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건봉사(乾鳳寺)/ 고성군(固城郡)
'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보고 싶다(我願生高麗國 見金剛)'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소동파(蘇東坡)처럼 역마살의 Korean인 내가 금강산을 외면하고 가보지 않은 것은, 남한을 불바다로 만든다고 협박하는 북한군에게 원자탄을 만드는데 필요한 그 귀한 달라를 한 푼이라도 보태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젊어서 관동별곡(關東別曲)을 가르치던 국어선생이었던 사람이라서 남보다 더 금강산을 알려하였고, 금강산은 더 가고 싶어 했던 곳인데도 말이다.
그런 내가 지금 '금상산 건봉사(乾鳳寺)'를 향하고 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6. 25를 일으킨 김일성의 덕분인 것 같다.
고성(固城)은 수복 이전에는 38선 이북인 금강산 구역이 아닌가. 남침한 김일성에게서 수복한 건봉사이기에 하는 말이다.
건봉사(乾鳳寺) 가는 길은 세 방향이 있다.
그중 우리는 통일전망대를 보고 오는 길이라서 건봉사 가는 도중에 수없이 군부대에 신고를 해가며 차단막을 피하여 겨우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4대 사찰로는 순천 '송광사(僧寶 사찰)', 합천의 '해인사(法寶 사찰)', 경남 양산의 '통도사(佛法 사찰)'와 고성 금강산 '건봉사(乾鳳寺)'를 말한다.
건봉사를 가면서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첩첩
두메산골에 건봉사란 절이 어찌 한국의 4대 사찰에 속할 수가 있었을까.
그러다 건봉사에 이르니 그 입구에 건봉사에서 주석(駐錫)하다가 열반하신 스님들의 50기가 넘는 부도군(浮屠群)과, 늘어서 있는 12기의 비석(碑石) 등이 이 절이 옛날에는 대찰(大刹)이었음을 느끼게 되면서 아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 건봉사(乾鳳寺)
건봉사(乾鳳寺)는 강원도 고성군 오대면 냉천리 금강산 건봉산(907.9m) 기슭에 있는 절로, 지금은 설악산 신흥사의 말사이지만, 6.25 이전까지만 해도 31 본산(本山)의 하나인 큰 절이었다.
이 절은 신라 법흥왕 7년(52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원각사(圓覺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것을,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할 때 절 서쪽에 봉황(鳳凰) 모양의 돌이 있다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다가 공민왕 7년(1358년) 나옹(懶翁)이 중수하면서 건봉사(乾鳳寺)라 하였다.
세조 10년에는 왕이 이 절에 몸소 행차하여 이 절을 원당(願堂)으로 삼고 어실각(御室閣)을 지었다. 원당(願堂)이란 시주자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을 이르던 말이다.
건봉사는 창건 당시에는 3,183칸의 대가람이었으나 산불과 6. 25 한국동란으로 모든 건물이 불탔으나 원형 돌기둥에 총알 자국을 군데군데 남기고 서 있는 불이문(不二門, 강원문화재 자료 35호)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 문 원형 돌기둥에 음각한 문양은 '금강저(金剛杵)'라고 하는데 불교 수호를 위한 사천왕문(四天王門)과 인왕(仁王) 대신 이 절을 수호하기 위한 옛날의 무기다. 거기 걸려 있는 '不二門(불이문)' 현판(懸板)은 조선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스승 해강 김규진 선생의 글씨다.
기록을 보니 한창때 이 절 신도 1,820명이 '염불 만일회(念佛萬日會)'를 베풀었다 하며, 성종(成宗)은 이 절 사방의 10리 안을 모두 이 건봉사의 재산으로 주는 등 역대 왕가에서도 큰 시주 등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그 앞에 승려요, 독립운동가며 시인인 만해 한용운(卍海韓龍雲)의 시가 발길을 잡는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함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주차장 화장실 옆에 '건봉사에서 꼭 보셔야 할 곳"이 안내도로 소개하고 있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내가 건봉사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 '치아(齒牙)'를 모셨다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란 그 자체가 불신(佛身)이므로 법당에 별도로 불상을 조성하지 않고 그 자리에 방석만을 놓는데 이러한 절을 적멸궁(寂滅宮)이라 한다.
층계를 오르니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좌우 한 쌍의 석주(石柱)가 있다. 십바라밀 석주(十波羅蜜石柱)였다. '십바라밀'이란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해야 하는 열 가지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 뒤뜰에 가보니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가져왔다는 진신사리 중 이곳에 모셨다는 석가모니의 진신 치아사리(眞身齒牙舍利)를 봉안한 '진신 치아 탑'이 있다.
이 진신 치아탑(齒牙塔)은 임진왜란 시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던 것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일본에서 되찾아와 경종 4년에 그 일부를 이 건봉사(乾鳳寺)에 봉안하였다는 탑이다.
건봉사 '진신 치아 사리(眞身齒牙舍利)'는 적멸보궁에 3 과를 모시고 만일염 북원에 5 과를 모셔두었는데 일반 신도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금제 사리함을 별도로 만들어 건봉사에 봉안하고 있다
한국에는 불가의 최대 성지로 꼽히는 석가모니의 지신 사리를 모신 보궁으로 '5대 정멸보궁'이 있다.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 적멸보궁', 강원 '평창의 오대산 적멸보궁', 강원 '영월 법흥사(法興寺)의 적멸보궁', 강원 '정선의 정암사(淨巖寺) 적멸보궁', 강원도 '인제의 봉정암(鳳頂庵) 적멸보궁'이 그것이다.
능파교(凌波橋, 보물 1336호)를 건넌다.
능파(凌波)란 물결 위를 가볍게 거닌다는 뜻으로 미인의 가벼운 걸음거리를 비유하는 말이니 나도 가벼운 걸음으로 이 멋진 석교를 걸어 본다.
다리의 규모는 폭 3m요, 길이 14m 높이 5.4m의 아치형 구름다리로 숙종 24년(1708)에 세워진 석교다.
거기 흐르는 냇물 같지만 금강산 건봉산(907.9m) 깊운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라 영조 때 홍수로, 고종 때는 장마로 무너진 것을 개축한 석교(石橋)다.
능파교를 넘다 보니 좌측 멀리 왕소나무가 보인다. 6.25로 산과 절이 활활 타오를 때도 용케도 피해 살아남아 당당히 우뚝 선 왕소나무다.
누하 진입(樓下進入門) 입구 약수는 3단계를 거쳐서 길게 드리운 고목을 통하여 냇가로 떨어지는 모습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 들어서니 초파일이 가까워서인가 연등이 요란하다.
그 2층 강당에는 진귀한 사진전이 전시되고 있다. 2017년 가을에 건봉산 봉서루에서 국립박물관 소장 사진을 빌어 열렸다는 사진전에는 금강산의 사찰을 전시했다던데 아직도 나를 기다려 주고 있으니 이 무슨 호강이란 말인가.
말로만 듣던 금강산의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유점사(楡岾寺) 등 4대 절이 사진으로나마 한 군데 모여 내 눈을 황홀하게 한다. 6.25 한국동란에 불타 버리기 전의 모습들이었다.
건봉사를 둘러보고 차에 오르니 후회가 난다.
6.25 한국동란에 불타버린 건봉사 '극락보전(極樂寶殿) 불사 모연(募捐')에 그 기와 한 장 값이라도 기부하고 올 걸 하는 후회다.
아내가 불자여서라기보다 동참하지 못해서다. 다시 또 오지 못할 두메산골이라서 더욱 그렇다. 그러다 보니 김소월의 시가 생각나는구나.
강 위에 다리가 놓였던 것을!
건너가지 않고서 바재는 동안
때의 거친 물결은 볼 새도 없이
다리를 무너지고 흘렀습니다.
- 김소월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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