蕙園의 '美人圖' 이야기 ![]() 다 빈치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대상과 대상 사이를 구분 짓는 윤곽선을 흐리게 만들어 대상들이 서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것처럼 표현하는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더욱 신비롭게 표현하였다 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은행가 프란체스코 지오콘도의 아내다. 모나 리자(Mona Lisa)에서 '모나(Mona)'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이고, '리자(Lisa)'는 그의 남편인 지오콘도의 아내 이름인 '엘리자베타(Elisabetta)'의 약칭이라 한다. 리자가 24∼27세 였을 때의 초상화다. 이 그림은 미완성 그림으로 레오나르드가 프랑수아 1세 왕의 초청을 받고 궁중에 가져 갔다가 왕에게 4,000 에큐에 팔린 그림으로 현재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미완성 ??????????????? 요 재 수정 이 그림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미인은 아니면서도 화장 하나 하지 않은 그 얼굴이 아름답고 품위 있는 모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신비의 미소를 띤 표정 묘사 때문인 것 같다.그것보다 르네상스 대표작가 미켈랄제로의 대표작이라서 그럴 것이고, 위 이야기처럼 왕이 탐내어 고가를 주고 구입하게 된 경위 등등일 것이다. ![]() 2014년 3월 21일 ~ 6월 15일까지 열렸던 1부에서는 주제가 '간송 전형필'이었는데 그때 막걸리 먹는다고 돈을 아끼다가 안 사와 안타까워 하던 간송에 대한 책자를 요번엔 큰 맘 먹고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간송 전형필'(이충렬 작)' 등 몇 가지 책을 사가지고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비를 맞으며 돌아왔다. 일본 강점기에 일인(日人)과 맞서서 일본으로 흘러가는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우리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신(守護神)' 간송 전형필 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澗松'이란 호는 산골 물 '澗'(간), 소나무 '松'(송) 자로 전형필 선생을 문화재 수집가로 이끌어 준 스승 오세창 추사체 서예대가 지어준 호(號)다. 2부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고화(古畵) 문화재가 미켈란제로의 '모나리자'와 대비할 수 있는 동양 한국의 여인의 미를 그린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美人圖)'다. 혜원은 그림에 제화시를 그리는 습관이 있다. 그 칠언(七言) 제화시(題畵詩)를 ilman은 양장시조(兩章時調) 형식으로 번역해 보았다. 盤礴胸中萬化春 (반박흉중만화춘) 筆端能與物傳神 (필단능여물전신) -혜원 신윤복 -헤원의 제화시 화가의 마음 속이 만 가지 봄기운이니붓끝은 능히 만물과 더불어 초상화를 그리게 하네 -ilman의 시조 역 우리 나라 미인도(美人圖) 중에도 최고의 걸작이라는 혜원의 '美人圖' 진본 옆에 그 소개 설명이 있는데 이마저 촬영이 금지되어 그 내용을 생각하며 여기에 몇자를 보탠다. -미인도의 주인공은 한양의 풍류생활 속에 만난 어느 젊은 기생의 초상화(肖像畵) 같다. 탐스러운 트레머리에 젖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들어날 만큼 기장이 좁은 삼회장저고리를 입었다. 일부러였을까. 반쯤 풀어 헤친 저고리 옷고름과 함께 어여쁜 섬섬옥수(纖纖玉手)로 자색 세 구술의 노리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조선시대 이래 부녀자들의 몸치장에 쓰인 대표적 장신구라는 노리개다. 복스러운 맏며느리 같은 둥근 얼굴로 모나리자가 무얼 깨닫고 미소 짓는 얼굴이라면 이 미인도의 얼굴은 무슨 생각에 골똘히 잠신 모습이다. 다소곳한 여인의 몸을 약간 앞으로 내민 자세인데, 속곳을 여러 겹 껴입은 옥색치마는 배추처럼 배가 불룩하다. 그 쪽빛 치마 끝에 살포시 내민 버선의 모습은 몸을 떠받치듯 여인의 몸매를 꾸미는 예쁜 힘이다. 이 그림을 그린 혜원 신윤복은 르네상스 시절의 최고의 조각가요, 건축가, 화가라로 생전에 부귀영화를 최대로 누린 미켈란젤로 미술가와 달리, 우리의 신윤복은 생(生)과 사(死)가 불분명한 살아생전 저잣거리를 떠돌던 무명의 환쟁이였을 뿐이다. -그는 고령 신씨(申氏)로 자는 입부(立夫)요, 호는 혜원(蕙園)이다. 신한평(申한枰)의 아들로 풍속화를 잘 그렸다. (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 혜원은 마치 방외인(方外人)처럼 속세을 벗어나 시중잡배인 여항인(閭巷人)과 어울리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하면서 지내던 사람이다. (이익의 손자 이구환) - 혜원 신윤복(1758~1813 이후 ?)은 고령신씨 족보에 유명한 도화원(圖畵院) 일재 신한평과 홍천 피씨의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부인이 누구인지 자녀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행적이 묘연한 불가사의 한 화가다. ('간송 전형필', 이충렬 지음) 그렇게 보잘 것 없는 평가를 받던 혜원이 근세에 와서 그 진면목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혜원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이 일본의 미술가사들이었다. - 조선의 시정촌락 풍속을 정묘하고 농염하게 그린 풍속화가다. ( '조선미술사' 세키노 다다시) - 신윤복은 동양화의 조선화와 미술의 생활화를 실현한 제일인자. ('조선 미술사 조선미술계의 당면과제', 미술평론가 윤희순)그의 호 '혜초(蕙草)'는 '혜초정원蕙草庭園)'을 줄인 말로 '혜초'란 콩과에 달린 '영릉향'이란 풀로 7월에 작은 나비모양의 꽃이 피는 평범한 풀이다. 혜원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여행작가라고 떠들고 다니는 무명작가로 일만원 어치 술이나 먹고 다닌다 하여 ilman 이란 호를 쓰고 있는 나같이 평범히 취급 받던 사람인 것 같다. ![]() 간송이 이 같은 보물을 어찌 그냥 받을 사람인가. 그 몇 배의 댓가를 치르고도 간송은 묵묵히 이를 숨긴체 연장자인 위창 김용진 씨보다 먼저인 1962년 1월 26일 57세를 살다가 가셨다. 간송 전형필 아니면 아무도 못할 위대한 문화재 보호란 찬란한 업적을 후세에 영원이 남기시고-. 이렇게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우리 문화 유산이 국보 12점에 보물이 10점, 4점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그 분이 평생을 온 재산을 바쳐서 수호하여 남긴 작품을 상북동 소재 간송박물관에서는 매년 5월과 9월에 전시하는데 개관 이후 처음으로 동대문 DDP디자인박물관으로 나들이를 나와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서적: '산송전형필'(이출렬 작), '네이버 지식백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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