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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대공원 산행기

ilman 2013. 2. 1. 17:36

남산대공원 산행기

 

*. 남산의 다른 이름들 

 등산 차림으로 홀로 남산을 향하다 보니 내 행색이 남산에 어색한 차림 같다.
우리가 산으로만 생각해 오던 남산은 산보다는 공원으로 자리매김한 지가 오래였기 때문이다.
  남산(南山)을 옛날에는 '인경산(引慶山)'이라 하였다. '길이길이 경사스러움을 이끌어 들이소서.’ 하는 축원의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남산을 '목멱산(木覓山)'이라고도 한다.  이태조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거 개성에서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겨온 뒤에, 여기에다 신당을 짓고 매년 남산 산신 목멱대왕(木覓大王)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었다 해서 산 이름을 목멱산(木覓山)이라 한 것이다.
'목멱(木覓)'의 어원을 이렇게 풀이하기도 한다.
목멱(木覓)이라 하기 전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나무 木(목)+빽빽할 密(밀)’ '목밀산(木密山)'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에 온 중국 사신이 목밀이란 발음을 듣고 ‘木覓’(목멱)이라 쓴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발음으로는 ‘密’(밀)과 ‘覓’(멱)이 같아서 ‘나무 木(목)+찾을 覓(멱)’으로 중국 사신이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후 정상에 사당을 짓고 이태조, 무학대사 등을 모신다하여 '국사당(國師堂)'이라고도 하였다.
순우리말로는 남산을 ‘마뫼’라고 하는데 뱃사람들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파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마[南]+뫼[山]’로 남산(南山)이란 뜻이다.
광복 후 6.25를 전후하여서 월남한 사람들이 남산에 마구 판잣집을 짓고 살아서 남산은 ‘해방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남산을 '남산 대공원(南山大公園)'이라 하게 된 것은 1940년 경 일제가 남산길을 내고 '남산 도로공원'으로 지정하기 시작하던 무렵부터였다.
남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동서로 길게 뻗은 산의 능선이 말 등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남산은 크게 4지구로 나뉜다. 동의 장춘지구, 서로 남대문 시장 쪽의 회현지구, 남쪽 한남동지구, 북의 세종호텔 쪽의 예장동지구가 그것이다.
나는 지금 남대문시장을 지나 힐튼호텔 방향 길로 오르고 있다.

옛날 1960년대였던 나의 대학시절에는 이 길가에는 점쟁이들로 가득했는데 정화작업에 따라 점쟁이들이 미아리 고개 등으로 옮겨 갔다. 그래서인가 점집 하나가 있어 옛날을 돌이켜 보게 한다.
  처음 층계를 오르니 어린이 공원이다. 이 소공원에는 어린이들의  석상이 즐비하였다. 어머니 품에 안긴 평화로운 어린이,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백조를 타고 있는 행복한 어린이 석상, 사랑하는 강아지를 말처럼 올라타고 의기양양해 하는 어린이 등등.
그 옆에는 칼을 뽑아 높이 든 김유신 장군의 기마상이 분단을 살고 있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통일의 꿈을 키워주려는 듯 서인지 서 있다.
그 위 백범 광장(白凡廣場)의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과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동상을 지나니  안중근(安重根) 의사 기념관이 나타난다.

*. 이등박문의 천적 우리 안중근 의사   

몇 년 전 중국 대련(大連)의 여순 감옥에 들렀을 때 안 의사가 갇혔던 감방 앞에서 왜놈들 앞에서 굴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도 민족정기를 빛낸 의사의 얼을 우러러 뵈었는데, 여기서는 그분의 말씀들이 그 기념관 앞 광장의 오석의 돌에 깊이 음각 되어 있어 지금의 우리들에게 나라 사랑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말씀하시고 있다.
 
내가 박문을 쏘아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써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안 의사의 의거의 이유

 

우리들의 소원을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이라도  해보고 올해 안 되면 내년에 해보고, 십년 백년이 걸려도 좋다. 우리 대에 안 되면 아들 또 손자 대까지 가서라도 대한독립을 되찾고야 말 것이다.           -1908년 6월 두만강 전투에서 안 의사의 말씀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이장해다고.
나는 천국에 거기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고.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 의사의 최후의 유언
  이렇게 이곳은 민족정기와 민족혼이 숨쉬는 곳이라서 학생들의 견학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오늘도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사생대회 차 와 있었다. 그 앞에 교육과학연구원이 있고 그 오른쪽에 남산식물원과 동물원이 있고

거기서 조금 내려 간 곳에 소월 시비(素月詩碑)가 있다.
그 시비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시립도서관이고 거기 퇴계 이황(李滉)과 정약용(丁若鏞)의 동상이 서있다. 케이블카에서부터 세종호텔까지의 길이 소파 방정환의 호를 딴 소파길이다.

 나는 다시 올라와 분수대 앞 매점 앞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 분수대 광장은 서울시민의 무료예식장이다. 마이크와 각종 결혼소품이 무상으로(신청 상담 전화 02-753-5576, 2563) 대여된다.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하도 요란하기에 시선을 주었더니 사생대회를 막 끝낸 소녀들이 분수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데 우리들이 어렸을 때 놀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여럿이서 친구 하나씩 들어다가 분수에다가 던져 넣고 있다. 순식간에 분수 속에 울긋불긋한 소녀로 가득 차 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계곡 물소리 같고, 흰 분수에 놀고 있는 15살 내외의 중학교 2학년 여학생들의 물놀이는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물놀이를 하는 것 같다.
물에 흠뻑 젖은 건강한 몸은 속살을 살짝 드러내는데 볼록한 젖가슴에서 퐁퐁 솟아나는 젊음은 막 피어나는 이슬 머금은 꽃봉오리 같다. 나는 부끄러워 이 진귀한 장면을 몰래 카메라로 클로즈업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습을 잘 생긴 남산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심자

살(城)을 따라 멋진 돌을 깎아 만든 층계 길을 오른다. 남산 모든 등산로는 숲을 향한 곳에는 어김없이 철조망이 막혀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한발자국도 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갇혀있는 것 같다. 우리는 미로를 헤매는 짐승 같기도 하고, 일정한 철도 위를 달리는 전차나 기차 같이 정해진 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가 생각해오던 등산 길과는 전혀 다른 길. 그래서 남산을 도시의 섬이라고 하나 보다.
 그러나 이렇게 동식물의 천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기 때문에 남산은 생태 섬으로 태어나 신갈나무, 아카시아나무, 현사시나무, 팥배나무 산벚나무 등의 나라가 되고 남산제비꽃, 고사리류, 단풍취, 억새 기기나리, 맥문동 등 361종의 식물이 무성한 숲의 나라가 되었다. 그뿐인가 조류로도 박새, 멧비둘기, 꿩, 꾀꼬리, 오목눈이 할미새, 등 59종이나 살고 있다는데 어느 누구는 노루도 봤다고 하는 말과 같이 야생동식물의 천국이 되었다.
나는 위에서 동식물의 천적을 인간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나’의 천적은 누구인가. 이런 우리의 질문을 일찍이 조병화 시인은 한 줄의 시로 답해주고 있다.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늙다리 우리들의 천적(天敵)은 누굴까?  우리들의 마누라들인 것 같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옛날에도 서울의 네 산에 입산금지표를 세우고  산지기를 두어 벌목과 채석을 금하였다. 

특히 남산은 조선 조 개국 초부터 금송(禁松) 지구여서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지금은 소나무가 20%밖에 없는 이유는 왜서일까.

서울타워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남산 8각정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산 265m 정상 광장에 오르니 90만평의 초록색 남산 전경이 펼쳐진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ꁔ♫’  애국가에 나오는 소나무는 어디에 있는가. 찾고 또 찾아보니 조그마한 소나무 두 구루가 눈에 들어올 뿐 아예 소나무가 없다.
왜놈들이 유난히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나무를 민족정기 말살 차원에서 뽑아버리고 그들의 국화라는 벚나무와 아까시아를 대신 심었다는 말이 퍼뜩 떠오른다. 당시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일본 국토로 만들려고 기승을 부렸던 것이다.
서울시는 팔도강산을 뒤져서라도 우리의 자랑이 되는 소나무 중에 소나무 한 구루를 심어 놓을 수는 없는가.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 되는 나무이며 우리의 애국가는 영원히 불리는 국가이기에 하는 말이다.

*.옛날의 핸드폰 봉수대

  언제 복원 되었는지 멋진 봉수대(烽燧臺)가 보인다. 옛날에 다섯이나 있었다는 봉수대 중의 하나다. 이렇게 완벽한 봉수대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남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종남산(終南山)이라고도 하는 것은 신의주나 부산 등 전국의 5군데에서 시작한 봉수가 남산에 도착하면 끝이라는 데서 끝날 종(終), 종남산(終南山)이라 하게 된 것이다.
봉수(烽燧)란 ‘봉화 봉(烽)+연기 수(燧)’란 한자와 같이 나라의 급한 사정을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이용하여 중앙이나 또는 변경의 다른 요새에 서로 알리는 동시에 해당 지방의 주민에게는 위급상항에 빨리 대처하게 하기 위해서 실시하던 것으로 이를테면 오늘의 핸드폰과 같은 옛날의 통신 수단이었다.
낮에는 바람이 불어도 똑바로 연기가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 싸리나무 속에 관솔을 넣고 그 위에 이리 똥이나 말똥을 얹어 피웠다. 평상시에는 하루 일정한 시간에 언제나 1번을 올리는 것이고, 적이 출현했을 때는 2번, 적이 접근했을 때는 3번, 국경을 침범했을 때에는 4번, 접전을 하고 있을 때에는 5번의 봉수(烽燧)를 올렸다.
그러면 이를 병조(兵曹)에서 종합하여 매일 새벽에-, 위급한 경우에는 하시든지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여 국왕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정상 광장에 타임캡슐비가 있다. 비는 여기 있지만 캡슐은 필동 한옥마을 바로 위에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이 있다.
서울시가 1994년 11월 29일 서울 정도 600돌을 맞아 중앙일보 후원으로 이 시대의 문물 600점의 문물주머니를 보신각 종 크기로 하여 그곳에 묻어 서울정도 1,000돌이 되는 이 날에 400년 후의 우리의 후손들이 가슴 설레며 끌러 보게 한 캡슐이다. 그 캡슐 광장이 필동에 있다니 오늘은 그리로 내려가야겠다.
국사당 터 표지판을 보니 인왕산 선바위 아래 있는 국사당이 남산에서 옮겨왔다더니 여기가 국사당 터였었구나.

*.서울타워의 아름다운 조망
서울타워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촬영할까 망설이던 중 그 앞에 오석으로 된 타워 기념 표지를 보고 매표소로 향하였다.
서울타워는 한국 최초의 종합 전파 탑으로서 파리의 에펠탑처럼 방송문화 발전과 관광산업 진흥에 기여하기 위하여 최대의 관광전망 시설을 갖추어 1975년 여름에 완공된 높이 479.7m의 탑이다.
타워높이 236.7m에다가 탑 위치의 남산 높이 243.0m를 더한 것으로 해발 479.7m는 모스크타워 537m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전망대다.
내사산(內四山)에서도 가장 높아서 맑은 날이면 인천바다는 물론 두고 온 산하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는 높이다.
탑 속에 들어서니 빙 둘러 가며 서울의 옛 모습의 사진을 전시해 놓아 카메라로  이를 열심히 찍고 있는데 나의 이런 모습에 관심이 유난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들이 있어 . 누굴까 물어 보았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먼 데서 왔지요./ 거기가 어딘 데요?/ …… /북한이디요./ !!!”
하도 반가워서 명함을 주었더니 웬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달려와 무례하게도 나의 명함을 채뜨리듯이 뺏는다. 탈북자 교육을 위해  시내관광을 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서울타워에 올랐다. 작년 서유럽 여행에서 파리의 에펠탑에 올라 저물어 가는 파리의 전망과 센 강을 카메라와 캠코더에 담았더니 오늘은 우리 서울과 우리 한강의 모습을 찍고 있다.
에펠탑에서 보던 것은 지평선으로 끝나는 파리의 모습뿐인데, 서울타워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내사산(內四山)과 외사산(外四山) 산으로 둘려 싸인 아름다운 서울이다. 강산이 아름다운 것은 산과 강 때문이다.  
파리에서 제일 높다는 에펠탑의 높이가 320m요, 우리 서울타워는 479.7m로 서울 성곽 내에서는 제일 높은 곳이다.
크기로 보아도 파리의 센강은  깊이가 겨우 3m의 강이지만 우리의 한강은 깊이는 물론 강폭이 센강의 2배나 되는 큰 강에 센강에 없는 고수부지까지 갖춘 거창한 강이다. 영국 런던의 템스강도, 이집트의 나일강보다도  한강은 더 크고 아름다웠다.
전망대 테라스에는 알기 쉽게 일일이 번호를 붙여가며 서울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었다.

①개성송악산②인왕산③북한산④북악산⑤경복궁⑥청와대⑦정부종합청사⑧롯데호텔⑨한국은행⑩아시아나⑪대한항공
나는 오늘 어린이 같은 마음이 되어 서울타워 부대시설인 지구촌민속박물관, 환상의 나라에서 귀신들에게 가끔 놀라면서, 입체영화도 보면서 우리 손자 손녀들에게 미안한 하루를 혼자 보냈다.
  남산대공원은 서울의 명물이라 찾아오는 외국관광객이 많았다.
중국에서 온 팀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그 여가이드가 관광객의 카메라를 수북이 쌓아 놓고, 카메라의 앵글을 낮추려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은 인간의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이  모습을 보며 금년 봄에 다녀온 동유럽여행이 아득한 옛날인양 부러운 눈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