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대마도(對馬島)/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2)

ilman 2018. 10. 18. 12:00

*. 왜구들의 약탈과 피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 민족은 자고이래(自古以來) 얼마나 많이 우리를 괴롭혀 오던 민족이던가. 강원대학 손상철 교수의 선상대학(船上大學) 강의에서 고려 시대의 저들의 만행을 틀어 보자. 
  

  -출동 규모:    2~3척에서 500여 척(1만여 명)
  -고려말(1350~1392년): 495회 침입
  -침입대상지역: 도서, 해안지방은 물론, 강을 타고 내륙 깊숙이
  -약탈 대상:   식량(조창 습격), 가축, 사람 납치(부녀자, 아이 등 3만 명), 관청 습격
  -문화재 약탈: 고려종 50여 개, 불화 95점, 불상 80여구 등.
  -잔혹상:       서너살 짜리 여자 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쌀을 넣고 고사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 먹었다.

 
그뿐인가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조선정벌로써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국위 를 선양한 위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오시(豊臣秀吉)을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그
임진왜란의 피해가 다음과 같다.
 

   -인명 피해: 전국 328읍 중 182읍 유린
   -경제적 피해: 150만 결 -30만 결   *결(結): 논 밭 넓이   의  단위로 백 짐 또는 만 파(把)
  -문화적 피해: 경복궁 등 궁궐, 불국사 등 사찰, 사고 소실, 서적, 도자기, 문화재 약탈
  -여성들의 피해: 집단 성폭행, 살인 및 납치

 
  다음 그림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나타난, 젖을 먹이는 김씨 엄마를 목 잘라 죽이는 모습이요, 죄 없는 백성인 배씨를 3토막으로 살해하는 장면이요, 이씨의 사지(四肢)를 잘라 죽이는 왜놈들의 만행의 그림이다.

 


*. 조선통신사 길 최초의 기착지 대마도(對馬島)

 
 

 요번 탐사여행은 '일본 속의 한민족사'의 탐방 길이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옛날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간다.
우리가 통신사라 이름한 것은 '交隣之信, 交隣之道, 交隣之義, 交隣之禮

'을 바탕으로  지은 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후 그의 망상적인 조선 조선 침략을 깊이 반성한 도꾸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조선국과 선린우호를 위해서 통신사절단 파견을 요청하면서 12회에 걸쳐서 매회 평균 446명이 참여하였다.
그 행렬에 일본에서 동원된 3~4천여 명까지여서 1열로 서면 3~4km로 일본의 중대한 국가적 행사였다.
이 사신은 막부장군인 관백(關白)이 교체 될 때마다 축하를 위한 사절이었다.
  통신사(通信使)의 길은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구주로 해서 오키나와, 나라, 토, 도교로 이어지는 길이지만   이 번 우리들의 답사 길에서는 대마도는 생략되었다. 
 우리 탐방객 600명이 타고 가는 쿠르즈 여행의 배 '후지 마르호'는 지하 1층을 빼고도 8층이나 되는 2만 3천 톤급의 배라서 대마도에서는 제일 크다 는 이즈라 항이나 히타카쯔(比田勝)항에도 이렇게 큰 배를 접근시킬 접안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녁 6시에 출발한 배가 대마도를 지나는 동안 우리 탐방단은 선상대학에서 정영호 교수의 '대마도

(對馬島)'란 강연으로 대마도 탐방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마도를 다행히 나는 2003년에 3박 4일의 배낭여행으로 다녀 왔으니 그때 쓴 기행문을 토대로 하여 대마도를 여기에 소개하여야겠다.  

대마도는 일본에서 다섯번 째로 큰 섬으로 동서 20 리(19km), 남북으로는 205 리(82km)로, 한국을 향하여 새우 모양으로  길게 누운 두 개의 섬 큰 섬으로 제주도의 0.5배, 거제도의 1.5배, 울릉도의 10배 정도나 된다.  대마도는 일본 본토에서 123km 거리에 있고 우리나라 거제도에서는 49.5km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곳에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나라 영토라고는 할 수 없는 섬이었다.
두 개의 섬은 원래 붙어 있던 것을 운하를 만들어 상현군(上縣郡)과 하현군(下縣郡)으로 나뉘게 되었다.
거기에 109개 섬이 딸려 있는데, 그 중 유인도는 다섯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겨우 4만 6천명의 인구가 주로 바다에 의지하여 사는 일본에서는 가장 외진 섬이다.

*. 대마도(對馬島)의 어원

 일본 사람들은 '對馬島'(대마도)라 쓰고 '쓰시마'로 읽는데 왜 그 이름을 對馬島(대마도)라 하였을까?

대마도라는 이름은 삼국지 위지동인지(韓條 倭條)에 처음 나오는 '대마국(對馬國)'에서 국(國)을 뺀 것이다.


일본 발음 쓰시마와 같기 위해서는 진도(津島)로 쓰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기도 한다.
津(쓰: 배가 닿는 곳), 島(시마: 섬)란 말이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생김새가 말머리와 유사한 두 섬이 마주 보고 있다 하여 대마도(對馬島)라 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책에는 삼한 시절 우리나라 경상도 지방에 있었던 마한(馬韓)과 마주 보고 있다 하여 대할 '對'(대), 말 '馬'(마), '對馬島'(대마도)라고 했다고도 한다.

*. 조선역관 위령탑에서

   대마도 북쪽에 있는 히타카쯔(比田勝)항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한국전망대를 찾아가는 길은 차 두 대가 겨우 교행할 수 있는 중앙 차선도 없는 좁은 도로였다.
대마도의 모든 도로는 이렇게 길이 좁고 그 길에는 중앙선이 없거나 하얀 아니면 노란 점선의 1차선 길로 시속 40km 이상으로는 달릴 수 없는 도로였다.
이 섬에는 외국 관광객이 한국 사람밖에 없는지, 아니면 주로 한국 관광객을 유치하려 함인지 중요한 곳의 모든 이정표나 관광지 설명이 일어에 한글을 병기하여 놓아 우리 같은 한국인에게는 친근감을 갖게 하였다.
대마도의 가장 북쪽 마을 카미쯔시마쵸에 '한국전망대'가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부산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팔각정은 한국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한국산 재료를 구입하여 지었다는 정자였다.
  그 바로 아래 고국 땅을 향하여 우뚝 서있는 것이 조선역관사위령비(朝鮮譯官使慰靈碑)다.
1703년 음력 2월 5일이었다. 108명의 조선 역관을 태우고 부산을 떠나 대마도를 향하던 배가 항구를 눈앞에 두고 조난하여 일인 4명을 포함한 112명 전원이 사망하여서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991년에 112개의 영석(靈石)을 기단으로 쌓은 순난비였다.
'朝鮮譯官使慰靈碑(조선역관사 위령비)'라 쓴 바로 아래의 오석(烏石)에 음각으로 희생자의 이름을 새겨 놓은 그 앞에 누군가가 흰 백합을 바쳤다.

 

서녘 바라 우뚝 서서
파도 따라 가는 마음.
구름에 실려 가고 싶어라,
두고 온 우리여.
백팔 명
백팔번뇌(百八煩惱)로
망부석(望夫石) 향한 역관의 넋이여. 
                         -조선역관사 위령비


*. 만제키 다리(萬關橋)에서

 쓰시마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것을 1900년 일본 해군이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의 폭 20m 길이 80m를 뚫어 인공해협을 만들어 두 개의 섬이 되었다.
이렇게 대륙 침략을 위한 최단 거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운하를 뚫고 그 위에 놓은 다리가 만제키교(萬關橋)였다.
 러일전쟁에서 1905년 일본 명장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이끈 일본 함대가 이 아소만 일대에 숨어 있다가, 이를 모르던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러시아 발틱함대 38척 중 35척을 일거에 격침시키고 4,800 명을 수장시킴으로써 러시아를 물리치고 한국에 35년 간의 일본강점기 시대를 열게 만들었던 한국으로서는 비운의 만제키 운하요, 이를 가로지른 다리가 만제키교(萬關橋)인 것이다.

*. 대마도 역사 민속자료관의 조선통신사 비(朝鮮通信使碑)

만제키교를 지나니 쓰시마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라는 한국적인 정취와 역사가 가장 많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 대마도의 중심지 이즈하라(嚴原)다.
  우리가 이즈하라에서 제일 먼저 들린 곳이 장기현립(長崎縣立) '대마역사 민속자료관'이다.
역사민속자료관은 일본과 대륙과의 문화교류의 요충지였던 대마도의 역사적 문화유산과 섬 안에 전해지는 민속 자료를 모아 보존하여 교육, 문화 진흥에 공헌하기 위해 설립된 곳이다.
그 입구에 고려문(高麗門)이 있다. 이 문은 옛날 이즈하라의 성문으로 에도시대인 1600년부터 1868년 사이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방문을 맞던 문으로 그 문 옆에 '高麗門'이란 돌표지가 있다.
고려문을 지나니 민속 자료관 입구 왼쪽에 커다란 비가 하나 서 있다.
조선통신사 비(朝鮮通信使碑)였다.
임진왜란 이후 수 없는 대마도주의 간청에 따라 200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 조선통신사의 방문을 기념하여 21세기 한일우호의 지향점을 삼고자 세웠다는 비다.
  쓰시마에서는 매년 8월이 오면 쓰시마 아리랑 축제에서 '조선 통신사의 행렬'이 재현된다고 한다.

민속자료관의 입구에 한국 종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다는 커다란 인경을 지나니 조선통신사 행렬의 긴 두루마리가 눈길을 끌고 있는데, 그 옆에 있는 융기문토기가 눈길을 끈다.
한반도에서 전래된 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약 8,000년 전 것이라니 대마도와 옛날 우리나라와의 땅과의 인연을 생각을 하게 하는 진귀한 자료다.
역사민속자료관에서 산 쪽으로 일본 3대 묘지 중에 하나라는 반쇼인(萬松院)을 향하여 얼마 올라가는 좌측에 '이씨 왕조 소우케(宗家) 결혼봉축기념비'를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우리나라 비운의 덕혜옹주(德惠翁主)가 대마도주 쇼우다케시백작과 정략결혼(政略結婚) 하여 이곳에 왔으나 고국을 그리워하다 신경질환으로 이혼하여 외롭게 살다 죽은 일이 있는데 대마도 당국이 한국인들을 의식해서 세운 비다.
백안목(百雁木)이라고 불려지는 많은 돌계단을 올라가면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과 도쿠가와(德川) 역대 장군들의 위패와 세습적으로 대마도를 다스려온 역대 도주들의 묘석이 장엄하다지만 짓궂은 비로 인하여 일행이 차에서 비를 그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그 층계만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족해야만 하였다. 
 

백제 비구니가 지었다는 슈젠지(修善寺)에 가서 '대한인 최익현 선생 순국지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之國지碑)'를 참배하고 싶었으나 이 여행안내는 함께 간 J교수의 소학교 친구 고미야 상이 맡아 도와주었는데 그분은 관광의 문외한인 데다가 우리가 신세 지는 입장이고 보니 꼭 보고 싶던 박제상비와 함께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사찰 수선사는 백제의 법묘니 스님이 창건한 절이요, 정문 '修善寺'라는 현판 글씨도  조선조 명필 김학진의 글씨요, 그 절에 있는 불상도 통일신라 시대의 금동불상이다.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선생은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전남 순천에서 의병 400명을 이끌고 관군과 더불어 일본군과 싸우다가 제자 임병찬과 함께 체포되어 이곳에 유배되었다.
면암 선생은 지급되는 음식물과 약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하고 단식하다가 유소(遺疎)를 구술하여 제자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나라님께 드리게 한 뒤 굶어 죽은 구한말 애국지사이였다.

 신라에 부전가요 치술령곡(致述嶺曲)이 있다.

신라 눌지왕 때 충신 박제상(朴提上)이 있었다.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왕의 아우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을 구해 내고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을 때다. 왜왕이 그의 인품을 기려 자기의 신하 되기를 청하였을 때  "내 죽어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망정 왜왕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화형 당한 충신이다.
그의 부인이 세 딸과 함께 치술령에 올라가서 남편 있는 곳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어 망부석이 되어 치술령 신모(神母)가 되었다.
후세인이 이를 기려 지었다는 노래가 치술령곡(致述嶺曲)이라는 제의가(祭儀歌)라는데 아깝게도 전하여 오지 않는다.

*. 낚시의 천국 대마도

  대마도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바다가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어서 낚시하는 곳이 많았다.
  나는 바다를 면해 있는 하마사끼 상 집에서 며칠을 유하였는데 맞추어 그 집에는 낚시 배가 있어 배를 타고 낚시를 하였다.
또 데스미(沖中哲美) 상 부부의 집이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바닷가 어부집이라서 두 곳에서 낚시를 하였는데, 낚시를 드리우면 언제나 2~3분 내에 입질이 왔다.
인천 바다에서 망둥이 낚시보다 더 자주, 거기보다 더 큰 고기가 물려 나와서 나를 황홀하게 하였다.
 이 강 같은 바다에서는 1m나 되는 오징어가 잡혔고, 나는 평생에 가장 많은 고기를 잡았고 한 마리에 십만 원이 넘는다는 붉은 고기 니또요리를 잡아 회를 먹는 기쁨을 누렸으나 공들여 잡은 복어는 버릴 수밖에 없었다.
 
 대마도 여행을 하면서 나는 줄 곳 이런 생각을 해왔다.
 '대마도가 직접 대답할 수 있다면, 대마도는 어느 나라에 속하는 것을 원했을까? 먼 일본일까, 가까운 한국일까?'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으면 오늘의 대마도가 저렇게 자연 모습으로 지금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으로 남아있었을까.

'ilman의 세계여행(1)'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국길에서  (0) 2019.06.25
계방산(桂芳山, 1,577m )  (0) 2019.06.24
인도네시아 여행  (0) 2018.08.19
중국 太行山(타이항산) 기행/ 한단지몽(1)  (0) 2017.10.07
백야(白夜)  (0) 2017.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