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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산 겨울산 설악산 단독 산행기 1. 전두환 씨 은거지 백담사 2. 봉정암 가는 길 3. 대청봉에서의 감회 4. 천국과 지옥을 오간 행복하고 불행했던 산행 5. 조난에서 새 생명을 되찾은 기쁨 6. 전설 따라 신흥사와 계조암과 울산바위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인제와 원통은 육캉년 칠반의 나이로 설악산에, 그것도 겨울 단독 산행에 도전하는 나를 두고 한 노래 같다. 원통은 마침 장날이었다. 인제를 지나올 때 강에서 빙어 낚시를 하던 생각이 나서 찾아 헤매는 나에게 원통 사람들이 말한다. 강에는 더 맛있는 고기가 있어 인제 우리 원통 사람들은 빙어(氷魚)는 안 먹는다고. 할 일없어 해장국집에 들어갔더니 시장이 반찬인가, 장국밥이 꿀맛이지만 차시간에 쫓기어 안주 삼아 고기를 싸달라고 해서 백담사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용대리 백담사 매표소에서 백담사까지는 7.1km 1시간 40분 코스로 그 중 3km까지는 셔틀버스(마을버스)가 간다했는데 겨울철이라 운행이 중단되어서 퍽퍽 눈길을 걷는데 개 한 마리가 좇아온다. 돼지고기 냄새를 맡은 것이다. 놈에게는 오늘이 생일과 같은 날이 되었다. 등산객은 나 혼자뿐이다. 소양강을 지날 때에는 아직도 꽁꽁 얼어 있었지만 입춘이 지나 대동강도 풀린다는 우수(雨水)가 내일 모래라서인가 여기 오기까지 눈을 볼 수 없었으나, 백담사로 향하는 길은 눈의 나라요, 눈의 세계다. 주지스님 꿈에 백발신선이 이렇게 현몽(現夢)하시더래 대청(大靑)서 백(百)째가 되는 담(潭)이 삼재(三災)를 면할 수 있다고-. 내설악의 관문인 일백 백(百) 못 담(潭) 백담사(百潭寺)는 그런 연유로 생긴 절 이름이다. 이곳은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도를 닦던 도량(道場)이요, 독립운동가며 스님이며 시인이신 만해 한용운이 불문에 귀의한 곳이지만, 푸른 수의였던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1988년 11월 23일부터 2년 동안 은거 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한 방 화엄당이 바로 그들의 숙소였다니, 평생에 일본말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사셨고, 나라가 망했다고 항상 검정옷에 검정 고무신을 고집하시던 만해가 살아 계셨다면 불호령이 내렸을 일이다. 당시 대학생에게 유행하던 은어를 살펴보면 우리 국민들은 어느 대통령보다 더 전대통령을 미워한 것 같다. 'DDD'가 무슨 뜻인 줄 아시는가. '두'한이 '대'가리 '돌'대가리다. '백설공주'는 '백'만인이 '설'설기는 '공'포의 '주'걱 턱으로 이순자 여사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순두부'는 '순'자와 '두'환이는 '부'부다였다. 어느 화장실에 가니 이런 글도 있었다. '전' 두환이예요. '두'발이 없다는 뜻이죠. '환'장하겠어요. 전 노태우 대통령은 그보다는 덜하였지만 그도 마찬가지다. '노'가리예요, '태'평양에서 잡히죠. '우'습죠? 그러나 그분에게는 이런 시각도 있다. 경제를 안정시키었고, 올림픽을 유치하였고, 야간 통행금지를 없앴고, 중고등 학생들에게 교복 자유화를 시킨 대통령이라고-. 장사꾼들에게 물어 보시라. 전통(全統) 시절이 제일 경기가 좋았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백담사에 이르렀는데 절에 들어가는 다리가 95m의 우람한 석조 다리 수심교(修心橋)였다. 옛날에 찾았을 때는 나무다리였는데-. 옛날 고승을 배출하던 백담사가 요즈음은 전씨 부부로 하여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더니 이는 백담사의 자랑일까, 아니면 부끄러움일까. 경내에는 만해를 기념하는 동상 및 건물이 많았다. 절에 들어서니 시비(詩碑)가 여럿 있는데 그 중 고은 시인의 멋진 싸인이 들어 있는 시비가 보인다.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올 때 못 본/그 꽃" 전 두환씨는 이를 어떻게 해석했을지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시인이 우리 나라 위정자들에게 일침을 놓고 있는 것 같다. 그가 군사정권을 수립할 때 울면서 담배를 찢어버리고 금연으로 분노를 사기던 나라서 그런가. 스님이 큰 종을 28번 치는 저녁이라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쓰던 유품이나 여기서 생활하던 사진들을 그까짓 것들- 하며 백담대피소로 향하였다. 1박 2식으로 산사(山寺)의 밤을 보내고도 싶으나, 나는 백수(白鬚)라 2만원 대신 3천원 하는 대피소를 택하기도 했지만, 나 같은 술꾼이 먹고 자러 가는 곳이 절이면 되겠는가. *2. 봉정암 가는 길 나보다 먼저 백담대피소에 왔던 네 분이 새벽밥을 해먹고 일찌감치 떠나간 뒤를 따라 봉정암을 향한다.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길 중에 가장 단거리는 오색매표소길(5km/ 4시간)이지만 경사가 가팔라 험하고 가장 힘든 길이다. 그러나 나와 같이 백담매표소길(208km/ 8시간 40분)로 오르면 시간은 많이 걸려도 이 길은 백담계곡을 따라 계속 조금씩 올라가는 길이어서 평탄한 길인데다가 내설악의 관문이라는 백담사와, 우리 나라에서 제일 높은 암자라는 봉정암(鳳頂庵)이 있어 산악인이 즐겨 찾고있는 코스다. 백담사 부속암자에는 봉정암, 영신암, 오세암이 있다. 그 중 대청봉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암자가 영신암이다. 젊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절터 자리에 연못만이 있었는데 복원되어 눈 가운데에서 옛 모습을 자랑하듯이 조용히 서있다. 산에서 만나게 되는 절은 그 위치가 그곳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서이기도 하지만, 절지붕의 유연한 곡선미라든지, 삼원색의 단청이 어울려 하나의 동양화요, 한 편의 서경시를 연상하게 한다. 마당 한 가운데는 종각을 갖지 못한 커다란 종이 을씨년스럽게 엉성한 간이 지붕을 한 체 뜻 있는 이의 시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영신암은 대청과 오세암(25km/ 1시간 20분)을 지나 마등령(총 39km/3시간 20분)가는 갈림길이다. 오세암이라는 절 이름은 다섯 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다는 신동 김시습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전설도 전한다. 조선 인조(1643) 때 설정(雪淨)스님이 오세암(五歲庵)을 증축한 뒤의 일이었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나들이를 갔다가 눈이 막혀 울며 울며 다음 해 돌아와 보니 뜻밖에 염불하며 있더래 관음보살 도움으로- 집에서 떠날 때는 이 전설 깃든 오세암을 다녀오리라 벼르고 왔으나, 봉점암 길에서는 갔다가 되돌아와야 하는 3시간 길이라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영신암에서 20분 동안 눈에 완전히 덮인 수렴동계곡을 끼고 오르다가 만난 곳이 수렴동대피소였다. 내설악 한가운데서 가야동계곡과 구곡담계곡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이름도 아름다운 물 수(水) 수렴 염(簾) 수렴동대피소(水簾洞待避所), 우리 산꾼의 마음을 때리는 얼마나 즐거운 이름이던가. 서울서 서둘러 와서, 서둘러 올라오던 젊은 시절 나는 이곳에 와서 수렴 구슬 물 구르는 소리를 들으면 잠을 청하곤 했다. 작년 여름 지리산을 종주하며 들렸던, 지리산 산장 중에 산장이라는 치발목 산장과 같이 통나무로 된 산장이 옛날의 모습 그대로 나를 맞아주고 있다. 여기에는 제법 많은 산꾼이 아침을 먹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수렴동 대피소에서는 산길을 두고 눈 덮인 물소리 콸콸 흐르는 무서운 계곡 눈길에 들어섰더니 여긴 찬란한 고드름의 세계였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 놓아요 ♬♪♩∼"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동요와 민요는 항상 우리 곁에 있어 까맣게 잊혔던 어린 시절 옛날을 다시 돌려주는 힘을 가지고 있나 보다. 고드름 따먹으며 봉정암, 중청길 옛날은 떠나가고 오늘만 남았어도 가버린 그리움들이 고드름처럼 열렸네 -고드름 산 속에서 항상 만나게 되는 녹슬지 말라고 발라놓은 붉은 색의 등산길의 쇠다리는 나를 쉬게 한다. 편이 앉아 애써 올라온 곳을 뒤돌아보는 여유는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쇠층계 앉아 떠나 올 때 아내가 간식하라고 준 초콜릿과 곶감을 먹고 있는데, 어? 참새보다 약간 조그만 새 몇 마리가 내 주위를 맴돈다. 스님들이 비비새라고 하는 머리가 검정에 몸이 회색인 박새였다. 이 엄동 설한 깊은 산 속에 먹을 것이 있겠는가. 초콜릿과 과자 조각을 먹으라고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밀었더니 머리를 갸웃둥거리는데, 뒤엣 놈이 날새게 달려들어 물고 날아간다. 이번에는 먹을 것을 손목 쪽으로 깊숙이 놓았더니 내 손바닥에 앉는 그 차디찬 살아있는 감촉의 그 짜릿한 행복은 하나의 감격이었다.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야생조류에게 먹이를 주어보는 감동을 생각해 보시라 얼마나 흐뭇하고 행복한 일인가를. 물아일체, 주객일체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대여섯번 되풀이하고 있는데 저 밑에 두 사람 등산객이 보인다. 산에 와서 만나는 사람들은 왜 이리 다정할까. 만나면 대화가 되고 곧 우리가 된다. 산의 순치인가. 자연에 동화된 마음이라서인가. 아니면 그런 사람만이 산을 좋아 찾는 까닭일까. 평일을 휴일처럼 쓸 수 있는 것이 우리네 같은 정년한 사람들이라, 산을 찾아온 자체가 목적인데 여기까지 와서 더 급한 일이 있겠는가. 마음만 내키면 며칠이고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자유가 항상 내 마음 속에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쉬엄쉬엄 오르다 보면 이렇게 뒤따라오던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내가 '평요일(平曜日)'이라고 하는 평일에 한가롭게 산을 찾을 수 있는 저 행복한 40대는 누구인가. 폭포 전망대에서 만난 두 사람은 과거의 나와 같은 선생님이셨다. 집에 돌아와 보니 나의 홈페이지(http://member.kll.co.kr/ilman031)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때 드린 말이 생각난다. 교사의 길에는 네 가지 길이 있는 거라고-. 교장이 되는 길. 교수가 되는 길. 돈을 버는 길. 취미생활을 하는 길이다. 취미생활 중 등산에 대한 노하우가 늙어서도 나를 이렇게 단독 겨울 설악 산행을 하게 한 것이라고-. 그때 빠뜨린 말이 있다. 훌륭한 선생의 길이 있다는 것을-. 훌륭한 선생이란 항상 칭찬 받는 소수의 우수아보다, 칭찬에 굶주린 다수의 보통학생 편에서 사는 교사란 말씀이다. 젊어서 항상 가까이 살던 친구 같은 선배가 두 분이 있었다. 한 분은 산을 좋아하였고, 또 한 분은 낚시를 좋아하였다. 70이 된 지금은, 산꾼은 중풍과 치매로 동네 근처 산을 맴돌고 있고, 강태공 선배는 낚시를 간다고 벼르기만 하면서 사신다. 그중 산꾼은 멋없는 것이 멋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묵한 분이신데다가, 평지에서는 그렇게 느리던 사람이, 산에만 오면 갑자기 힘이 생기는지- 쉬지 않고 앞만 보고 계속 가기만 하는 분이다. 그래서 전국 산하를 다니면서도 따라 다니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집에 돌아오면 입술이 흉하게 부르트곤 하였다. 게다가 주변의 절이나 명승지에는 전연 무관심하여서 당시에는 불만이 많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다시 찾아와서 처음 보게 되는 즐거움이 여행을 배가 시켜주고 있다. 이 얼마나 큰 배려인가, 큰 축복인가. 지금까지의 계곡 길을 버리고 봉정암 입구에 들어서니 가파른 오름 길이 계속된다. 편하던 산길이 없어지고 눈 속에 움푹 움푹 패인 발자국에 발을 꽂는 고행 같은 산행이 시작된다. 전국 최고의 높이에 있다는 봉정암은 그렇게 호락호락 아무에게나 그 절문을 열어주지 않겠다는 건지-. 경사가 이만저만이 아닌 오름 길이다. 봉정암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산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을 부리게 되는 일이라, 숨차고 다리 아픈 힘든 일이지만 이렇게 숲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우아한 산사(山寺)를 보게 될 때 그 기쁨과 보람은 그 동안의 힘든 모든 역경을 잊게 한다. 등산은 이래서 하는가 보다. 신라 때 자장율사 당(唐)에서 모셔온 진신사리(眞身舍利) 봉황새 따라와 봉황날개 병풍바위 사리탑 적멸보궁(寂滅寶宮)과 1244m 봉정암(鳳頂庵) 세웠다네 설악산에 와서 꼭 알아야 할 분이 자장(慈藏) 스님이시다. 내설악의 백담사, 봉정암과 외설악의 대표 사찰 신흥사(新興寺)를 창건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자장(慈藏) 스님이란 어떤 분이신가. 신라 태종무열왕 때 무림이라는 분이 불교에 귀의하여, 그 아내가 별이 떨어져 품안에 들어오는 태몽을 얻고 석가탄신일인 4월초파일에 늦둥이 아들을 낳았다. 어려서 공부를 할 때에는 조그만 집을 짓고,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거기서 벗은 몸으로 지냈다.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을 물리치면서 도를 닦았다. 당나라에 7년 동안 유학 가서 당나라 태종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의 설법은 장님이 눈을 뜨는 신이(神異)가 일어날 정도로 영험하였다. 귀국하여 황룡사 9층탑과, 출가 승려들을 위해 통도사를 세우기도 한 신라의 고승이다. 지금 우리 나라 전국에는 자장스님이 당(唐) 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놓은 5대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다. 통도사(通度寺), 태백의 정암사(淨巖寺), 영월군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오대산 중대 적멸 보궁(寂滅寶宮), 설악산 봉정암이 그것이다. 진신(眞身)이란 부처님의 법신(法身) 곧 몸을 말하는 말이고, 사리(舍利)란 부처나 고승이 죽어 화장하면 남는다는 구슬이다. 부처님의 법신을 모신 곳이 진신 사리탑(眞身舍利塔)이요, 고승의 사리를 모신 곳이 사리탑(舍利塔)으로 보통은 절 입구에 있다. 봉정암은 불타고 요즈음 다시 지은 절이지만, 봉정암 사리탑은 신라 때 자장 스님이 봉황새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온 곳, 봉황이 날개를 편 듯하다는 봉정암 뒷산에 세운 사리탑이다. 사리탑 올라가는 길은 새로 단청한 일주문을 지나 수 없는 석등이 층계 따라 산정을 향하더니 정상 절벽을 앞두고 고색 창연한 5층 석탑이 천연 암반 위에서 내설악을 굽어보고 있다. 자장스님이 봉정암을 창건하고 진신사리를 모실 때였다. 진신사리에서 찬란한 빛이 며칠 동안 눈부시게 밤낮을 밝혔다는 곳에 지금 이 노 시인이 서있는 것이다. 이곳은 우리 나라 불자들에게는 성지(聖地)에 해당하는 곳이다. 진신사리가 있는 절이나 암자에는 대웅전이 없이 불단(佛壇)만 있다. 부처님 법심(法身)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중청대피소에서 여장을 풀려 했지만 이 깊은 소청대피소에서 반가이 술을 권하는 사람이 있다. 올라오던 길에서 만난 분들이다. 막걸리에 끌려 권하는 대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공술에 취하여, 한달 넘도록 눈사진을 찍으려고 건설(乾雪) 아닌, 나무에 착 달라붙는다는 습설(濕雪)을 기다린다는 사진 작가들과 중언부언(重言復言)하다가 잠들고 말았다. 그 중에 나의 일가가 되시는 사진 작가 성동규씨도 있었다. 내가 산중에서도 그 비싼 술을 공으로 얻어 먹은 분들은 극기 훈련을 시키기 위해 서울에서 중학생을 인도하고 온 대학의 후배 선생님들이었다. *3. 대청봉에서의 감회 소청대피소는 원래 봉정암 바로 오른쪽에 있던 봉정산장이던 것이 봉정암 신축으로 소청봉 쪽으로 30여분 올라간 위치에 1987년에 세워진 산장이다. 어제 여기 오르니 탁 트인 전망이 눈을 황홀케 했다. 좌측에 내설악 전경이, 우측엔 공룡능선의 환상적인 모습이 내가 설악에 있음을 느끼게 하였다. 나이 높은 분이 높은 산에 와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면 어찌 다음 산행을 하시냐고 걱정하는 산장 주인과 어제 마신 술빚을 뒤로 하고 홀로 소청봉을 향한다. 날씨는 흐려서 어제 감탄하며 바라보며 사진 찍던 소청대피소의 전망은 운무뿐이다. 소청봉(1,550m)에 오르니 천지는 무거운 흐림뿐인데 중청으로 향한 길이 없다. 찾아보니 좌측으로 크게 발자국이 있어 그 콤파스에 맞추어 가기 30여분만에 운무 속에 중청대피소의 모습이 꿈속에서 보듯 흐릿하게 다가온다. 중청에서 어제 저녁, 밥으로 술로 나를 행복하게 하여주던 최부장 선생님에게 커피 대접을 하면서 내가 지니고 다니던 호각을 선사했다. 나침반과 온도계가 있는 호각이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한번만의 아름다운 만남을 서로 즐겁게 기억하며 사는 것은 오늘이 얼마나 빛나는 내일이 될까. 그것은 서로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시작된다고 생각해서이다. 대청을 향한 눈길 헛디디면 허벅지 길 설악엔 눈사람보다 눈나무가 많군요 -설산 등반 한반도에서 한라산(1,950m), 지리산 천왕봉(1,917m) 다음으로 높다는 대청봉에 올라온 나는 행복하였다. 우리 한반도의 중추인 태백산맥의 최고봉인 대청.설악산의 지붕. 해가 하늘에서 떠서 하늘에서 진다는 내설악과 외설악의 눈 내리는 분기점에 서서 마냥 행복하였다. 작년 여름, 루사 태풍을 뚫고 지리산 성삼재에서 대원사까지 단독 등반을 하였더니, 금년에는 눈 산 설악산 대청봉이라. 카메라를 자동으로 놓고 나는 나의 등반을 자축하고 있었다. 대청봉 1,908m 입석 왼쪽에 '요산요수(樂山樂水)'란 오석 비가 서있고, 오른쪽에 세로로 '양양이라네'라'는 입석 비가 있다. 끝청을 지나 귀때기 청봉의 서북주능을 타던 옛날이 생각난다. 날이 맑으면 보이던 오색. 한계령에서 무박으로 올라와 용아장성으로 향하던 각 가지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오늘은 대청에서 소공원까지의 내설악 천불동 계곡 길로 하산해야겠다. 설악산은 내설악 외설악과 점봉산과 오색쪽의 남설악으로 나누지만 그중 외설악이, 외설악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설악의 경치를 대변한다는 7km의 천불동계곡을 보고 싶어서다. 그러기에 천불동계곡을 보지 않고는 산천의 아름다움을 논하지 말라고들 하지 않던가. 천불동이란 이름은 비선대에서부터 계곡 따라 시작되는 1,000여 봉의 모습이 공양하는 보살을 닮았다해서 생긴 이름이다. *4. 천국과 지옥을 오간 행복하고 불행했던 산행 정상 가까이에는 큰 나무는 하나도 없다. 눈잣나무가 있는데 기슭에서는 똑바로 자란다지만 산 정상에서는 누워서 산다. 수목 성장 한계선인 2,200m 정도가 아니니까 이 정도의 나무라도 있는 것이다. 눈이 내리고 있어서인지 등산객이라고는 다 하산하고 나 혼자뿐이다. 걱정이 되어서 중청대피소 직원에게 지금 하산해도 되는가 물었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미끄럼을 특히 주의하라 한다. 시간에 쫓기는 몸이 아니니 가다가 산장에서 자면 될 것이고, 미끄러지는 것이야 몸을 낮추면 될 것 아닌가. 나는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하산 길에 들어섰다. 다시 찾아간 소청봉에서 만난 희운각 길로 올라왔다는 일행 10여명이 얼마나 반갑던지. 산에서 만나 반가운 것보다도, 오늘같이 눈 내리는 산에서는 방금 올라온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갈 수 있어서였다. 소청봉에서 희운각으로 향한 가파른 길은 생각 같지가 않았다. 터널처럼 된 미끄럼 길이 60도 이상이나 너무 가팔라서 미끄럼은 엄두를 낼 수 없지만 , 그래도 체념하고 걷기 반 미끄럼 반 엉덩방아 찧기를 2~30번이나 하면서 죽을 기를 써서 희운각에 도착했다. 때가 오후라 매점에서 파는 2,500원 짜리 컵 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희운각대피소(수용인원 100명)는 가야동 계곡의 최상류요, 공룡계곡과 천불동 계곡의 갈림길 무너미고개 바로 위에 있어서 등산객으로 항상 붐비는 곳이건만, 대피소에는 방금 나보다 앞서 내려온 산꾼이 한 사람만이 컵라면을 먹고 있을 뿐이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지리산 도사처럼 수염을 기른 30대 젊은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말에 의하면 '희운'이란 지금은 돌아가신 이 산장을 지은이의 호라 한다. 카메라를 꺼내기에는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었다. 대청에서 희운각까지(2.5km/ 2시간 50) 내려왔으니 별일 있으랴-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든 눈은 바람에 날려 계곡으로 내려 와 쌓여 있던 것이다. 지팡이에다가 깔개 겸해서 가지고 다니던 것을 궁둥이에 깔고 미끄럼을 타기도 했지만 가장 편한 것은 그냥 옷 입은 체 개구쟁이 흉내를 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층계에도 눈이 1m 정도 쌓여 턱이 구별되지 않았고 장갑을 벗을 수 없는 추위라서 위험하게도 가파른 층계를 굴러 내리기도 하였다. 무너미고개에서 중학교 선생님 한 분이 내일 직원회가 있어 먼저 간다고 앞서 달려간다. 양보를 받은 사람은 더 빨리 달려가는 법이다. 5분도 안되어 시야에서 살아져 갔지만 생각해 보니 그 선생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아무도 없는 눈오는 깊은 산에서 남기고 가는 발자국 때문이다. '무너미'의 '무'는 물이란 뜻이요, '너미'란 넘는다는 뜻이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발자국도 희미해 질 만큼 시간이 지나니까 가다 만나는 쇠사다리나, 이정표나, 안내판이나, 사고 시 신고 기둥이나, 리본이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나무에 대한 설명 또한 그러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하여 주는 것처럼,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 천당폭포 앞에 와 있다. 천불동 계곡 맨 위에 있는 폭포라서, 여름이면 수직으로 내리는 폭포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당에 온 듯 착각하게 한다는 폭포다. 그 천당폭포를 내려다보며 쇠층계에 앉아, 눈 속에 얼어붙어 있는 폭포 대신 바람에 흩날려 계속해서 떨어지는 눈을 취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노르웨이 게이랑거르나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사운드에서 보던 피오르드를 향하여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폭포를 연상케 하는, 산 위에 쌓여 있던 눈발이 바람에 흩날려 폭포처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당폭포에서 200m 지점에 양폭대피소가 있다. 천불동 계곡에서 올라오는 사람이나 희운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곳이다. 양폭이란 좌측에서 흐르는 물이 양폭포(陽瀑布)이고 오른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음폭포(陰瀑布) 이다. 이 쌍폭은 양(陽)은 남(男)이요, 음(陰)은 여(女)라, 음양이 합하여 쌍폭(雙瀑)이 되어 자식을 낳으니 이게 바로 그 아래의 오 형제가 손에 손잡고 흐르는 오련폭포(五連瀑布)가 되었다나. 나는 이 양폭에서 자야했었다. 그러나 거리 상으로는 양폭에서 목적지인 비선대까지는 3.5km/2시간 30분 코스여서 그 2배를 친다 해도 해지기 전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에다가, 떠나올 때 사 가지고 온 고급 해드렌턴이 60∼110 시간을 쓸 수 있는 고성능에다가 밧데리까지 충분히 준비하여 와서 이를 믿고 비선대를 향한 것이 커다란 잘못이었다. 비선대에서 자고 계조암과 울산바위를 가보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양폭 부근은 확 트여서 눈보라가 거세게 치는 곳이었다. 이 부근에서는 기록만으로도 1969, 1978, 1986, 1993년 겨울 눈사태가 있었고 심지어는 양폭대피소 야영장에서 눈사태로 매몰된 무서운 곳을 소홀히 지나친 것이다. 양폭 조금 지나서 절벽 아래 길 난간이 눈으로 완전히 덮여서 70도 이상의 경사 몇m를 지나가는데 20 분 이상을 허비하는가 하면, 그 아래 길에서는 바람으로 산에서 흘러내리는 눈이 길에 덮여, 계곡까지 사선으로 덮어버리어서 지팡이로 짚어 단단하면 길이요 아니면 다시 찾는 식의 산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떤 길은 앞서간 사람도 이를 포기한 듯 계곡으로 미끄럼 탄 흔적이 보이나 그 앞에 소리 내며 흐르는 계곡 물에 떨어질까 두려워 그럴 수도 없었다. 지나온 길이 이러하여 이젠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 길이 되고 말았다. 어떤 길은 눈이 길을 사선으로 덮어 버리었지만 다행이 나무들이 띄엄띄엄이나마 있어서 그걸 잡고 건너가는데 새로 사서 아끼던 칠레산 양털모자를 나무가 벗기는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 흐르는 계곡으로 퐁당하고 빠져 버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아까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만약 내가 지니고 간 150만원에 산 고가 디지털 카메라가 굴러 내려갔다 해도 포기하였을 정도로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 10m도 안 되는 곳을 통과하는 데만도 30여분이나 또 걸렸다. 이제는 해드랜턴을 꺼낼 정도로 해가져 있는데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발자국으로 보이는 것 따라 어느만큼 왔을까 갑자기 길이 끊어진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래로 발자국이 내려가 있어서 따라가다 보니 계곡 아래로 몸이 뒹구는 것이 아닌가. 바람은 불어 계곡으로 눈을 뿌리고 있고 게다가 눈은 계속 오고 있다. 말 그대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핸드폰을 켜보았으나 봉정암길에서는 어디서나 터지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먹통이었다. 무전기를 가져 올 껄 그랬다. 나는 아무추어 무전사 HAM이 아닌가. 이젠 길을 완전히 잃었구나 했을 때였다. 저 아래 계곡 위에 다리가 보인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다리였다. 일순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히 허리까지 빠지면서 입구를 찾아 올라갔다. 그러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 눈사태로 완전히 막혀 버려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온 길을 몇 번이나 오갔던가. 그러나 나의 적지 않은 산행의 경험으로는 내가 선택하여 간 길이 제 길이란 생각뿐이었다. 헤맨 지 1시간, 해는 완전히 져서 헤드라이트를 끄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눈발은 아까처럼 거세지 않았다. 피곤이 엄습해 오기 시작하며 조름이 온다. 산행에서 조난 당하는 것은 이렇게 우왕좌왕하다가 탈진하여 잠깐 눈을 감았다가 저체온으로 얼어 죽는 것이지-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지난날 내가 도와주었던 홈리스를 그해 가장 추운 아침에 만나서 '엊저녁은 어디서 잤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얼어죽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걸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렇다! 졸면 죽는다. 어디 가서 눈을 녹여서라도 식사나 하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 하였으나, 보이는 것은 발이 허벅지나 허리까지 빠지는 경사진 눈뿐인 눈의 나라로 어디에도 밥을 지어먹을 조그만 공간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땅이 있다면 저 아래 흐르는 계곡 물 속 바위뿐이었다. 시간을 보니 7시 40분. 내일 새벽 부지런한 등산객이 이곳을 지나갈 때까지만 버틴다 하더라도 장장 12시간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지금 내가 지옥에 와 있구나 하였다. 젊은 날 비박을 위해 꼭 준비하고 다니던 천막 위에 치던 후라이 텐트만이라도 가지고 올껄-. 무거운 가방을 벗어 놓고는 길을 찾지 않기로 했다. 가방에는 식량이 있고, 여름 것이긴 하지만 오리 털 침낭도 있는 것이 지금의 내 처지에서는 생명 줄이니까. 얼마 동안 쉰 다음, 다시 다리가 보이던 곳을 계곡 따라 내려가서 무리를 해서라도 다리로 직접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용을 쓰다 보니 아. 이게 웬 일인가. 아- 하나님! 바로 앞에 깊숙이 패여 있는 사람 발자국이 여럿이 보이지 않는가. 그 발자국은 다리 쪽이 아닌 얼어붙은 개울 건너 저쪽을 향하여 징검다리 같이 박혀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조심조심 따라 가보니 눈 위로 건널 수 있는 좁은 계곡 물이 나오고, 그 건너에 쇠다리를 향하여 올라가는 발자국이 찍혀 있다. '살았구나, 살았어' 고함치며 천신만고 끝에 기어올라 다리 입구에 서니, 이 번에는 동서 방향을 알 수가 없다. 계곡 물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물을 따라 가는 것이 하산길이다. 다음 철다리에 앉아 보니 저 계곡 아래서 물 흐르는 소리 요란하다. 그 소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의 새로운 삶을 축하해 주는 부활절의 종소리였다.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 있어도 저 계곡물 소리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갑자기 목이 말랐다. 옆에 있는 눈을 뭉쳐 한 움큼 입에 넣었더니 차디차게 느껴오는 청정한 맛,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료수가 있을까. '생명수(生命水)란 이런 것이지-' 하였다. 거기서도 한참 내려와 이정표를 보니 나는 양폭대피소에서 1km 이내 떨어진 곳에서 지금까지 지옥을 헤매고 있었구나 하였다. 만약 내가 오전에 중청대피소에서 후배 선생에게 호루라기를 주지만 않았다면, 깊은 밤이라 호루라기 소리는 양폭대피소를 울려 거기 상주하고 있는 적십자산악구조대원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내가 최선생에게 감사하다고 준 것은 호루라기가 아니라 나의 생명과도 같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주어 버린 것이었구나 하였다. 등산하는 사람이 나침반이나 지도나 호루라기를 멋으로 지니고 다니는 것이 아님을 깊이 깊이 깨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왕지사(旣往之事)라 탓하여 무엇하랴. 산 속의 밤길은 눈길이라서 그런가 몹시 길었다. 그때 어둠 속에 우뚝 막아서는 봉우리가 있어 비선대(飛仙臺)인가 했더니 귀면암(鬼面岩)이었다. 그 귀면암에서부터 나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눈이 발자국을 완전히 덮어버린 눈 오는 산길에서 선명한 짐승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눈이 오고 있는데도 눈에 덮이지 않고 이렇게 선명한 것은 방금 지나간 짐승의 발자국이 분명하였다. 눈 길에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은 두 줄로 나지만 모든 짐승의 발자국은 한 줄로 남는다. 앞 굽 두 개가 분명한 것이 제법 큰 짐승 같은데 어떤 짐승일까. 이 갸륵한 짐승은 나를 인도하듯이 발자국을 계속 찍어 나가고 있다. 한 두 번 산으로 또는 냇가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다시 내려오거나 올라와 줄곧 앞으로 다리를 만나면 다리를 넘으며 40분 가량이나 발자국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가서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또 한번 내심에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앞에 확 다가오는 둥글고 커다란 찬란한 노란 불빛이 내 앞을 막아선다. 짐승의 노한 두 눈동자였다. 너무나 갑자기 당한 일이라 나도 모르게 우와! 하는 소리를 지르며 스틱으로 찌를 듯 자세를 취하자 내 앞으로 향하여 달려오던 이 동물이 급히 계곡으로 빠진다. 잠깐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지는 모습은 0.6~ 0.8m 정도의 샛노란 색깔의 아름다운 털빛이 너구리같기도 하고 쪽재비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수달 같기도 하였다. 고양이보다는 크고 긴 짐승이었다. 집에 돌아와 동물의 왕국을 보니 내가 본 것은 수달과 같았다. 그곳이 바로 비선대 입구로 비상시 등산객을 막는 철조망 문이 있는 곳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우연히 먹이를 찾아 나왔다가 나에게 쫓기어 앞으로 앞으로 가는데 눈길이라서 빨리 달려가지는 못하고 가다가다 불빛을 보고 돌아섰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종교적(宗敎的)이나 신화적(神話的)인 입장으로 보면, 겨울 눈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이 사람에게 짐승 한 마리 나타나 인가(人家)까지 길을 인도해 주고 갔다고도 말할 수도 있는 그 절묘한 우연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건국 신화나, 각 문중의 시조 할아버지 신화에서나 들어 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더니 구사일생의 나를 도와 준 이 상서로운 이야기는 어느 큰 분이 아직 내가 하여야 할 일이 있다고 나를 지켜주시려 한 뜻인가. 아니면 남에게라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하늘의 도움이신가. 아무튼 오늘 하루는 천당과 지옥을 다 다녀온 불행하다가 다시 행복을 찾은 날로 기억 될 것 같다. 5.조난에서 새 생명을 되찾은 기쁨 어제밤 비선대대피소에서 다행히 이불을 하나 얻어 젖은 침낭 속에 넣고 행복한 밤을 보냈다. 불기 하나 없는 마루에서의 하룻밤이지만 얼마나 행복하던지-. 행복이란 질보다 그 과정에서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자다 깨기를 거듭하였다. 너무 놀랜 까닭인가 보다. 비선대대피소는 옛날처럼 천불동 계곡 입구 비선대 바로 앞에 있는 건물 2층에 수용인원 200명인 산장으로, 옛날처럼 1층은 천불동 계곡으로가는 통로로 상가와 음식점이 그 양쪽에 있다. 밖에 나서니 비선대의 찬란한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비선대는 왼쪽의 봉이 장군봉(將軍峯)이요, 오른쪽 봉이 선녀봉(仙女峰)으로 그 아래 너럭바위를 흐르는 물과 함께 일컫는 말이다. 저 장군봉 해발600m 정도 중턱에 원효대사가 수도하였다는 기리 18m에 약 7평 정도의 자연굴(自然窟)이 있다. 옛날에는 저 굴에 물제비가 살고 있었고, 저리로 오르는 쇠다리는 1966년 김덕제라는 분이 사비(私費)로 만들어 기증했다니 두고 두고 기억해야 할 일이다. 지금은 신흥사의 암자(庵子)로 불상을 모신 곳으로, 이곳이 바로 금강굴(金剛窟)이다. 옛날에는 저 장군봉을 미륵봉(彌勒峰)이라 하였는데 왜 멋없는 이름으로 바뀌었을까. 옛 이름 미륵봉을 되찾아 주고 싶은 마음 간절해진다. 옛날에 보던 너럭바위 위에 초서로 1m 정도 크기의 양사언인가 윤 순인가 썼다는 '飛仙臺'란 글자나, 시인 묵객들의 음각된 글은 모두 눈 속에 파묻혀 있지만 이곳은 설악8경의 하나로 '설악' 하면 떠오르는 설악의 대표적인 명승지다. 그 눈을 헤치고 대청을 다녀와서 이 시린 물에 머리를 담가 보던 젊은 시절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옛날 마고선녀가 있어 이 아래 300m 위치에 있는 와선대(臥仙臺)에서 놀다가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하고 하늘에 올라갔다 하여 '비선대(飛仙臺)'라 하는 것이다. 와선대(臥仙臺)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마고선녀(麻姑仙女) 긴 손톱으로 거문고를 뜯을 제 바둑 두던 신선들 화답 노래 부르다가 천불동 경치에 취해 누워 산수 구경하네 일찌기 공자님께서 말하기를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했던가. 그 위험한 눈 산 겨울 산을 찾아와서 설화(雪花) 만발한 아름다운 수 없는 경치를 디지털카메라에 담으면서도 하산 걱정으로 지나쳐버린 설경(雪景)이 이제야 바로 보인다. 눈 덮인 상가, 눈에 파묻힌 차, 오토바이 등등. 세상이 이리 아름다운데 이를 두고 나는 어제 밤 죽음의 나라를 방황하였구나. 눈 속에 잠든 '무명 자유용사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였다. 6.25 때 우리 젊은 용사들의 피의 대가로 38선 이북이었던 설악산 등반을 꿈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청 대피소에서 들은 대구지하철에서 불의의 사고로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가신 분들께 아울러 명복을 빌었다. 피곤한 몸으로 보면 속초에 가서 좋아하는 회로 자축하며 등산을 마치고도 싶지만, 나이 들어 등산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난다. '여기는 내 생애 마지막 오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거운 발길을 울산 바위를 향한다. 6. 전설 따라 가본 신흥사와 계조암과 울산바위 외설악은 물론 설악산에서 최대로 크다는 사찰 신흥사 경내에 들어서니 오전이라선가 관광객은 몇 사람뿐인데, 눈부신 단청이 눈 속에 선명하다. 신흥사(新興寺)는 백담사와 같이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향성사(香城寺)라 이름 하다가 소실되어 버린 것을, 의상대사가 향성사 터 그 위에다가 선정사(禪定寺)를 세웠는데 다시 또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 절터를 지키고 있던 세 스님 영서(靈瑞), 연옥(蓮玉), 혜원(惠元)스님이 어느 날 똑 같은 꿈을 꾸었다 삼재(三災)를 면하는 이 터에 절 세워 삼보(三寶)의 불법을 펴라 점지한 신흥사(新興寺) 이렇게 신의 계시로 다시 일으킨 절이라 하여 神興寺(신흥사)라 하다가 오늘날처럼 신흥사 (新興寺)로 한자가 바뀐 절이다. 울산 바위를 향한다. 왼쪽 계곡에는 작년 태풍 루사호가 할퀴고 간 무너진 계곡에 넘어진 고목 위에 눈이 내려 또 다른 풍취를 자아낸다. 울산 바위 가는 길에 눈 속에 잠자는 듯한 내원암(內院菴)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1시간 10분/2.8km 거리에 계조암(繼祖庵)을 찾아간다. 자장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신흥사(구명 향산사)를 지었다는 천연 석굴 암자이다. 이 계조암에서는 동산(東山), 각지(覺知), 풍정(風頂) 스님에 이어 의상, 원효, 등 조사(祖師)의 칭호를 받을 만한 수많은 승려가 계속 수도하던 도량(道場)이다. 그래서 이을 '繼(계)'에, '祖師'(한 종파를 세우고 宗旨를 열어 주장한 스님)에다 '庵'(스님이 도 닦는 곳)이라 해서 계조암(繼祖庵)이라고 한 것이다. 울산 바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목탁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목탁 바위에 있는 천연 굴이 바로 계조암이다. 이름이 '목탁 바위'라서 그런가. 이곳에서 도를 닦으면 어느 곳보다 더 빨리 득도하여 이른바 계조암(繼祖庵)의 전설을 형성하게 한 것이다. 계조암 앞에는 그 천연 문에 해당하는 쌍용바위가 있고 그 앞에 100여 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을 정도의 '식당바위'가 있다. 식당 바위 끝에 있는 바위가 그 유명한 흔들바위(일면 쇠뿔바위: 牛角石)다. 한 사람이나, 백 사람이 밀어도 그 흔들림이 같다는 이 흔들바위는 원래 둘이 있으나, 옛날의 풍수장이가 이곳에 불가(佛家)의 영기(靈氣)가 너무 넘침을 시기하여 한 개를 굴러 떨어뜨렸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라 흔들림마저 꽁꽁 얼어붙어 있다. 다음은 흔들바위에 얽힌 소화(笑話) 한 토막이다. 그 흔들바위가 떨어졌다는 조선일보의 신문기사가 있었다. 몇 년 전 조선일보에 미국 관광객 11명이 흔들바위를 밀다가 추락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필자도 그런 줄 알고 있다가 이 글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확인해 보니 이는 4월 1일 만우절( 萬愚節) 날 어느 호사가가 장난한 헤프닝이라고 설악산 국립공원 당국이 설악산 조계암 흔들바위는 건재함을 밝히고 있다. 울산바위는 여기서 다시 50분/1.0km를 더 가야 있지만 다녀오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가 층계마다 눈이 쌓이고 얼어붙어서 808 계단을 오르는 길은 물론 내려오는 길은 너무나 위험해서 그냥 돌아온다 하여, 계조암 마지막 휴게소에서 설악 수로 빚은 동동주에다가 인심 좋은 아줌마가 주는 공짜 푸짐한 빈대떡에 안주하며 울산 바위의 위용을 사진기로 기록하고 있다. 안주 값 대신 아줌마와 등산객에게 울산 바위의 전설을 이야기하며--. 조선 8도 기암괴석 12,000만 모이랄 제 저 바위 덩치로 늦어서 울어서 울산바위라네 외설악의 얼굴이라는 설악8기 중에 하나인 울산바위는 동양에서는 제일 크다고 하는 병풍 모양의 하나의 돌산이다. 그래서 '천후산'이란 산 이름도 버리고 '울산바위'가 되었다. 높이가 950m 둘레가 4km로, 그 뒷모습은 미시령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로 만들어 주었다. 일부러 찾아온 설악(雪嶽)이지만 힘든 일정을 마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하니, 그리고 속초에 가서 회로 바다를 마시게 된다 하니 발걸음도 가볍다. 그러나 양 엄지발톱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하산길이라 체중이 앞으로 쏠린 탓에다가, 떠나올 때 발톱을 깎지 않았고, 등산양말이 아닌 보통양말을 신은 탓이다. 단숨에 신흥사 일주문에 이르니, 대불(大佛)로 향한 다리 끝에 한 노파가 깨엿을 팔고 있다. 보니, 노파가 먹이를 손바닥에 놓고 손을 벌이면, 산새가 날아와 쪼아먹고 있다. 깨엿 하나 팔아 드리기로 하고 깨엿장수와 동업을 하고 있는 이 갸륵한 잣새들을 열심히 촬영하였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작년 겨울에 설악에는 유난히 눈이 많았다. 그 중 12월 7일에는 설악답게 눈이 2.7m나 내려 짐승들이 먹을 것을 찾아 내려와 눈에 빠져 꼼짝 못하고 있는 산짐승들을 신흥사 스님이 절에서 보호하며 공양을 주다가 놓아주었다고-. 갈 길을 잊고 오랫동안 나도 잣새들에게 깨엿과 땅콩 먹이를 골라 주다가 세계최대 규모라는 신흥사 청동좌불 앞에 섰다. 1997년 10월에 착공된 이 불상은 높이만도 17.5m 이고 폭이 14m나 되는 광배에는 489개의 보석 큐백을 장식한 부처이다. 좌대 높이만도 4.3m, 거기에다가 통일을 기원하는 16나한상을 조각하였다. 여기에 쓰인 청동만도 자그마치 108톤이 들었다고 하는 통일기원 대불상이다. 우리 나라 '통일기원대불'에는 여기에다가, 금년 1월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서 보고 온 높이 17m의 석조 약사여래불과, 높이 33m 라는 법주사 청동미륵불대상이 있다. 여독이 풀리는 대로 다음 번에는 법주사 문장대를 서둘러 가야겠다. 요번 설악산 등반은 금년 설에 내가 나에게 약속한 하나를 구체적으로 실천 한 평생에 잊지 못할 산행이될 것이다. 먼 산 산 속에 가서 살고 싶다. 아침마다 배낭 속에 하루를 챙기어 지도와 나침반으로 완전 무장하고 온 종일, 온 몸을 산으로 채우다가 대피소에다 산사람들과 함께 여정을 풀고 싶다. 구름 속에 서서 떠나가는 날들을 지켜보며.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가꾸며 우리의 설산(雪山)과 신록과 단풍이 어떻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속에 살아 있음이 얼마나 찬란한 축복인가를 카메라로, 시심으로 담아보며 아내가, 친구는 물론 미워하던 이도 그리워 질 때까지 즐거운 방황을 계속할 꺼다. 나와 내 아내의 남편과 함께. - 2003년 2월 17일~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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