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주르 파리(Paris)
어젯밤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에 왔다.
유로스타(Eurostar)란 총길이50km의 도버(Dover) 해저 터널을 통하여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 3국의 수도를 시속 300km로 달려 최단 시간에 연결해 주는 국제 특급열차 테제베(TGV)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현해탄을 잇는 해저터널도 멀지 않은 날 유로스타처럼 개통되리라.
이렇게 해서 한반도의 2.5배의 땅에서 인구 6,000만이 사는 나라의 수도, 예술의 도시 파리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유럽의 대도시들은 어디나 커다란 박물관 같다.
길가 주택들은 키가 4~5층 정도의 대개 석조 건물이고 기둥, 베란다, 지붕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 이야기는 조각(彫刻)이 하고 그 내용은 성서(聖書)와 관련된다. 천주교 기독교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 여행은 한 마디로 천주교나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聖地巡禮)같이 성당(聖堂)순례요, 박물관 관람이다.
오늘 오전 우리들의 파리에서의 일정은 '베르사유'를 보고 '개선문'을 들러 거기서 '상제리(Surgery) 거리'를 걸어 '콩코드'에 가는 거다.
점심 식사 후에는 꿈에서 그리던 '몽마르트르(Mozart) 언덕'을 둘러보고 '루브르(Louvre) 박물관'에 갔다가 저녁 식사 후에는 '센 강(Seine)의 유람선'으로 파리의 야경을 감상하는 꿈같은 찬란한 일정이다.
*. 베르샤이유 궁전(Le Versaille)
'짐은 국가다.'라고 외치면서 프랑스의 역사상 최고의 왕권을 누렸던 '태양왕'이라는 루이 14세는 역대 왕들과 달리 루브르(Louvre) 궁에 싫증을 느꼈다.
그래서 파리 남서쪽 17km 지점의 숲이 있는 당시에 사냥 터였던 베르사유(Versaille) 언덕 위에다가 '베르사유(Le Versaille) 궁'을 짓기로 하였다. 20년 걸쳐 지은 이 궁전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당대 최고로 화려한 궁전과 거대한 정원이 되었다. 이 베르사유는 1682년부터1682년부터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실이 파리로 옮겨갈 때까지 107년간 왕가와 정부가 머물렀던 곳이다.
그 뒤 루이 필립 왕이 복원하면서 "프랑스의 모든 영광을 위하여"라는 이름 아래 국립박물관을 만들어 현재에 이곳에는 1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궁도 궁이려니와 대정원의 넓이가 자그마치 100ha이나 된다니 파리 정도의 넓이로, 여의도의 24배가 넘는 크기다.
그걸 모두 보려면 자전거를 대여소에서 빌려 타고 반나절은 달려야 보는 곳이다. 이 거대한 베르사유궁 미술관만도 1시간 내외로 마쳐야 하는 투어여행 일정이고 보니 창을 통해 카메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베르사유궁의 내부는 정문에서 보면 한글 모음 'ㅗ'자의 건물로 우측으로부터 '왕실의 성당', '헤라클레스의 방', '비너스 방', '거울의 방', '왕비의 방', '대관식의 방', '전쟁 갤러리', '왕의 침실', '왕의 집무실' 등의 방이 복도로 서로 이어지고 있다.
그중 '거울의 방'은 널따란 방에 578개의 거울을 17개의 벽으로 나누어 장식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궁정 축제와 중요한 행사들이 열리거나 주요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곳이다. '미국 독립전생 '후의 조약이나, 제1차 대전 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된 방이 바로 거울의 방이다.
나는 그림에는 문외한(門外漢)이어서 큰 그림이 좋은 그림이겠거니 하고 그림 하나 보는데 30초도 투자하지 못하고 캠코더로,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벽에 걸린 그림을 주로 찍게 되고 그러면 천장 그림을 지나치게 되고, 잠깐만이라도 한눈팔았다가는 일행을 놓쳐 미아가 될까 두려워 서두르다 보니 여기 아니면 볼 수 없는 그림과 방을 그냥 지나친 것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낯익은 유명한 그림 앞에는 사람이 붐벼서 가이드의 신신당부하던 대로 혹시나 소매치기에 당할까 보아 그림보다 오히려 사람을 살피느라고 세계적인 명화(名畫)를 보는데 소홀하기도 하였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란 나를 두고 생긴 말 같았다.
*. 루브르 마술관(Musee du Louvre)에서
모처럼만에 달팽이 요리에 점심을 포식하면서 40대 종업원 하나가 "언니, 총각, 대~한민국 짝짝 짜짜작~" 하는 재롱에 한참이나 웃다가 '루브르 박물관'을 향했다.
파리에서는 매월 첫 일요일은 박물관을 무료로 개방한다. 오늘은 10월 5일 첫 일요일이라 그래서 관람객이 유달리 많았다.
그곳에 가고 싶다고? 거기가 여깁니다.
시공(時空)을 함께하는 감탄을 만나려
코리아
에트란제로
루브르에 왔답니다.
세계 3대 박물관을 말한다면 대개의 경우 '런던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 '파리의 루브르(Louvre) 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을 ‘세계 3대 박물관’ 또는 ‘미술관’으로 손꼽는다.
견해에 따라 달리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루브르(Louvre) 박물관'을 빼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소장된 미술품이 고대 오리엔트 미술(1,2층), 고대 이집트 미술(1,2층), 그리스 로마 미술(1,2층), 중세 이후의 유럽조각(1,2 층), 회화(2,3층)로 세계에서 이곳에 와야만 볼 수 있는 소장품이 40만 점이 훨씬 넘기 때문이다.
대체로 회화, 공예 부문은 2,3 층에, 조각 부분은 1,2층에 진열되어 있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전국의 공, 사립 미술관의 모든 운영을 루브르 미술관장이 총괄하는 것만 보아도 루브르는 프랑스 미술관 행정의 총본산인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유럽의 예술사를 한눈에 만나볼 수가 있다.
시대적으로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동서양을 망라한 모든 것이 '루브르(Louvre)'에 있다.
중세 이후 많은 프랑스 국왕이 이곳을 거성(居城)으로 하였고, 그래서 프랑스혁명이나 파리코뮌 등 쟁란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모나리자의 미소’, ‘밀로의 비너스’, ‘나폴레옹 대관식’, ‘가나의 혼인잔치,’ ‘왕실 가구’, ‘왕실의 보석’, ‘미라’, 중‘세의 조각품’들 등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 미술관에서의 압권은 '사모트리스(Victoire de Samofthrace)의 승리상'이다. 기원전 190년의 그리스에게 해 신전(神殿)의 작품으로 그리스 조각 중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작품 중에 하나다.
목이 떨어져 나간 이 여신은 전함 뱃머리에서 날개 달린 여신이 해전에서의 승리를 상징하는 힘찬 모습이다.
바쁜 일정에 몰려나오다 보니 출구에 가까운 곳 벽에 슬픈 이야기가 양각(陽刻)으로 조각된 벽화가 있다.
사형수 시아버지에게 며느리가 젖을 물려주며 머리를 돌리고 있는 모습인데, 죽음을 임박하여 어머니를 생각했음인가 시아버지 얼굴이 어린아이 같이 편안하다.
음악도 아는 것이면 귀가 가듯이, 눈이 가는 조각이 있다. ‘밀러의 비너스’다.
지성적인 미모에 나무랄 데 없는 우아한 몸매에 위험한 수준까지 흘러내린 옷의 표현은 세상의 아름다움이 이 이상 더 할 수 있을까를 생각게 한다. 밀로는 누구이기에 이런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일까.
자주 보아 그런가! 그의 잘린 팔도 왜 그리 자연스러운지-.
-1820년 4월 8일 그리스 에게 해(Aegean)의 밀로(메로스)라는 섬의 한 농부가 신전(神殿)에서 발견한 것이 이 ‘밀로의 비너스 상’이다. 그때 이 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이를 인수하고 프랑스 루이 18세에게 헌납하여 이렇게 소장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기원전 1~2 세기경이었다.
세계 중고등학교 미술실이면 어디에나 있는 높이 204cm의 이 석상의 원본을 바라보며 그것을 내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니-. 지금까지 밀로가 화가 이름이라고 알고 있던 내가 말이다.
관광객 중에 어떤 사람은 CD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목에 걸고 미술품을 관람하고 있다.
'위스퍼 서비스(whisper service)'라는 개인용 수신기로 대여해 주는 곳이 있어 그것을 빌려 CD로 작품 해설을 들으며 감상할 수 있는 기구다.
*. 개선문(凱旋門)에서
개선문(凱旋門) 광장은 원래 ‘어뜨왈(Etoile:별) 광장’이라 하였으나, 드골 장군이 죽은 후 ‘샤를 드골 에뜨왈’이라 불린다.
우리는 개선문(凱旋門) 하면 파리의 '개선문'을 생각하거나, 레마르크(독)의 장편소설 '개선문(凱旋門)'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개선문은 글자 그대로 개선하고 돌아오는 군사를 환영하거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문이다.
그 개선문은 로마 콜로세움 근처의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을 위시해서 베를린, 아테네 등 세계 여러 곳에 더 있다.
이 파리 에투왈 광장에 세워진 개선문은 나폴레옹 황제의 명령으로 36년에 걸쳐 1836년에 완공된 높이 50m, 가로 5m나 되는 ‘나폴레옹 전승기념비’다.
상제리 쪽의 아치형 벽면의 두 부조(浮彫)는 F. 뤼드가 조각한 의용군(義勇軍)의 출전을 그린 <라 마르세예즈: 進軍>이고, 내부 벽에 있는 사람의 명단은 전투에 참가한 5,580명의 장군들인데, 이름 밑에 밑줄을 그어놓은 것은 전사한 군인들이란다. 그 아치 밑에는 1920년 이후 무명전사의 묘가 있다.
이 문을 통과한 이는 ‘나폴레옹’과 ‘빅또르 위고’의 장례식 행렬, ‘드골장군’의 제1차 세계대전 승리 행진도 있었지만, ‘나치의 파리 점령 행진’ 등도 있었다.
입장료를 받는지 우리 투어의 일정에는 없어서 내부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거기에는 ‘고문서(古文書) 박물관’이 있다 한다. 엘리베이터로 맨 위에 오르면 평야에 펼쳐진 파리 시내가 확 한눈에 들어오고, 개선문에서 사방으로 12개의 대로(大路)가 방사선(放射線) 형으로 뻗어있다고-. 그 하나가 우리가 막 걸어서 가고자 하는 ‘샹젤리’에서 ‘콩코르드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개선문' 하면 우리들은 우리나라 서대문의 ‘독립문’을 연상하게 된다. 그 모양 때문인 것 같다.
1896년 독립 협회가 청나라로부터 우리나라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려고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세운 문이 '독립문'이다. 세재필이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서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세운 문이다.
독립문은 수백 년 동안 큰 나라 지배에서 벗어남을 축하하는 문이요, 프랑스 개선문은 다른 큰 나라와 싸워 이기고 그 전승을 축하하는 문이다.
같은 축하의 문이지만 한국의 독립문은 어두운 역사의 종지부를 선언하는 부끄러운 문이요, 프랑스의 개선문은 국민과 함께 회심의 미소로 세운 자랑스러운 승리의 문이다.
그런 생각 때문인가. 먼 이국 땅 개선문 앞에서 이 나그네는 왜 이리 서글퍼지는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상제리(Sangjeri) 거리를 2km나 걸어 콩코르드광장을 가는 길가 음식점은 이곳의 다른 상점들처럼 의자를 상점 앞 도로 쪽을 향하여 내놓고 관광객이 거기 앉아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서구의 모든 건물에는 창이 특히 많았다. 해를 그리워하는 나라 사람들이 유럽인들이기 때문이다.
콩코드 광장 (Place de la Concorde)은 18세기 건설되어 '루이 15세 광장'이라 하다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혁명의 광장'으로, 지금은 화합을 의미하는 '콩코드 광장'이라 부르고 있다.
대혁명으로 베르사유 궁에서 영화를 누리던 루이 16세와 비운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 등 1,343명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곳이 바로 콩코드 광장이다.
여기 서양에서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는가 보다.
콩코드 광장 중앙에 이집트 룩소르(Luxor) 신전에 있던 '오벨리스크(obelisk)'가 있다.
이집트 왕이 1829년 프랑스의 샤를르 10세에게 기증한 것으로 이곳까지 운반하는데 4년이나 걸렸다 한다. 단 하나의 화강암으로 된 높이 23m, 무게 230 t이나 되는 것으로 이 오벨리스크는 33세기 전의 유물이라니 파리의 유물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념물이다.
이 오벨리스크에는 고대 이집트 파라온 팜세스 2세의 업적이 상형문자로 새겨 있다.
오벨리스크(obelisk)란 이집트의 왕조 때 태양 신앙의 상징으로 세운 기념비로,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어 왕묘(王墓)나 신전(神殿) 등에 세우는 것이다. 그 모양은 아래는 방형(方形)이다가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가다가 맨 꼭대기에 이르러 피라미드 모양이 되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다.
*. 몽마르트르 ( La butte Montmartre) 언덕
파리 시에는 5개의 언덕이 있다. 그중 가장 높은 곳이 해발 130m 몽마르트르( La butte Montmartre) 언덕이다.
몽마르트르의 어원은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말이다. 언덕 꼭대기에 40만 국민의 헌금으로 건축되었다는 유난히 하얀 '예수성심(사크레 쾨르) 성당'이 있다. 그 앞에 2개의 기마상은 성녀 ‘잔 다르크’와 ‘쌩 루이 왕’인 것을 보면, 종교와 애국심을 함께한 건물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리라.
"싸다 싸-, 빨리 빨리-." 거기를 오르다 보니 어디서 서투른 한국말이 들린다. 한국 관광객이 수없이 다녀간 흔적이다
언덕 위에 있는 꼭대기라는 의미의 떼르트르 광장은 몽마르트르의 심장부로서 옛 전통을 이어받아 무명 화가들이 50 유러(1불에 0.9유로)에 초상화 파는 화상들의 거리이고, 카페에서는 한 잔 마시지 않고 그냥 갈 수 있냐고 꼬시고 있다.
시인 묵객을 자처해 온 우리가 어찌 그냥 지나칠까. 아니 마시고 갈 수 있을까. 해서 함께 온 룸메이트 청람 시인과 함께 생맥주로 여정을 보태었다. 이곳을 항상 거닐었다는 ‘‘세잔’, ‘르느와르’ 같은 화가나, 시인 ‘네르발’, ‘하이네’를 생각하면서-.
이 언덕은 파리에서는 가장 높은 해발 130m의 언덕이라 에펠탑처럼 파리의 동서남북을 살필 수가 있는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에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은 ‘하이네’, ‘스탕달’, ‘드가’, ‘알렉산드르 뒤마 2세’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다음과 같은 주교 생드니 전설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주교 쌩드니 로마군에게 붙잡혀 참수당하자
자기 목 받들고서 몽마르뚜르에 올라와
샘에다
목을 씻고
6km 가서 순교했다네
*. 에펠 탑(Eifel)에 올라
산마루 그리워서 조망(眺望)이 되고자
하늘을 뚫고 서서 파리를 굽어보는
탑 중(塔中)왕
프랑스인의
자존심 에펠탑이여!
생각대로라면 걸어 올라가거나 아니면 걸어서 내려오고 싶은 에펠탑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렸다.
3층으로 된 이 탑에는 57m, 115m, 276m로 1,2,3층 전망대가 있어 기다리고 갈아타느라 오르는 도중에 날이 저물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행복하게도 가장 좋은 시간대에 찾아와서 낮과 밤의 에펠탑을 다 구경하게 된 것이다.
가장 높다는 사방을 전망할 수 있는 3층 전망대에 서니 하나도 막히는 것이 없는 탁 트인 시야에 센 강 따라 펼쳐진 야경이 반짝이고 있다. 사진을 찍고 또 찍었지만 내가 카메라로 기록한 것은 사진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다 언제나 꺼내 볼 수 있는 즐거운 추억 거리였다.
디카로 캠코더로 찍으면서 혼자 다니다 보니 맨꼭대기 층에 있다는 에펠과 에디슨이 좌담하는 모습의 밀랍 인형을 못 보고 내려가고 있다. 아, 아까워라.
갈아타고 내려가야 하는 2층 전망대에는 관광 상품을 파는 곳이 있어 동으로 만든 에펠탑 모형을 하나 샀다. 이 놈은 나의 서재나 거실에 서서 앞으로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즐거운 오늘을 되돌려 줄 것이다. (이 글을 수정하고 있는 20년 후인 일산 우리 아파트 거실의 에펠탑을 감상하면서 교정하고 있다.)
아까 다녀온 130m의 몽마르트르 언덕이 제일 높다는 파리 시에다가 2년만에 300m의 에펠을 세워 놓고 건립자 귀스타프 에펠은 이렇게 소리쳤다.
"프랑스는 높이 300m의 깃대에 국기를 게양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에펠이 외친 것은 애국심이요, 파리의 미관을 해친다고 에펠(Eifel) 탑 철거 항의를 외치던 음악가 ‘구노(Gouond)’와 작곡가 ‘모파쌍(Mauoassant)’ 등 지식인에 대한 호기 찬 변명이었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응모한 106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선된 것이 에펠 탑이다.
지금은 그 높이가 320.76m로, 나무 하나 쓰지 않고 철근으로만 올린 그 무게만도 7,000t나 된다. 이 탑은 7년마다 52t의 페인트를 들여 단장한다니 나도 거기에 일조(一助)를 입장료로 보탠 것이다.
가장 저렴하게 운치 있게 에펠탑을 오르려면 3층까지 1,652개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갈 것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100년간 28명이 에펠 탑에서 투신자살(投身自殺) 하였다 한다.
*. 센 강의 여정(旅情)
도시를 다른 도시와 구별하게 하여 주는 것이 그 고장에 있는 산이요 강이다.
서울을 한강을 빼놓고 말할 수 없듯이 센 강을 빼놓고 파리를 논할 수 없다.
센 강변을 걸어보는 낭만은 우리 같은 나그네가 다 같이 꿈꾸던 세계다. 그 쎄느 강을 우리는 유람선 바또무쉬로 유람한다. 유람선에서 파리의 아름다운 야경을 무려 1시간 15분이나 즐기게 되는 것이다.
쎄느강은 동남쪽에서 흘러들어와 한강의 여의도 같이 쎄느 강 속의 노트르담 사원이 있는 씨떼섬을 지나 13km에 걸쳐 파리를 가로지르며 흐른다. 해발 25m, 평균 깊이 3m가 되는 강이다.
모든 강은 어디에 있거나 언제나 아름답다. 그러나 강이 더 아름다워지는 것은 다리 때문이다. 강 따라 절묘하게 어울린 주변 경관 따라 쎄느 강에 있는 34개의 다리를 하나하나 지나면서 우리는 이 순간 누구보다 행복하였다.
다리도 그냥 다리가 아니었다. 예술의 나라 도시답게 다리 기둥 모두를 돌로 쌓았고, 양쪽 입구에는 어김없이 석상이 있다. 그 다리를 받치는 기둥에는 각가지 조각이 어느 다리에나 다 붙어있다.
그런 강변의 유람선은 현란한 백열등으로 꾸며 반짝이는 에펠탑을 지나, 파리 세느 강의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서 씨떼섬을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 너무 많은 곳을 보고 다니는 바람에 몰려오는 졸음과 추위와 경치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밤이 열린 쎄느 강의 야경의 손짓으로
유람선 따라 마지막 밤 흘러가는 여정(旅情)아
시샘의
졸음 추위에
경치와 싸우라 들락날락.
배안에서는 세느 강변의 모습을 각국어로 설명하고 있는데 거기 우리 한국어도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센 강 유람선을 타고 한국어로 설명을 듣고 있다니-, 우리나라도 이만큼 성장한 나라로구나!
- 2003. 11. 14 -글 쓴 지 20년 후인 87세 오늘 수정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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