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공원 산행 Photo 에세이'를 마치며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은 1872년 미국의 옐로스톤(Yellowstone)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 이어 1967년 12월 지리산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 된 후 1988년 20번째로 월출산이 지정되어 총 20 곳으로 국토의 %에 이른다.
국립공원은 그 나라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경관으로 자연경치를 대상으로 한 '산악지역', 해양을 대상으로 한 '해상지역' 그리고 경주와 같은 '고적 지역'을 대상으로 크게 3으로 나눈다.
그중 나는 10월에 연재돌 '국립공원 소백산'까지 국립산악공원16개의 산 행기를 2009년 10월호로 대 단원을 마치게 된다.
그동안 아낌없이 지면을 제공하여 준 '문학저널'과 그 독자에게 우선 고마운 말씀을 보낸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서 매회 연재물이 나기기 전에 언제나 나는 그 산을 찾았다.
'산천은 유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는 말은 옛 이야기일뿐 오늘날은 산천도 유구하지 않아서 새로운 현장을 기록에 닮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문학저널에 연재한 이 작품에 가필 정정을 더하여 하나의 단행본으로 꾸밀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발표할 산을 다시 찾는다는 것은 항상 나를 즐겁게 하였다.
어제 정형외과를 찾았더니 무릎 관절에는 아직 이상이 없는데 그 앞 조개골이라고도 하는 슬계골에 이상이 있어 더 이상 산행은 무리라는 의사의 진단을 무릅쓰고 망팔순(望八旬)을 넘은 나이에 금년과 작년의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 덕유산 등의 단독 종주는 내 일생 중 에 가장 아름다운 행복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남보다 자주 산행을 하였거나 더 많은 산을 다닌 것은 아니지만 국문학(國文學)이란 커다란 봉을 넘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국문학도의 눈으로 산을 보았다.
그래서 산의 이름, 산에 얽힌 전설 그리고 거기서 산을 살다간 선인들의 발자국을 찾아 헤맸다.
그중 무엇보다 산의 역사를 가장 구체적으로 오래 간직하고 있는 그 산에 있는 사찰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 온 것 같다.
나의 이 '국립공원 산행 Photo 에세이'는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가장 처음 쓰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국립공원 산행기를 마치면서 생기는 또 다른 욕심은 한국 도립공원을 완성하고 죽었으면 하는 것이 또 하나의 꿈이지만 이제 그 꿈은 접어야겠다.
"무리를 하시면 걷지 못할지도 모르니 무릎을 아껴 쓰셔야지요."하는 의사의 충고를 따라야 되겠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산보다 섬과 섬에 있는 산을 주로 쓸 생각이다.
이렇게 쓴 글은 개인에게 보다 도서관에 기증하여 후세에게 널리 참고가 되게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 어의곡 이야기
소백산을 당일로 종주하기 위해서 가장 빠른 길은 어느 코스일까?
어의곡(於衣谷)에서 오르는 길이다.
희방탐방지원센터~비로봉 : 7.9km
삼가탐방지원센터~비로봉 : 5.5km
비로사 방향 죽령탐방지원센터~비로봉 : 11.5km
천동탐방지원센터~비로봉 : 6.8km
어의곡탐방지원센터~비로봉 : 5.1km
그래서 수도권에 사는 우리들은 소백산행 들머리를 어의곡으로 잡는다.
그런데 왜 이름이 어의곡일까? 한자로 ‘於衣谷’인 것을 보면 옷과 관계있는 이름 같은데-.
-이곳은 단양군 가곡면 지역으로서 두 골짜기가 어울러져 있으므로 엉의실 또는 어의곡이라 하다가 어의곡이라 하게 되었다는 기록 이외에는 더 찾을 길이 없다. 여기서 '엉의'가 '어울리다'의 방언이 아닌가 생각해 보면 두 골짜기가 어울러 지는 곳이라고 하겠지만 ‘於衣谷’의 어원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 것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어의곡 주차장에 '국망봉→ 7.4km 비로봉→5.1km'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길은 어의계곡을 옆에 끼고 계류의 물소리를 들으며 오르는 완만한 길이다.
처음에는 평지 같이 부드러운 길이다가 경사길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정성들여 설치해 놓은 통나무계단이어서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부드러운 산길이었다. 게다가 500m 간격으로 있는 푯말이 이정표 역할을 하면서도 해발까지를 친절히 알려 주는 것이 국립공원답다.
우리들의 최종 목적지는 희방사라서 비로봉을 향하고 있는데 가는 길이 국망봉 길이라 마음속으로 걱정하였더니 마지막 긴 통나무 오름길이 끝나고 능선에 올라가서도 한참만에 비로봉을 400m를 앞두고 '어의곡 4.7→km/국망봉→2.7km/ 비로봉→0.4km' 라는 이정표가 있다.
능선이 시작되는 곳부터는 평탄한 길이 열리는데 왼쪽으로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하늘을 찌르며 무성하였고, 길 위에는 그 잎이 떨어져 있는 것이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하여 검은 양탄자를 밟고 거니는 듯 푹신푹신하다.
5월 하순이면 소백산 철쭉제라고 하지만 그보다 조금 일러서인가 나는 그 복을 갖지 못하였다. 앞이 아득한 운무 속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정상이 가까워 오나 보다. 그 운무는 바람에 따라 재를 넘고 있었는데 옷깃을 적시며 추위까지 몰아와 황급히 반소매 위에 긴팔의 옷을 걸친다.
가끔씩 바람에 운무가 물러날 때마다 문득 문득 정상이 보이는 곳부터는 자동차 폐타이어를 이용하여 정성껏 만든 나무 층계 길이 정상을 향하고 있다. 그 멋진 층계를 오가는 운무 속에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흐릿한 구름 속에 봉우리 위에 곰실곰실 움직이는 사람들이 멀리서 보니 하나나의 점들 같더니 가까이 다가갔더니 와글와글 하는 소리가 된다. 나도 그중에 하나가 되었다.
소백산은 능선 오르기가 조금 힘들뿐 일단 능선 길에만 들어서면 평지 같은 길이고 봉우리만 지나면 길가에 잡목이 없는 산이라서 일망무제로 시야가 넓게 탁 트인다.
어의곡 길은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에서 '苦'(고)가 짧아서 좋았으나 짙은 연무는 안타깝게도 그 멋진 전망을 가리고 있었다.
*. 소백산 이야기
-조선 전기 대문호 서거정도 소백산에 올라 '소백산'이란 시를 읊었다.
68년을 살다간 그분보다 더 많은 나이에 올랐으니 어찌 이 ilman이 감흥이 없겠는가.
나는 남보다 자주 산행을 하였거나 더 많은 산을 다닌 것은 아니지만 국문학(國文學)이란 커다란 봉을 넘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국문학도의 눈으로 산을 보았다.
그래서 산의 이름, 산에 얽힌 전설 그리고 거기서 산을 살다간 선인들의 발자국을 찾아 헤맸다.
그중 무엇보다 산의 역사를 가장 구체적으로 오래 간직하고 있는 그 산에 있는 사찰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 온 것 같다.
나의 이 '국립공원 산행 Photo 에세이'는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가장 처음 쓰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국립공원 산행기를 마치면서 생기는 또 다른 욕심은 한국 도립공원을 완성하고 죽었으면 하는 것이 또 하나의 꿈이지만 이제 그 꿈은 접어야겠다.
"무리를 하시면 걷지 못할지도 모르니 무릎을 아껴 쓰셔야지요."하는 의사의 충고를 따라야 되겠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산보다 섬과 섬에 있는 산을 주로 쓸 생각이다.
이렇게 쓴 글은 개인에게 보다 도서관에 기증하여 후세에게 널리 참고가 되게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 어의곡 이야기
소백산을 당일로 종주하기 위해서 가장 빠른 길은 어느 코스일까?
어의곡(於衣谷)에서 오르는 길이다.
희방탐방지원센터~비로봉 : 7.9km
삼가탐방지원센터~비로봉 : 5.5km
비로사 방향 죽령탐방지원센터~비로봉 : 11.5km
천동탐방지원센터~비로봉 : 6.8km
어의곡탐방지원센터~비로봉 : 5.1km
그래서 수도권에 사는 우리들은 소백산행 들머리를 어의곡으로 잡는다.
그런데 왜 이름이 어의곡일까? 한자로 ‘於衣谷’인 것을 보면 옷과 관계있는 이름 같은데-.
-이곳은 단양군 가곡면 지역으로서 두 골짜기가 어울러져 있으므로 엉의실 또는 어의곡이라 하다가 어의곡이라 하게 되었다는 기록 이외에는 더 찾을 길이 없다. 여기서 '엉의'가 '어울리다'의 방언이 아닌가 생각해 보면 두 골짜기가 어울러 지는 곳이라고 하겠지만 ‘於衣谷’의 어원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 것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어의곡 주차장에 '국망봉→ 7.4km 비로봉→5.1km'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길은 어의계곡을 옆에 끼고 계류의 물소리를 들으며 오르는 완만한 길이다.
처음에는 평지 같이 부드러운 길이다가 경사길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정성들여 설치해 놓은 통나무계단이어서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부드러운 산길이었다. 게다가 500m 간격으로 있는 푯말이 이정표 역할을 하면서도 해발까지를 친절히 알려 주는 것이 국립공원답다.
우리들의 최종 목적지는 희방사라서 비로봉을 향하고 있는데 가는 길이 국망봉 길이라 마음속으로 걱정하였더니 마지막 긴 통나무 오름길이 끝나고 능선에 올라가서도 한참만에 비로봉을 400m를 앞두고 '어의곡 4.7→km/국망봉→2.7km/ 비로봉→0.4km' 라는 이정표가 있다.
능선이 시작되는 곳부터는 평탄한 길이 열리는데 왼쪽으로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하늘을 찌르며 무성하였고, 길 위에는 그 잎이 떨어져 있는 것이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하여 검은 양탄자를 밟고 거니는 듯 푹신푹신하다.
5월 하순이면 소백산 철쭉제라고 하지만 그보다 조금 일러서인가 나는 그 복을 갖지 못하였다. 앞이 아득한 운무 속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정상이 가까워 오나 보다. 그 운무는 바람에 따라 재를 넘고 있었는데 옷깃을 적시며 추위까지 몰아와 황급히 반소매 위에 긴팔의 옷을 걸친다.
가끔씩 바람에 운무가 물러날 때마다 문득 문득 정상이 보이는 곳부터는 자동차 폐타이어를 이용하여 정성껏 만든 나무 층계 길이 정상을 향하고 있다. 그 멋진 층계를 오가는 운무 속에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흐릿한 구름 속에 봉우리 위에 곰실곰실 움직이는 사람들이 멀리서 보니 하나나의 점들 같더니 가까이 다가갔더니 와글와글 하는 소리가 된다. 나도 그중에 하나가 되었다.
소백산은 능선 오르기가 조금 힘들뿐 일단 능선 길에만 들어서면 평지 같은 길이고 봉우리만 지나면 길가에 잡목이 없는 산이라서 일망무제로 시야가 넓게 탁 트인다.
어의곡 길은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에서 '苦'(고)가 짧아서 좋았으나 짙은 연무는 안타깝게도 그 멋진 전망을 가리고 있었다.
*. 소백산 이야기
-조선 전기 대문호 서거정도 소백산에 올라 '소백산'이란 시를 읊었다.
68년을 살다간 그분보다 더 많은 나이에 올랐으니 어찌 이 ilman이 감흥이 없겠는가.
百里揷雲間(위이백리삽운간) 백 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에 솟았네.
分明劃盡東南界(분명회진동남계)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地設天成괴破견(지설천성괴파견) 하늘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서거정
누가 좋은 산 묻거들랑 '소백산이라' 하거라.
겸손을 배우려면 '소백산에 가라 '하거라.
온유함을 본받으려면 '비로봉에 가보라' 하거라.
철쭉에서 초원(草原)이다가 단풍에서 대설원(大雪原)이 되는 곳.
죽어서 산이 되고 싶다거든
'소백산이라 '하거라.
-ilman
이름만으로는 소백산(小白山)은 태백산(太白山)보다 작은 산으로 여성적인 산이라 한다.
그러나 능선의 부드럽기는 여성 같이 부드러우나 그 크기는 남성 같이 장대하면서도 수려하다. 그 높이가 태백산보다 27.2m가 낮을 뿐 넓이는 국립공원 중에서도 지리산, 설악산 다음으로 큰 산이다
소백산 능선에는 신선봉(1.398m)~ 국망봉(1.420.8m)~비로봉(1.439.2m)~ 연화봉(1.457.3m)~제2연화봉(1.357.3m)~ 죽령에 걸쳐 해발 1.300m 이상의 수많은 봉이 능선을 이루고 있다.
택리지에 의하면 "조선조 유명한 실학자이며 풍수지리가인 남사고(南師古)가 죽령을 넘다가 이 산을 보고 '사람 살리는 산'이라고 하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고 지나갔다."는 산이다.
*. 국망봉을 바라보며
비로봉에서 온 쪽을 향하여 우뚝 솟은 소백산의 국망봉은 그냥 무심히 지나칠 산이 아니다. 신라의 망국을 슬피 울던 마의태자의 한(恨)이 어린 산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의 잦은 침략으로 나라를 지킬 수가 없었다. 하여 군신회의를 소집하고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마의태자는 천년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좌절되자, 개골산[금강산]으로 가던 중 이 봉에 올라 슬피 울며 나라[國: 신라 경주]를 멀리 바라보며[望]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곳이라 해서 국망봉(國望峰)이라 한 산이다.
그 국망봉 쪽으로 봄 같지 않은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망국(亡國)의 한(恨)을 베옷에 새겨 두고
경주 바라 통곡하던 태자의 넋을 실어
서라벌
향한 북서풍은
지금도 울고 있나?
. 이 국망봉 아래에 있는 죽계(竹溪)는 신라에 이어, 고려 충숙왕 때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죽계별곡(竹溪別曲)이란 그의 고향인 풍기 죽계(竹溪:영주시 순흥) 를 노래한 5장의 경기체가(景氣體歌)이다. 다음은 그 5장 중 1장이다.
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죽령남 영가 북 소백산 전) *안동의 고려 시대 옛 이름
千載興亡 一樣風流 *順政城裏(천재흥망 일양풍류 순정성리) *순흥의 옛 이름
*他代無隱 翠華峯 *天子藏胎(타대무은 취화봉 천자장태) '다른 데 없는'의 이두식 표기
爲釀作中興 景幾何如(위양작중 경기여하)
淸風杜閣 兩國頭御(청풍두각 양국두어)
爲 山水淸高 景幾何如(위 산수청고 경기여하)
죽령 남 안동 북 소백산 앞에
천년 흥망 한 결같이 순흥 성내에
딴 데 없는 왕의 태(胎) 취화봉에 모셔서
아, 이 고을을 중흥하니 그것이야말로 어떠하니잇고
청풍의 두연(杜衍)의 높은 집에 양국의 관함 지니매
아 산수가 맑고 높은 것이 그것이야말로 어떠하니잇고
소백산의 국망봉을 발원으로 하여 흘러내리는 물이 백운동으로 흘러서 사천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유명한 죽계천이다.
이 계곡은 물굽이 하나하나가 절경을 이루다가 백운동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준 이가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1곡 백운동 취한대, 2곡 금성반석, 3곡 백우담, 4곡 이화동, 5곡 목욕담, 6곡 청령동애, 7곡 용추비폭, 8곡 금당반석, 9곡 중봉합류
*. 비로봉(毘盧峰) 이야기
이 산의 주봉인 비로봉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애써 오른 비로봉 정상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우리나라에 산 중에는 비로봉(毘盧峰)이란 이름이 수없이 많다. 그런데 그 공통점은 묘향산 비로봉(1,909m), 금강산 비로봉(1,638m), 오대산 비로봉(1,563m), 속리산 비로봉(1,057m)처럼 모두가 산 정상 봉우리의 이름들이라는 것이다.
비로(毘盧)란 무슨 뜻일까?
-비로(毘盧)란 불교적인 용어로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으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그 원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法界)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종파마다 각각 달리 부른다.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불', 진언종에서는 '대일여래', 천태종과 법상종에서는 '법신불' 로 부르는 부처다.
절에서 대웅전이란 석가모니를 모신 전각이니 그 큰 영웅[大雄]이 바로 불교에서 으뜸 되시는 부처님이 석가모니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우리들은 비로봉(毘盧峰)이라 하는 것이다.
비로봉에서 내려오다 보니 왼쪽에 대피소 같은 건물이 직진 코스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거기까지 멋진 길이 나 있지만 갔다가 되돌아 와야 할 것 같은데 먼 발치에서 보고 온 것이 큰 실수가 되고 말았다. 그 건물은 대피소가 아니라 주목 관리소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길로 가야 그 아래에 있는 한국 제1의 주목군락지를 볼 수 있는 것인데 지나친 것이다. 그 길을 통하여 연화봉으로 가는 길이 따로 있었다.
*. 갈림길 민백이재
비로봉을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쉬워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연화봉을 향하다 보니 주목 관리소를 조금 지나 비로봉에서는 0.6km 지점에 민백이재(1,405m)에 이르렀다.
민백이재는 구름 같은 사람들이 단양읍 천동리로, 비로사로 충북과 경북의 도(道)를 넘나드는 고개다. 민백이재를 넘어 천동계곡을 따라 2시간 20분/ 6.2km를 내려가면 다리안폭포와 소백산유스호텔을 만날 수 있다.
이 고개에서 비로봉을 거쳐 삼가탐방지도소 쪽으로 간다면 삼가리매표소 가기 전인 2시간 정도에 비로사를 만날 수가 있다.
이제 우리는 희방사까지 6.1km를 더 가면 되는데 길은 순탄한 길로 겁을 먹게 하는 구간이 한 군데도 없다.
*. 연화봉(蓮花峰) 이야기
비로봉에서 2.5km를 내려와서 그래도 약간은 힘들게 올라왔구나 했더니 여기가 '제1연화봉'(1,394.3m)인데 천문대가 2km 남았다고 길가에 정상석이 이정표로 서있다. 봉이 높기는 한데 모양이 초라한 모양이다.
소백산에는 연화봉이 셋이나 있다.
여기가 제1연화봉(1394.4m)이고, 죽령에서 올라오는 곳에 있는 제2연화봉(1,357.3m)과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1,383m)이 그것이다.
-연화봉에서 시작되는 희방계곡은 높이 28m의 웅장한 희방폭포와 더불어 뛰어난 경관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북으로 흐르는 계곡들은 단양팔경의 시발점이다.
연화봉(蓮花峰)도 비로봉이 그렇듯이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다.
불교의 상징이 연꽃이라면 그 이유를 불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든다.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요, 화과동시(花果同時)이다. 사는 곳이 더럽지만 그 더러움을 꽃잎에 묻히지 아니하고, 꽃이 진 후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꽃과 열매가 같이 피고 맺는다는 것이다.
봉오리가 막 피어날 때의 모습은 불교 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제1연화봉에서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까지는 2km인데 제1연화봉을 오르내리는 길은 옛날과 달리 말쑥하게 단장하여 꾸며 놓았다.
나는 어느덧 제1, 제2의 연화봉을 거느리고 서 있는 진짜 연화봉에 올랐다.
연화봉은 소백산의 어느 봉우리처럼 사방이 툭 틔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희방사 쪽을 제외한 그 비경이 연무에 감추어져 있다.
정상석에는 한쪽에는 단양시와 뒤에는 영주시 이름이 음각된 것을 보니 이곳이 충북과 경북의 경계선이 되는 곳이었다.
이 연화봉의 멋 중의 하나는 국립소백산천문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건물 위에 우주망원경을 부착한 돔 형식도 그렇지만 그 왼쪽에 첨성대 모양 위에 얹은 돔 건물은 그 멋을 더하여 준다.
그런데 안개가 걷힐 때 언뜻언뜻 보이는 것은 이 심심산골의 산상을 향하여 꼬불꼬불 오르는 차도였다. 그 차도는 제2 연화봉 중턱을 끼고 오르는 천문대 전용의 차도로 이 높은 해발 1,380m까지 오르고 있는 것을 보며 연화봉을 땀으로만 올라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였다.
*. 천년 고찰 회방사(喜方寺)
지금까지의 완만한 내리막길이 연화봉서부터 희방사까지의 2.4km는 급경사의 위험한 돌길이었다. 부분적으로 철쭉이 핀 곳은 있었으나 대개는 망울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쪽은 산의 남쪽이라 연분홍 철쭉꽃이 제법 피고 있는 꽃길이었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희방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 염불 소리를 들으며 천신만고 끝에 안부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다.
거기부터가 악명 높은 깔딱고개였다.
길은 돌길로 널찍한데 그 가운데에 쇠 손잡이가 계속되는 500m길이지만 산의 거리는 왜 그렇게 길게 생각되는지-. 어떤 여인은 뒷걸음으로 내려 갈 정도로 가팔랐다.
그 돌길이 끝나는가 싶은 곳에 샘 같은 석간수가 있고 거기서도 한참이나 내려오니 오른쪽으로 희방사를 들어가는 산길이다.
희방사 폭포 및 희방사입구 들머리에 '소백산희방사(小白山喜方寺) 비에 다음과 같은 전설을 음각하여 놓았는데 그 내용이 계룡산의 남매탑 전설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였다. 도승 두운조사(杜雲祖師)께서 계림(경주) 유호장(兪戶長)의 무남독녀가 호환(虎患)에 당한 것을 구하여 주었다.
호장이 기뻐하여 그 은공으로 절을 지어 드리고 희방(喜方)이라 이름하였다. 이 '희방'은 곧 기쁘다는 말['喜]'와 도사가 거처하던 방('方')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그 뒤로 조선 철종대왕 때에 화재를 당한 것을 강월대사(江月大師)가 중창하였으나 불행히 6.25의 병화로 절집들이 다 전소하여 버리는 바람에 사찰에 간직한 국보 훈민정음 판목과 기타 문화재가 재가 되어 버렸다.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작전상 출입금지 지역이어서 잡초만 우거진 절이 되었다. ~ 하략
그래서 옛것이라고는 영조 때 제조 되었다는 종뿐인데, 그 종마저 단양의 대흥사에서 쓰던 것을 절이 폐사 되는 바람에 희방사로 옮겨온 것이라는데 그 크기마저 사람의 앉은키에도 못 미치는 작은 종이었다.
기대하였던 천년고찰 희방사가 옛날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희방사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얽인 전설뿐이었다
전설 속에 나오는 유호장 같은 공양주를 만나지 못하여서인가. 현재의 당우가 이름값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였다.
나라의 국보를 불태운 사람이 공산당의 짓이 아닌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아무리 전시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국군이 어찌 우리 국보급 문화재를 스스로 불태울 수 있었으며 전후에 그런 지휘관을 왜 그냥 두었는가. 당시 지도자의 소중한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이 이 정도인가하고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 한국 내륙 제1의 희방폭포
아쉬움 속에 절 아래에 희방폭포를 내려가 보았더니 지금까지 한국의 폭포를 보며 실망하던 마음을 바꿀 만큼 폭포가 우람하다. 간밤에 온 비에 물이 분 것이다.
-소백산의 으뜸가는 절경이며, 영남 제1의 폭포로 손꼽히는 이 폭포는 높이가 28m로 해발 700m에 위치하고 있다.
소백산 영봉의 하나인 연화봉에서 발원하여 몇 천 구비를 돌아서 흐르다가 이곳에서 한바탕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는 장관이 넋을 잃게 한다.
조선시대의 석학 서거정 선생이 '하늘이 내려 주신 꿈 속에서 노니는 곳'(天惠夢遊處)라 읊으며 감탄하였다는 곳이 바로 이 희방폭포였다.
희방사와 희방폭포에서의 이 감격은 오늘 일정에 들지 않은 소백산 동북쪽 기슭에 있다는 부석사(浮石寺)를 생각게 한다.
단일 사찰로는 전국에서 문화재가 가장 많이 소장하였다는 곳이 부석사(浮石寺)다.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이라는 무량수전(국보 제17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되었다는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호), 이 절을 지었다는 의상대사의 진영이 안치 되었다는 조사당(국보 제4 6호) 등이 부석사에 모셔 있다는데 철없던 젊은 시절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아름다움을 보면 다시 또 다른 아름다음에 시장해 하는데 지금, 나의 나이는 무릎이 갈 길을 막고, 그냥 가지 않고 이빨을 뽑고 가는 세월이 나를 협박하고 있으니 덧없이 흘러 가는 세월이 아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능선의 부드럽기는 여성 같이 부드러우나 그 크기는 남성 같이 장대하면서도 수려하다. 그 높이가 태백산보다 27.2m가 낮을 뿐 넓이는 국립공원 중에서도 지리산, 설악산 다음으로 큰 산이다
소백산 능선에는 신선봉(1.398m)~ 국망봉(1.420.8m)~비로봉(1.439.2m)~ 연화봉(1.457.3m)~제2연화봉(1.357.3m)~ 죽령에 걸쳐 해발 1.300m 이상의 수많은 봉이 능선을 이루고 있다.
택리지에 의하면 "조선조 유명한 실학자이며 풍수지리가인 남사고(南師古)가 죽령을 넘다가 이 산을 보고 '사람 살리는 산'이라고 하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고 지나갔다."는 산이다.
*. 국망봉을 바라보며
비로봉에서 온 쪽을 향하여 우뚝 솟은 소백산의 국망봉은 그냥 무심히 지나칠 산이 아니다. 신라의 망국을 슬피 울던 마의태자의 한(恨)이 어린 산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의 잦은 침략으로 나라를 지킬 수가 없었다. 하여 군신회의를 소집하고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마의태자는 천년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좌절되자, 개골산[금강산]으로 가던 중 이 봉에 올라 슬피 울며 나라[國: 신라 경주]를 멀리 바라보며[望]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곳이라 해서 국망봉(國望峰)이라 한 산이다.
그 국망봉 쪽으로 봄 같지 않은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망국(亡國)의 한(恨)을 베옷에 새겨 두고
경주 바라 통곡하던 태자의 넋을 실어
서라벌
향한 북서풍은
지금도 울고 있나?
. 이 국망봉 아래에 있는 죽계(竹溪)는 신라에 이어, 고려 충숙왕 때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죽계별곡(竹溪別曲)이란 그의 고향인 풍기 죽계(竹溪:영주시 순흥) 를 노래한 5장의 경기체가(景氣體歌)이다. 다음은 그 5장 중 1장이다.
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죽령남 영가 북 소백산 전) *안동의 고려 시대 옛 이름
千載興亡 一樣風流 *順政城裏(천재흥망 일양풍류 순정성리) *순흥의 옛 이름
*他代無隱 翠華峯 *天子藏胎(타대무은 취화봉 천자장태) '다른 데 없는'의 이두식 표기
爲釀作中興 景幾何如(위양작중 경기여하)
淸風杜閣 兩國頭御(청풍두각 양국두어)
爲 山水淸高 景幾何如(위 산수청고 경기여하)
죽령 남 안동 북 소백산 앞에
천년 흥망 한 결같이 순흥 성내에
딴 데 없는 왕의 태(胎) 취화봉에 모셔서
아, 이 고을을 중흥하니 그것이야말로 어떠하니잇고
청풍의 두연(杜衍)의 높은 집에 양국의 관함 지니매
아 산수가 맑고 높은 것이 그것이야말로 어떠하니잇고
소백산의 국망봉을 발원으로 하여 흘러내리는 물이 백운동으로 흘러서 사천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유명한 죽계천이다.
이 계곡은 물굽이 하나하나가 절경을 이루다가 백운동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준 이가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1곡 백운동 취한대, 2곡 금성반석, 3곡 백우담, 4곡 이화동, 5곡 목욕담, 6곡 청령동애, 7곡 용추비폭, 8곡 금당반석, 9곡 중봉합류
*. 비로봉(毘盧峰) 이야기
이 산의 주봉인 비로봉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애써 오른 비로봉 정상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우리나라에 산 중에는 비로봉(毘盧峰)이란 이름이 수없이 많다. 그런데 그 공통점은 묘향산 비로봉(1,909m), 금강산 비로봉(1,638m), 오대산 비로봉(1,563m), 속리산 비로봉(1,057m)처럼 모두가 산 정상 봉우리의 이름들이라는 것이다.
비로(毘盧)란 무슨 뜻일까?
-비로(毘盧)란 불교적인 용어로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으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그 원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法界)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종파마다 각각 달리 부른다.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불', 진언종에서는 '대일여래', 천태종과 법상종에서는 '법신불' 로 부르는 부처다.
절에서 대웅전이란 석가모니를 모신 전각이니 그 큰 영웅[大雄]이 바로 불교에서 으뜸 되시는 부처님이 석가모니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우리들은 비로봉(毘盧峰)이라 하는 것이다.
비로봉에서 내려오다 보니 왼쪽에 대피소 같은 건물이 직진 코스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거기까지 멋진 길이 나 있지만 갔다가 되돌아 와야 할 것 같은데 먼 발치에서 보고 온 것이 큰 실수가 되고 말았다. 그 건물은 대피소가 아니라 주목 관리소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길로 가야 그 아래에 있는 한국 제1의 주목군락지를 볼 수 있는 것인데 지나친 것이다. 그 길을 통하여 연화봉으로 가는 길이 따로 있었다.
*. 갈림길 민백이재
비로봉을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쉬워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연화봉을 향하다 보니 주목 관리소를 조금 지나 비로봉에서는 0.6km 지점에 민백이재(1,405m)에 이르렀다.
민백이재는 구름 같은 사람들이 단양읍 천동리로, 비로사로 충북과 경북의 도(道)를 넘나드는 고개다. 민백이재를 넘어 천동계곡을 따라 2시간 20분/ 6.2km를 내려가면 다리안폭포와 소백산유스호텔을 만날 수 있다.
이 고개에서 비로봉을 거쳐 삼가탐방지도소 쪽으로 간다면 삼가리매표소 가기 전인 2시간 정도에 비로사를 만날 수가 있다.
이제 우리는 희방사까지 6.1km를 더 가면 되는데 길은 순탄한 길로 겁을 먹게 하는 구간이 한 군데도 없다.
*. 연화봉(蓮花峰) 이야기
비로봉에서 2.5km를 내려와서 그래도 약간은 힘들게 올라왔구나 했더니 여기가 '제1연화봉'(1,394.3m)인데 천문대가 2km 남았다고 길가에 정상석이 이정표로 서있다. 봉이 높기는 한데 모양이 초라한 모양이다.
소백산에는 연화봉이 셋이나 있다.
여기가 제1연화봉(1394.4m)이고, 죽령에서 올라오는 곳에 있는 제2연화봉(1,357.3m)과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1,383m)이 그것이다.
-연화봉에서 시작되는 희방계곡은 높이 28m의 웅장한 희방폭포와 더불어 뛰어난 경관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북으로 흐르는 계곡들은 단양팔경의 시발점이다.
연화봉(蓮花峰)도 비로봉이 그렇듯이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다.
불교의 상징이 연꽃이라면 그 이유를 불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든다.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요, 화과동시(花果同時)이다. 사는 곳이 더럽지만 그 더러움을 꽃잎에 묻히지 아니하고, 꽃이 진 후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꽃과 열매가 같이 피고 맺는다는 것이다.
봉오리가 막 피어날 때의 모습은 불교 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제1연화봉에서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까지는 2km인데 제1연화봉을 오르내리는 길은 옛날과 달리 말쑥하게 단장하여 꾸며 놓았다.
나는 어느덧 제1, 제2의 연화봉을 거느리고 서 있는 진짜 연화봉에 올랐다.
연화봉은 소백산의 어느 봉우리처럼 사방이 툭 틔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희방사 쪽을 제외한 그 비경이 연무에 감추어져 있다.
정상석에는 한쪽에는 단양시와 뒤에는 영주시 이름이 음각된 것을 보니 이곳이 충북과 경북의 경계선이 되는 곳이었다.
이 연화봉의 멋 중의 하나는 국립소백산천문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건물 위에 우주망원경을 부착한 돔 형식도 그렇지만 그 왼쪽에 첨성대 모양 위에 얹은 돔 건물은 그 멋을 더하여 준다.
그런데 안개가 걷힐 때 언뜻언뜻 보이는 것은 이 심심산골의 산상을 향하여 꼬불꼬불 오르는 차도였다. 그 차도는 제2 연화봉 중턱을 끼고 오르는 천문대 전용의 차도로 이 높은 해발 1,380m까지 오르고 있는 것을 보며 연화봉을 땀으로만 올라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였다.
*. 천년 고찰 회방사(喜方寺)
지금까지의 완만한 내리막길이 연화봉서부터 희방사까지의 2.4km는 급경사의 위험한 돌길이었다. 부분적으로 철쭉이 핀 곳은 있었으나 대개는 망울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쪽은 산의 남쪽이라 연분홍 철쭉꽃이 제법 피고 있는 꽃길이었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희방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 염불 소리를 들으며 천신만고 끝에 안부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다.
거기부터가 악명 높은 깔딱고개였다.
길은 돌길로 널찍한데 그 가운데에 쇠 손잡이가 계속되는 500m길이지만 산의 거리는 왜 그렇게 길게 생각되는지-. 어떤 여인은 뒷걸음으로 내려 갈 정도로 가팔랐다.
그 돌길이 끝나는가 싶은 곳에 샘 같은 석간수가 있고 거기서도 한참이나 내려오니 오른쪽으로 희방사를 들어가는 산길이다.
희방사 폭포 및 희방사입구 들머리에 '소백산희방사(小白山喜方寺) 비에 다음과 같은 전설을 음각하여 놓았는데 그 내용이 계룡산의 남매탑 전설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였다. 도승 두운조사(杜雲祖師)께서 계림(경주) 유호장(兪戶長)의 무남독녀가 호환(虎患)에 당한 것을 구하여 주었다.
호장이 기뻐하여 그 은공으로 절을 지어 드리고 희방(喜方)이라 이름하였다. 이 '희방'은 곧 기쁘다는 말['喜]'와 도사가 거처하던 방('方')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그 뒤로 조선 철종대왕 때에 화재를 당한 것을 강월대사(江月大師)가 중창하였으나 불행히 6.25의 병화로 절집들이 다 전소하여 버리는 바람에 사찰에 간직한 국보 훈민정음 판목과 기타 문화재가 재가 되어 버렸다.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작전상 출입금지 지역이어서 잡초만 우거진 절이 되었다. ~ 하략
그래서 옛것이라고는 영조 때 제조 되었다는 종뿐인데, 그 종마저 단양의 대흥사에서 쓰던 것을 절이 폐사 되는 바람에 희방사로 옮겨온 것이라는데 그 크기마저 사람의 앉은키에도 못 미치는 작은 종이었다.
기대하였던 천년고찰 희방사가 옛날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희방사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얽인 전설뿐이었다
전설 속에 나오는 유호장 같은 공양주를 만나지 못하여서인가. 현재의 당우가 이름값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였다.
나라의 국보를 불태운 사람이 공산당의 짓이 아닌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아무리 전시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국군이 어찌 우리 국보급 문화재를 스스로 불태울 수 있었으며 전후에 그런 지휘관을 왜 그냥 두었는가. 당시 지도자의 소중한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이 이 정도인가하고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 한국 내륙 제1의 희방폭포
아쉬움 속에 절 아래에 희방폭포를 내려가 보았더니 지금까지 한국의 폭포를 보며 실망하던 마음을 바꿀 만큼 폭포가 우람하다. 간밤에 온 비에 물이 분 것이다.
-소백산의 으뜸가는 절경이며, 영남 제1의 폭포로 손꼽히는 이 폭포는 높이가 28m로 해발 700m에 위치하고 있다.
소백산 영봉의 하나인 연화봉에서 발원하여 몇 천 구비를 돌아서 흐르다가 이곳에서 한바탕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는 장관이 넋을 잃게 한다.
조선시대의 석학 서거정 선생이 '하늘이 내려 주신 꿈 속에서 노니는 곳'(天惠夢遊處)라 읊으며 감탄하였다는 곳이 바로 이 희방폭포였다.
희방사와 희방폭포에서의 이 감격은 오늘 일정에 들지 않은 소백산 동북쪽 기슭에 있다는 부석사(浮石寺)를 생각게 한다.
단일 사찰로는 전국에서 문화재가 가장 많이 소장하였다는 곳이 부석사(浮石寺)다.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이라는 무량수전(국보 제17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되었다는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호), 이 절을 지었다는 의상대사의 진영이 안치 되었다는 조사당(국보 제4 6호) 등이 부석사에 모셔 있다는데 철없던 젊은 시절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아름다움을 보면 다시 또 다른 아름다음에 시장해 하는데 지금, 나의 나이는 무릎이 갈 길을 막고, 그냥 가지 않고 이빨을 뽑고 가는 세월이 나를 협박하고 있으니 덧없이 흘러 가는 세월이 아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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