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숨은 이야기

'울고넘는 박달재’ 대중가요 이야기

ilman 2017. 3. 27. 21:16
'울고넘는 박달재’ 대중가요 이야기

문경새재를 다녀 충주로 향하는 길에 1997년에 '박달재터널'이 개통되면서 '사랑의 테마 과광지'로 새롭게 단장하였다는 고개가 있다.
제천 10경 중 제2경이라는 박달재가 보고 싶어, 옛길로 접어 들어 박달재에 들렸더니 박달재 공원에서 구슬픈 ‘울고넘는 박달재’ 노래가 들려오고 있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 ? ♬

부엉이 우는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 ?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 넘는 눈물고개
돌뿌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길아 주체 : 박돌이
도라지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 ♩♪ ? ♬ ~

*. ‘울고 넘는 박달재’ 짓게 된 사연

 ‘울고넘는 박달재’ 노래는 반야월(半夜月, 1917년~ 2012) 선생이 노랫말을 짓고, 작곡가 김교성 씨가 곡을 만들어, 가수 박재홍 씨가 취입한 대중가요인데 그 노래를 짓게한 사연이 있다.

- 8·15해방 후인 1948년 반야월 선생이 남대문악극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지방공연을 다니고 있었을 때였다.
무대장치 물을 트럭에 싣고 가수와 악사들을 버스에 태우고 지방공연 공연 길에 나섰을 때였다. 충북 충주에서 공연을 마치고 제천 공연을 하러 비포장도로인 박달재를 넘어 가다가 트럭의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박달재에서 다이어바퀴를 갈아 끼우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는 촌로(村老)가 있어 고개 이름을 물으니 ‘천둥산 박달재’라 하였다.
할아버지가 지나간 산모퉁이를 보니 부슬부슬 궂은비가 내리고 있는 속에 농부인 듯한 내외가 성황당 돌무덤 옆 장승 앞에서 .울며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때 얻은 시상을 메모해 둔 것에다가 이 고장 사람들에게서 들은 박달 선비와 금봉이의 전설을 엮어 노래 가사로 시화(詩化)한 것이 '울고 넘는 박달재였다.

*.반야월 선생(1917. 8. 1~2012. 3. 26) 이야기 
  우리나라의 대중가요계에서 세 보물(三寶)같은 음악가를 꼽으라면 작사자에 반야월, 작곡가 박시춘, 가수로 이난영을 든다.
그 중에서도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낸 작사가, 그리고 가장 많은 노래비를 보유한 작사가가 바로 반야월 선생인데 그의 대표작이 ‘울고 넘는 박달재’다.
  반야 선생은 생전에 늘 말하기를 내 고향은 마산(馬山)이지만 박달재가 있는 제천(堤川)은 영원한 나의 제2의 고향이라 하였다.
제천시에서도 내 고장을 빛낸 반야월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박달재공원에 시비를 세우고, ‘명예 제천시민’증을 드렸다.
제천시는 2013년까지 국비의 지원을 합한 18억 2,000만원으로 990㎡ 규모의 반야월 기념관을 지을 예정이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서 선생은 생전에 음악과 관련된 소장품 158 종을 제천시에 무상으로 기증하겠다는 양해각서를 전달했다. 그분이 평생 모은 기록물 사진 악보 소장품들이었다.

-  선생의 본명은 박창호로 1917년 경남 마산(현 창원시)에서 태어나 진해농산학교를 다녔지만 집안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가수 지망생이 되었다.
23살 나던 해에 태평레코드사가 주관한 콩쿠르에서 입상(1939년)하면서 이어 그 전속 트로트 가수가 되어 '진방남’이란 예명(藝名)으로 활동하였다.
그 무렵 가수로 부른 노래가 '잘있거라 항구야', '불효자는 웁니다', '고향 만리' 등의 히트곡이었다.
해방 후에는 ‘반야월(半夜月)’이란 이름의 작사가(作詞家)로 주로 활동하였다.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권해경의 '‘산장의 여인’, 이미자의 ‘열아홉 순정’,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 김희태가 부른 '소양강 처녀,' 등 주옥같은 히트곡이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작품이다.
그가 생전에 70여년 간 남기고 간 작사가 무려 5,000여곡이나 되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작이 32세 때 작사한 ‘울고 넘는 박달재’다.

  2005년 KBS가 가요무대 20년 기념행사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107회로 어느 노래보다 가장 많이 방송된 가요가 ‘울고 넘는 박달재’였다 한다
1948년에 쓰여진 이 노래가 불리어진 때가 6.25전쟁(1950~1963) 이 한창인 무렵이었다.
전쟁 중 우리 민족은 피난살로 정처 없이 떠돌 때로, 우리 모두가 심신이 고달프고 정이 매말랐던 시대였다.
그런 무렵 당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달래주며 위로를 주던 노래가 ‘울고 넘는 박달대’였다.
그래서 이를 부른 무명의 가수 박재홍을 일약 대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노래가 ‘울며 넘는 박달재’로 지금까지도 애창이 되고 있는 국민가요의 하나가 되었다.

*. 박달재(453m)의 어원
  노랫말의 ‘천둥산 박달재’에서의 박달은 금봉이의 연인과 연관된 낙방거사 박달이를 말하고 있지만 한국에는 박달(朴達)이란 이름의 산이 많다.
파주 박달산(370m), 괴산 박달산(825m), 안동 박달산(580m) 등등.
박달은 박달나무의 준말로 한자어로는 단목(檀木)이라 쓴다. 그 ‘檀’(단)자가 檀君王儉(단군왕검)에서 박달나무 ‘檀’(단) 자가 보이고, 이승휴의 역사서 제왕운기(帝王韻紀) 단군(檀君) 설화에 나오는 ‘신단수(神樹)’가 삼국유사의 ‘神樹’의 ‘壇’과 달리 박달나무 ‘檀(’박달나무 단) 자로 나온다. 

  정감록에 의하면 제천의의 천등산(天登山, 808m), 충주의 인등산(人登山, 667m), 지등산(地登山, 535m)은 삼재(三才)가 되는 산들로서 충주 8경 중 7경에 해당하는 산들로  이 세 산은 태극무늬를 이루고 있어 이 세 산들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천하 명당자리가 있는 곳이라 한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아니라, '천인지(天人地)' 삼재(三才)다.
사람 위에 하늘이 있고 사람 밑에 땅이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박달재는 아득한 옛날부터 하늘에 천제(天祭)를 지내던 신성스런 곳이었다.
그런 박달재가 호사가(好事家)들에 의하여 위 사진 내용과 같이 박달이란 낙방거사와 그의 장원급제를 기다리는 금봉이란 처녀와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전설로 승화 된 것이다.

*. 천등산 박달재 이야기  
  높이 504m의 박달재 위치를 정확히 말하면 차령산맥의 지맥인 구봉산(九鶴山,971m)과 시랑산(侍郞山, 691m) 의 안부(鞍部)에 해당 되는 곳에 있다.
고개를 뜻하는 말이 고개 외에도 ‘령(嶺), 치(峙), 현(峴), 재’ 등이 있듯이 박달재의 이름도 박달산(朴達山), 박달령(朴達嶺), 박달치(朴達峙), 박달현(朴達峴)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천둥산 박달재’를 정확히 말하면 ‘시랑산 박달재’라 하여야 하는데 왜 '천둥산 박달재'이라 하였을까?
  천등산(807m)은 박달재와는 원서천이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대략 9km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산으로 천등산의 재는 '다릿재'이지 박달재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선 중엽 박달재를 ‘이등령(二登嶺)’이라 부르던 재라는 기록에 유념해야 한다.
. ‘이등령(二登嶺)’이란 제천의 천등산(天登山), 충주 지역의 지등산(地登山)이 연이은 영마루라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1940년대에는 산이름이 세분화 되지 않았거나 이름난 큰 산만을 이 고장 사람들은 기억한 데서 온 것이라 유추해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반야월의 '울고 넘는 박달재'가 먹고 살기 힘들어 등산에는 무관심하던 시절인 1948년에 쓰인 노래 가사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가사에 나오는 고개가 '부엉이가 우는 산골'에 있는, '왕거미가 집을 짓는' 고개요, '도라지 꽃 피는 하늘 고개'라고 한 것을 보면, 한적한 두메 산골의 하늘 같이 높은 고개다. 지금의 생각과 눈으로 옛날을 보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 부근 사람들도 시랑산은 잘 몰라 천등산의 일부거니 해서 '천등산 박달재'라 했을 것이다.

*. 외설의 목각 조각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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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달재에 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스피커를 통하여 들려오는 구성진 '울고 가는 박달재' 노래다.
그 다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 목각으로 만든 너무나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요란한 남녀의 거시기로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가기엔 민망할 정도다. 이를 아는 부모가 박달재 찾기를 꺼릴 수도 있는 일인데 어떤 이유로 왜 이곳에는 외설선 목각이 많은 것일까?
풍수지리학적으로 산의 형국으로 보면 박달재가 있는 시랑산(侍郞山, 691m)은 물론 천둥산도 음양(陰陽)으로 보면 양(陽)에 해당하는 낭성 산이요, 이 고장에서 가장 높은 산 월악산(1,097m)은 음(陰)에 해당하는 여성 산이다.

-덕주골 덕주사 뒤편 수산리 쪽에서 월악산 영봉을 바라보면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 모습과 닮은 형태이다. 옛 사람들은 태양을 양(陽), 달을 음(陰)이라 했으며 사람과 연관하여서는 양(陽)은 남자, 음(陰)은 여자라 하였다.
그래서 산이 여자의 모습을 한 산이라 해서 달 ‘月’을 넣어 월악산(月嶽山)이라 칭한 것이다. 덕주골 덕주사에 가면 절의 경내에 남근석(男根石)이 있다. 월악산의 음기(陰氣)를 막아 주기 위해 세워 놓은 것 같다.“
                                                                        - 졸저 ‘국립공원 산행기'293쪽

그래서 박달재에 외설스런 나무 조각이 많은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시랑산(侍郞山, 691m)이란 산 이름은 옛날 이 고장에 소씨(蘇氏)라는 이가 신라 시절 시랑(侍郞)이란 벼슬을 한 마을 산이라 해서 시랑산(侍郞山)이라 했다는 산이라 한다.
그곳에 등산안내판에 의하면 그 등산 코스는 다음과 같다.
박달재(13분)→ 단군비석(30분)→송전탑1, 2(10분)→ 바위지대(10분)→정상(20분)→능선 갈림길 (40분)→왕당 11km
박달재에서 시작하는 그 등산길에 단군비석(君碑石)이 있다니 그 박달나무 '檀'(단) 자도 우연이 아닌 것이리라.


*. 왜 ‘울고 넘는 박달재’라 하였을까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박달재는 울며 넘는 고개였다.
신라 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울면서 월악산을 향하다가 넘던 고개가 바로 박달재였다.
어린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 가면서 통한의 눈물로 울며 넘던 고개도 박달재였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청운의 뜻을 장원급제에 두고 한양을 갔다가 낙방거사 신세가 되어 돌아오는 선비들이 울며 넘던 고개가 박달재였다.
 거기에 사족(蛇足)을 달면 '울 넘는 박달재'를 '울 넘는 박달재'로 고쳤으면 좋겠다.

'울고'는 과거요, '울며'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울며'로 하면 '울며 울며 넘는' 고개란 뜻으로 시상이 더 깊어지고 살아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나 더 말한다면 3절로 된 이 노래를 자세히 살펴 보면 1~2절의 주체는 금봉이요, 3절의 주체는 박달이다. 그런데 2절 끝은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의 주체가 박돌이가 되어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사코 우옵니다, 박달재 금봉이는' 으로 고쳤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 박달재는 눈물의 고개만이 아니었다.
이 나라를 침범하는 10만 대군의 거란족을 물리친 고려 명장 김취려(金就礪) 장군의 전승지의 고개요, 삼별초군(三別抄軍)이 몽고군을 격퇴한 고개기 빅딜제이기도 하였다.

*. 박달재 공원 이야기 
  박달재에는 광장과 그 아래쪽의 금봉이와 박달의 만남과 헤어짐과 관련된 석각 조각이 있는 '박달재 휴게소' 와 사랑산 산록에 조성한 '박달재 목각공원' 이 있다.

그 중 백미는 박달휴게소에 속한 '박달재 노래비'와 '금동이와 박달이 동상'이다.
동상 그 밑을 장식하고 있는 박달재 전설과 그 만남과 이별의 장면 조각도 일품이다.
  다음 그림은 그 조각 하나 하나다.
    
-박달재의 유래: 조선조 중엽에 경상도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러 한양을 가던 중 지금의 평동리 마을의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거기서 만난 금봉이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며칠 유하다가 급제 후 함께 살기로 굳게 언약하고 한양에 갔으나 낙방거사가 된 박달은 면목이 없어 평동으로 돌아가질 못하였다.
그걸 모르고 박달을 기다리던 금봉은 님이 떠난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다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체 죽고말았다. 
장례 사흘 뒤에야 이를 안 박달은 땅을치고 통곡하다가 금봉이가 고갯길을 달려 가는 환형을 보고 달려가다가 그만 천길 낭떨어지에 떨어져 그도 죽고 만다. 이후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박달재라 하였다. 



.
  박달재 목각공원은 박달과 금봉이의 사랑을 주제로 하여 2006년에 조성된 공원이다.
이 공원내에는 제천시 17개의 읍, 면, 동의 지역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장승과, 인간 출생의 띠를 표현한 작품 그리고 생로병사의 인간의 생활을 표현한 작품이 있다.
우리를 자청하여 기꺼이 목각공원으로 안내해 주던 권태희 제천 관광문화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 만나 아들 딸 낳고 원없이 사는 박달과 금봉이의 사랑을 형상화 것이라 한다. 

 
 








  목각공원에는 이런 작품이 100 여 개가 있다. 조각가는 성각 스님(속명 어성호)으로 춘천시의 극락암에서 주지로 있다가, 14년 전 제천을 찾았다가 박달재의 풍광에 흠뻑 취해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성각 스님은 박달과 금봉이 전설을 불교와 접목한 불교 조각공원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중 백미는 1천년이 넘는 느티나무 안에 무려 3년6개월 동안 500 나한상과 삼존불을 손수 작업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 개금불사(改金佛事)가 끝나면 박달재는 또 하나의 보물을 갖고 우리를 또 한 번게 부르게 될 것이다.
                                                                                -2012년 7월 유난히 더웠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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