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국가 '민속문화제'라는 것이 있다.
'국가 민속문화재(國家民俗文化財)'란 우리나라에서 의식주, 사회생활, 민속, 신앙 등의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것 가운데 국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지정하여 보존하기 위해서 마련한 제도다.
그 제1호에 '덕온공주의 당의(唐衣)', 2호가 '심동신의 금관조복(金冠朝服)'과 함께 강릉시 운정동에 5호인 '강릉선교장(江陵 船橋莊)'이 있다.
'선교장(船橋莊)'이라 이름 한 것은 옛날 경포호가 지금보다 더 넓었을 무렵 배를 옆으로 묶어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마을(船橋里)라 하던데서 생긴 이름이다.
'장(莊)'은 '장원(莊園)'의 준말로 그 크기로 인하여 생긴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제일 큰 집들은 '-당(堂)'이나 '-각(閣)''을 붙이는데 선교장은 '이화장', '혜화장' 같이 '장(莊)'을 붙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기로는 궁궐이 아닌 사가(私家)에서는 99간 이상의 집을 지을 수 없다고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102간짜리 사저(私邸)도 있다. 집 안의 대문만 12개가 있을 정도의 큰 집이 바로 전주 이 씨(全州李氏) 후손들이 짓고 대대로 살고 있는 '강릉 선교장(江陵 船橋莊)'이니, 이로 보면 한국에서 가장 큰 사저가 '강릉선교장(江陵 船橋莊)'인 셈이다.
그러나 선교장원(莊園)은 단순히 큰 집이 아니고 그 집 자체가 자급자족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150간이나 된다는 선교장 건물의 유지 보수를 위해서 목수, 침모(針母) 등 갖가지 전문 인력들을 거느리고 고 있다. 그래선가 입장료를 받고 있나 보다.
선교장에서는 한옥 스테이 숙박으로 개방하고 있다. 300년 넘는 고택을 현대식으로 꾸며 놓은 멋과 풍광 속에서 추억을 심을 수도 있게 한 것이다. 행랑체, 중사랑, 연자당, 서별당 등을 개방하여 6 인에서 30명까지 개방한 것이다.
*. 족제비가 점지해 준 명당 '선교장(船橋莊)'
다음은 선교장을 지은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1111 세손 이내번이 선교장을 지을 때의 이야기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역임한 충주에 살던 6세 이내번(1692~1781)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안동 권 씨를 모시고 강릉 경포대 부근 저동에서 살면서 경포대 일원에서 새로운 기반이 될 집터를 찾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족제비 한 마리씩 나타나더니 무리를 이루어 서북쪽으로 몰려 가는 것이었다. 이를 따라 이른 곳이 바로 지금의 선교장으로 길지(吉地)요 명당(明堂) 터였다.
이 선교장 터로 경포천과 위촌천이 흘러와 선교장 앞에서 모인 다음 동해로 빠져나가는 곳인데 경포호를 비롯한 습지와 저류지가 물 빠짐을 조절하여 단속하는 곳이어서 모인 재물이 허투루 빠져나가지 않도록 자물쇠로 곳간을 꼭 잠그고 있는 형국으로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천하 명당 터였다.
이내번과 그 후손들은 이곳에 살면서 300년에 이르는 동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대대로 뒷산에 족제비에게 먹이를 주면서 끔찍한 사랑으로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다.
선교장(船橋莊)에서 입향 초기 제일 먼저 지은 건물은 1703년에 지은 선교장 종부 안방마님 거쳐인'안체 주옥'을 시작했을 무렵 금강산을 거쳐서 관동 8경을 유람하는 시인 묵객들이 구름같이 몰려오고 이를 마다하지 않고 그 접대가 후하며 100여 년간 건물을 중축하여 10대를 거쳐서 대대로 직계 후손들이 이곳에 살면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체, 사당들을 지어 오늘의 선교장을 이룩하여 조선 시대 상류층 가옥을 대표하는 한국 국가 민속문화재(國家民俗文化財)'로 성장해 온 것이다. 한국 방송공사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20 세기 '한국 Top 10 한국 최고의 전통 가옥'으로 선정하였다.
*. 선교장 건물들
이 선교장을 제대로 보는 방법으로는 강릉 시청 관광과에서 파견하는 문화해설사의 10시, 11시, 14시, 15시, 16시의 해설 안내에 함께 하는 길이요, 아니면 매표소에서 팜풀릿을 받아 참고할 일이다. 다음은 선교장을 후회없이 둘러볼 수 있는 두 가지 코스다.
다음은 선교장의 그중 중요한 건물의 간략한 설명들이다. 위 선교장의 건물을 참고하도록.
3. 동별당은 옛날에는 집안 잔치나 손님맞이에 사용하여 오다가 지금은 선교장 장주(莊主)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4. 서별당은 서고 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집안의 살림을 맏며느리에게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외별당은 집안의 장자 또는 분가한 자녀들이 살던 곳으로 현재는 선교장 후손들이 기거하고 있다.
중사랑, 행랑채는 선교장 손님맞이에 주로 쓰이던 곳으로 18. 중사랑은 전국의 학자 풍류객들과의 교분(交分)에, 19. 행랑채는 경포대를 위시해서 관동팔경을 유랑하는 선비들에게 숙소로 제공되던 곳이다.
사진에서 보면 행랑채가 줄처럼 죽 서있어 '줄행랑'을 이루고 있다. 우리말에 '줄행랑치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 밖에 선교장에서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곳으로는 선교장 입구에 1. 활래정(活來亭)이다. 1816년에 지은 정자로활래정이란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 온다는 뜻으로 수백평의 연못 위에 활래정 정자 정원까지 갖춘 구조로 그곳에 연꽃을 심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아름다운 선교장을 완성한 것이다.
지금은 가뭄으로 저렇지만 저 연못에 연꽃이 필 때 와서 그 연못에 활래정의 네 기둥 중 두 발을 연못에 턱 들여놓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한국 최고의 전통 가옥의 이 정자는 예술의 향기로 한국의 미를 자랑할 수 있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에 가 보면 그들이 자랑하는 정자 문화를 내세워 우리 한국을 얕보고 있다. 이럴 경우 선교장의 아름다움으로 맞설 일이다. 춘천호에 청평사 입구에 이제현의 정원은 그들의 정원문화보다 훨씬 앞선 정원이니 이에 관심을 갖고 옛 모습을 찾아 줄 일이다.
강릉선교장의 '카페 리몽'에서는 오색다식 판매를 하고 있고, 갖가지 가승 음식인 전통한식과 향토음식을 맛볼 수도 있는 모양이다. 열화당은 후손이 운영하는 출판사로 거기에는 열림 400여 권의 서적과 서점이 있는 모양이다..
선교장에는 고풍스러운 건물은 물론 생활용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전시한 박물관도 있다..
나는 젊어서 강릉에 있는 강원도의 명문고였던 강릉상업고등학교에 3년 간 근무하면서 강릉 곳곳을 둘러볼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에도 나는 선인장을 모르고 지나치다가 늦게사 별러오던 선교장을 우리 가족과 함께 이제야 다녀 간다. 그런 생각에 더 늦기 전에 이 부근에 있다는 '허균, 허난설헌 박물관'을 향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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