척의 서쪽 40리 위에 오십정(五十井)이 있으니, 돌 위에 크고 작은 웅덩이가 쉰 개나 있는데 깊고 또  물이 맑아 신정(神井)이라 하니,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고, 또 고을 사람들이 춘추로 큰 제사를 지낸다.” 

산의 정상이 모두 커다란 너럭바위인데 신기하게도 돌확 같이 움푹 움푹 파인 구멍이 50여개나 있고 그 속에 물이 고여 있어 올챙이와 개구리가 살고 있다.
그 주변에는 기암으로 둘려 싸여있고 이에 어울려 노송이 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래서 한자어로는 ‘오십정산(五十井山)’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쉰[五十], 움(우물), 산(山)’이라 한 것이다.
수천년 수만년 동안 석회암지대인 이곳에 빗물이 고여 오목오목 파여 형성된 돌확들이었다.
정상주(頂上酒) 삼아 시원한 켄맥주를 마셨다. 함께 온 하(河) 형이 주신 것이다.
등산 오기 전날에  2개의 물통에 80%만 채워서 냉장고 냉동실에 얼린다. 배낭에 넣을 때 그 사이에 켄맥주를 넣으면 이렇게 산에 와서도 시원한 맥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하(河) 형(2020년 사망)이 가르쳐 준 노하우다.
나는 무엇보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라 여름 등산에는 언제나 모자를 벗고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 흘러내리는 땀을 되도록 적게 하고, 속내의를 벗고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오른다. 바람 한 점 없는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였다.

*.후회로운  갈림길 

삼거리 갈림길에는 하산길 이정표가 있다. 우리 일행 중 선두는 정상까지 가서 계속해서 청옥산 가는 길의 박달재(박달령)로 해서 박달12폭, 쌍폭, 용추폭으로 해서 삼화사로 내려온다지만, 나 같이 산행이 힘든 사람은 정상까지 1.5km/30분을 갔다가 이곳으로 되돌아 와서 산성 쪽으로 하산 한다. 

 얼마 안갔는데 벌써 정상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하(河) 형을 만났다. 이 코스로는 일행 중 가장 먼저 내려오는 분이다. 앞에 보이는 산이 무언가 물으니 까마득한 저 뒤 봉우리가 두타산 정상이란다.
나보다 4살이나 많은 분이시지만 지리산 종주를 당일에 하시는 산꾼이요, 시인이요, ㅐ고교를 졸업하고 고등고시에 소년등과 하신 재원이시다. 금년 내로 백운대를 2,500번에 도전을 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하(河) 형이 쉬지 않고 달리는 토끼라면, 나는 지나칠 정도로 쉬어 가는 거북이었다.
계속해서 일행들이 하산하고 있는데 그중 맨 후미를 이끌고 내려오는 손 대장을 만났다.
이상하다. 분명 내 앞에 후미의 몇 명의 여자 분이 올라가고 있었는데 손 대장이 일행 중에서 가장 후미라 한다. 어떻게 된 일인가.
지치고 힘들어서 나도 당장 따라 내려가고 싶었지만 앞서 간 분들이 식사를 하며 기다리겠지- 하면서 속도를 내었다. 그러나 정상인가 하면 또다시 앞산이 나타나고 그런 일이 되풀이 되었다.
정상은 포기하고 되돌아 하산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내 앞에 간 분들이 나를 기다리면 어쩌나 하며 정상을 향했다. 어서어서 가자, 문산에서 온 60대 초반의 분은 깁스를 한 채로도 이 험한 산을 오르지 않던가.

*. 두타산 정상에서
천심만고 끝에 길게 드리운 로프를 타고 오르니 드디어 정상의 하나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높이 솟은 국기대가 보이더니 탁 트인 헬기장,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판, 정상석 등이 나를 반긴다. 그런데 웬 산소가 산 정상에, 그것도 한가운데에 있는가. 상석도 비석도 없는 묘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밭 가운데 있는 산소나 등산로를 가로막는 묘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는데 이건 너무 한 게 아닌가.
그런데 우리 일행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를 앞서간 여인들은 이곳에 오르지 않고 아까 갈림길에서 그대로 하산해버린 것이 분명하였다. 큰일 날 번한 것이 아니라 큰일이 난 것이다. 역으로 삼화사 쪽에서 올라온 분에게 들으니 우리 우정산악회 몇 명을 박달재에서 보았다 하니 구분은 우회하는 코스라 내가 그렇게 늦지는 건 아니겠지 하며 스스로 위안하가도 하였다.
정상에서 식사하고 있는 임진강산악회 분들에게 술 한 잔 얻어 마신 값으로 사진 한 장 찍어 드리고 하산 길을 재촉하였다. 여기올라오는데 30분이었으니 우리 산악회 46명 산우들이 1시간 이상을 나를 기다리게 될 것 같아서다. 그동안을 계곡에서 탁족이나 하산주로 여유있게 보내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였다.
내 경험으로도 등산 갔다가 다른 분 때문에 30분 이상 기다려 본 일이 없었는데-. 다른 분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기의 등산을 고집한다는 것은 지탄 받을 무모한 짓인데-. 이런 일이 한번만이라도 더 되풀이 된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철면피가 되어 버리고 마는 건데-, 그런데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산악회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30분 이상 늦으면 버스를 출발시키라고 연락하고 싶은데 핸드폰을 열어보니 마음처럼 먹통이다. 불통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버스의 나의 짐은 우리 하(河) 형이 해결해 줄 것이고, 나는 핑계 김에 삼척이나 가서 그 좋아하는 회를 먹고 여유작작 찜질방에서 자고 갈 수도 있는 건데-.
이런 조급한 마음이 한 편의 시심이 되어 내 마음을 때리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8부 능선 올랐는데
어떻게 그 정상을 안 볼 수가 있습니까?
두타(頭陀)가
버리는 일이라도
다시 올 수 없는 이 나이에.

아침마다 술을 끊고 저녁에 또 술이듯
어제로 그만 두자던 정상에 또 오릅니다.
두타산(頭陀山)
이름에 홀려
다시 찾은 우리 산하(山下)를.

*. 하산길에서
두타산에서 동쪽 방향으로 뻗어 내린 능선이 오십정산이 되고 서쪽 방향으로 능선이 청옥산으로 올라간다.
쉰움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천은사 계곡이라면, 두타산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청옥산 물줄기와 합하여 흐르는 계곡이 무릉계(武陵溪)이고, 하산길 갈림길에서는 무릉계(산성터)까지는 7.7km/2시간 20분의 거리였다. 
하산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에 하나는 산성12폭와  거북바위였다.
기암절벽 사이로 하나의 커다란 바위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폭포는 수백m인 듯한데 안타깝게도 가뭄에 물이 없는 건폭(乾瀑)이 되고 말았다.
한 봉우리를 자세히 보니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바위 위에서 길게 목을 빼고 바람을 쐬고 있다.

*.두타산성
거북바위부터는 이 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두타산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성에는 검은 오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음각하여 놓았다.

“두타산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이곳에 산성을 쌓은 것은 서기 102년인 신라 파사왕 때였다. 조선조 태종14년에는 삼척부사 김맹손이  주위 2,500m 높이 2m의 석성을 중측하였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일어나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이 산성에 모였고 의병장 최원흘을 중심으로 한 젊은 의병들이 여기서 왜적을 전멸시킨 싸움터다.”
다른 문헌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후퇴하던 왜병의 주력부대와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다가 3일만에 함락되고 말았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빨래하던 할머니가 주책없이 적병들에게 천연요새의 비밀 통로를 가르쳐 주어서였단다.

이정표에 의하면 두타산성에서 2.4km/40분 거리에 무릉반석이 있는 모양이다. 

*. 무릉계곡에서
 계곡 너머 저산 중턱에 보이는 절이 관음암 같다.
여기서부터는 전화 통화가 가능해서 일행으로부터 지금 어디 오느냐 묻는 밸이 수없이 울린다. 
1리틀의 물통이 부족해서 등산대장에게 얻고도 그래도 목마른 물을 무릉계곡 물로 목을 적시며 그 좋은 경치를 두고 달려야만 했다. 벨은 계속 울려 온다. 
10분을 내려 다리를 2개나 건너오니 관음사 입구라는 이정표가 쓰여 있고 그  위로 장마철이면 거대한 폭포를 이루고 물이 흘러내렸을 거대한 새하얀 바위가 물을 머금고 있다. 학소대(鶴巢臺)였다. 
쌍용양회 회사에 절을 팔고 1977년에 이곳에 옯겼다는 삼화사(三和寺)도 입구에서 사진 한 장 으로 지나치고, 바로 그 아래 1,500평이 넘는다는 평평한 무릉반석 위에 옛날 시인묵객이 썼다는 석각은 사진을 찍을 염두에 두지고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를 쓴 이조 4대명필이라는 봉래 양사언이 썼다는 ‘中臺泉石頭陀洞天’(중대천석무타동천)의 글만은 찍어오고 싶었는데. 동천(洞天)이란 말은 산과 내에 둘린 경치가 좋은 곳을 뜻하는 말이다.
일산에서 떠나올 때는 남들이 박달령 계곡으로 우회하여 오는 동안 지름길로 와서 낙수로 깎여진 기암괴석과 용이 승천하는 것과 같다는 용추폭포와, 거대한 물줄기가 좌우에서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린다는 쌍폭을 사진으로 찍어오리라 하였는데  다 틀려 버렸다.
매표소 입구에 있는 상점에 들려 두타산 무릉계곡의 스카프와 그림책을 사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저 멀리 주차장 멀리 있던 버스가 나를 보자 움직이기 시작한다.
황급히 버스에 오르니 박수가 쏟아졌다. 그 소리는 천둥 벼락 치는 소리보다 더 무서운 굉음으로 마음에 울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