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교산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

ilman 2023. 4. 25. 09:13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에 아무 사전 지식 없이 갔다가 기념관 입구에 있다는 허산설헌의 동상과  '허 씨 5 문장 시비'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 왔다. '허 씨 가문 5 문장(文章家)'이란아버지인 초당 '허엽(許曄)'과 허엽의 3남 1녀 자식들인 '허성', '허봉', '허초희(許蘭雪軒)', '허균(許筠)' 5 가족이 문장가(文章家)란 말이다.

그중 여류 시인 허난설헌 허초희가 있다는 것은 당시로는 이색적이다.

 세계 모든 나라도 그랬지만 조선 시대 여인의 당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남정네와 달리 아주 폐쇄적이어서, 가문을 이어가기 위한 위해 자식을 낳는 일이었다.

궁중 공주(公主)도 한글 이외에 한문은 가르쳐 주지를 않던 시절이었는데 조선 서민 사회에서는 더 했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조선 시대 여류시인이나 문인도 신사임당(申師任堂), 허난설헌(許蘭雪軒)과 동명일기(東溟日記)를 쓴 의유당 연안 김 씨와 더 있다면, 기류 중에 ()에 황진이, ()에는 매창(梅窓) 등으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몇몇 분에 불과하다.

  오늘날 양궁을 위시해서 골프, 배구, 농구, 탁구 등에서 남정네와 달리 한국 여성 선수들이 세계를 제패하여 우리 남정네를 놀라게 하는 것도, 생각해 보면 수백 년 동안 남성 제1주의에 억눌려 살아오던 여성의 한풀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여류 시인 중에서도 우뚝 선 여류가 신사임당(申師任堂)이요, 난설헌 허초희(蘭雪軒 許楚姬) 시인이지만 시()만 놓고 본다면 허초희(許楚姬) 여사가 최고다.

  허난설헌은 어릴 때 천재들의 가문에 태어나서 오빠 허성, 허봉과 동생 허균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며 뛰어난 용모와 천재적인 기품으로 나이 겨우 8세에 '廣寒殿白玉樓上樑文(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알려진 여류 시인이다.

  당시 백광훈, 최경창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는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우다가 15세 무렵 안동 김 씨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남편은 가정을 도외시하고 노류장화(路柳墻花)와  풍류를 즐기는 부성실한 남편이었다. 게다가 시어머니와의 고부간의 불화와 학대 등에다가 청상과부가 되는가 하면 유산(流産)까지 하였는가 하면,  설상가상으로 친정의 옥사(獄事)까지 덮쳐서 울부짖음 속에 살다가 27세의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 불우한 시인이었다.

  임진왜란 무렵이었다. 동생 허균이 허난설헌의 글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 시인에게 준 것이 중국에서 난설헌집’으로  간행하는 바람에 중국은 물론 일본까지 그의 시가 널리 애송되면서 격찬을 받는 당시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문인으로 그의 시가 널리 애송하게 되었다. 다음은 두 자식을 잃고 두 무덤을 바라보며 통곡하는 곡자라는 5언절구의 한시다,

 哭子(곡자)/                                 두 자식 묘 앞 에미  

去年喪愛女 (거년상애녀)/   작년에 사랑하는 딸 하늘로 보내더니

今年喪哀子 (금년상애자)/   금년엔 천금 같은 아들 가슴에 묻네.

哀哀廣陵土 (애애광릉토)/   슬프다! 고향 강릉 땅이여!

雙墳相對起 (쌍분상대기)/   두 무덤 마주 통곡하네.

                   - 허난설헌/                                  -ilman 시조 역

  

 *. 허균(許筠)의 가족들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과 그의 누이 허초희는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을까?

혹자는 홍길동의 신분이 호부호형(呼父呼兄)을 못하는 서얼(庶孽) 출신임을 생각하고, 허균을 서얼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이도 있다.

 허나 허균 가족은 대대 명문 가문으로, 일찍이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청주한씨와 사이에서 장남 허 성(許)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하는 바람에, 정실부인 강릉 김 씨를 맞아 재취로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둘째 아들 허 봉(許篈)과 고명딸 허난설헌과 3남 허균을 낳았으니 허균의 누이가 허난설헌이다.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이 허균의 8촌 형이 된다.

허균이 지었다는 한국 최초의 고대소설이며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으로 널리 알려져서 

허균이 서얼이라고 알려졌지만  허균은 151597년  선조 때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하고 이어 월과에 3차례나 장원 급제한 안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평론집인 '학산초당'과 '성수시화'의 작가이기도 하다.

12살에 아버지를 여읜 허균은 어려서 둘째 형의 친구인 서얼인 삼당시인의 하나인 이달에게 배웠으며, 천민출신 유희경과 교분이 두터운 것이라든지  사회 제도를 비판적으로 본 듯하다. 그뿐인가. 유교가 국시인 조선에서 불교를 믿는다든가, 일본과 우리보다 앞선 중국에 다녀오면서 
 시대의 선각자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로 당시에는 서학이라고 하는 천주교 서적을 우리나라에 가져온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였다.  

 다음은 그 무렵 사람들의 허균에 대한 평가다.

허균은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특히 시를 아는 사람이지만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 그는 경박하고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異端)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힌 위인 같다.

 

  허균의 최후는 심복 현응민이 남대문에 역적모의를 하는 격문을 써 붙인 사건에 연루되어 그 누명으로 우리의 허균은 저자 거리에서 능지처처참을 당하였다.  능지처참(陵遲處斬)이란 머리, 팔, 다리, 몸뚱이를 토막 치는 극형이다.

우리들은 거기 가면 반듯이 보고 와야 할  허난설헌의 생가라는 초당동 고택도 아깝게도 생략하고 말았다. 우리 자식들에게는 허균이나 허난설헌은 별로 관심이 없고 그보다 그 근처에 있는 아르떼 뮤지염에 더 관심이 많은 젊은 세대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곳에는 이 기념 공원에서 시작해서 경포호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달빛 아래 멋진 조명 속에서 운치 있게 걷을 수도 있는  '달빛 산책로'란 멋진 길도 있었는데-

*. 초당 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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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당 두부(草堂豆腐)
  여행의 멋은 잘 보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그중에서 그 고장 향토 음식을 먹거리로 먹는다는 것은 여행을 더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강릉의 향토 음식에는 초당 두부가 있다.

 

 조선전기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삼척부사를 역임하던 1563년 무렵이었습니다. 집 앞의 우물이 있었는데물이 워낙 맑고 물맛이 좋아 허엽은 이 물로 두부를 만들어 기근에 시달리던 강원도 백성들에게 만들어 나눠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약수로 강릉 콩을 불리고 깨끗한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두부는 다른 두부에는 없는 ‘간 맛’이 더해져 보다 고소하고 담백했습니다. 그 일대에 그 두부의 명성이 퍼져 나아가자 허엽의 호를 붙여 초당두부(草堂豆腐)라 하였습니다.  바닷물을 부어 만들기 때문에 부드럽고 깊은 맛을 내는 이 초당두부는 바닷물에 있는 풍부한 미네랄이 천연 응고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콩 자체의 풍미도 한껏 살려 내기 때문에 강릉의 향토음식으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