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固城) 거류산(巨流山, 570m)
*. 역사와 문화의 고장 고성
노천명 시인이 계절의 여왕이라 노래하던 5월에 나의 문우(文友)며 갑장인 김홍래 시인 따라 그분의 고향인 경남 고성(固城)에 왔다.
때맞추어 고성에서는 '고성공룡(固城恐龍)의 나라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시조시인이신 김성규 고성신문사 사장님이 차편에 안내까지 하여 주어 이틀 동안 호강을 하고 다녔다. 소가야국(小伽倻國)의 수도였다는 전설의 고향 고성(固城)은 1억 2천 만 년 전에는 이 땅의 주인이 공룡이요 공룡의 나라였다. 임란 때 이순신의 3대 대첩지의 하나 고성(固城) 당황포. 산과 들과 남해 바다가 어울린 곳에 이곳을 지키며 살고 있는 아아, 소박한 5만여 고성(固城)사람들.
고성은 동서남북으로 마산, 사천, 통영 등을 연접하고 있는 한반도 최남단 경남 끝자락에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공룡의 나라 고성(固城),
소가야국(小伽倻國) 수도 고성.
승전고 울리었던
당화포 충무공 대첩지
고성선 자랑하지 말라더라.
역사 자랑,
인물 자랑.
그래 그런가 이 작은 군에 살아있는 장관 출신만도 현재 8명이나 된다고 한다.
한 고장에서 역사와 문화를 고이 간직한 곳이 대개는 산(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이튿날 아침 일찍 고성의 진산(鎭山)이라는 거류산(巨流山)을 나 홀로 찾아 나섰다.
*.거류산(巨流山) 전설
예로부터 거류산(巨流山, 570m)의 지명 유래담으로 ‘방정맞은 여인 때문에 산이 서 버린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한 아낙네 밥 짓다가 무심히 밖을 보니
걸어가는 큰 산 보고 놀라 소리치며
부자께
휘두르는 호겁에
멈춰 섰다는 거류산.
-거류산(巨流山)
그래서 클 巨(거)의 ‘거’요 뫼 산(山)의 ‘산’인데 流(류)는 어떻게 풀이해야 될까?
‘걷다’라는 동사가 활용된 ‘걸어 산’이 변하였다고 견강부회(牽强附會)식으로 생각할 수고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거류산의 클 ‘巨’(거)자가 뜻을 잃게 된다.
그래서 옥편을 찾아보니 ‘流’(류)라는 한자는 ‘流는 走也 또는 過也’로도 ‘달아나다’ 또는 ‘지나간다’로 풀이 되기도 하니 이를 따라 풀이함이 더 좋을 듯하다.
위의 한 아낙네는 할머니로도 처녀로도 전하여 오고, 그러한 아낙네가 걸어가는 거류산을 향하여 산을 보고 ‘게 섰거라.’ 했다고 하지만 이치적으로 따져 보면 이름 없는 아낙네가 아무리 놀랐다 하여도 산을 향하여 ‘게 섰거라.’ 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과장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 산이 여인과의 인연은 멀리서 본 이 산의 모습이 한 여인이 하늘을 향하여 누워있는 형상과도 연관된다.
우측에서부터 이 여인의 이마와 코와 턱이 우아한 목으로 하여 상체로 이어지는 모습이 선명하여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의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을 생각하게 한다.
미국을 이끌어갈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인물을 기다리던 어둡고 암울했던 시절 그 고장 출신의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었다는 소설이다.
저 여인의 모습을 닮아서인가. 고성 사람들은 성품이 착하고 부드럽다 한다.
*. 이 고장 출신 큰 바위 얼굴 엄홍길 등산인
저 거류산을 닮은 수많은 위인들이 이 고장을 빛내왔다. 그 중에 하나가 등산인 엄홍길이다.
등산하여 오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8,840m의 에베레스트(Everest) 산은 히말라야(Himalaya)에 있다. 그 히말라야에는 8,000m급 봉우리 16좌가 있다.
그 중 14좌를 이 고장 출신의 우리의 엄홍길 등산가가 14번의 실패를 딛고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최초로, 인류 역사상에서는 여덟 번째로 모두 오른 쾌거를 한 것이다.
200km가 넘는 제트 기류와, 자칫하면 설맹(雪盲)이 되기 쉬운 강한 자외선, 부족한 산소 그리고 죽음과 싸워 우리의 자랑스러운 고성 출신 엄홍길이 그 기적을 이룩한 것이다.
그 동안 함께 하던 동료 대원의 실종과 설파의 죽음, 동상으로 오른쪽 엄지발가락 한 마디와 두 번째 발가락을 잘라 내야 했던 목숨을 건 도전에서 성공한 것이다.
히말라야(Himalaya)라는 말은 인도 산크리어로 말하면 ‘히마(Hima)’는 ‘눈’, ‘알라랴(Alayas)는 ’곳‘이란 뜻으로 히말라야(Himalaya)는 만년설이라는 말로 세계의 지붕이 되는 곳을 뜻한다.
당시 이 자랑스러운 쾌거를 축하하는 청와대에서 당시의 김대중 대통령이 엄홍길 산꾼에게 소원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 때 대답이 고향 고성에 등산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그래서 나는 거류산의 등반을 지금은 철근 공사가 한창이라는 거류면 송산리의 엄홍길전시관서부터 오르기로 했다.
그 곳은 달치 고개에 있었다. ‘달’이란 말은 그 고개 길 모양이 달처럼 둥글게 오르는 길이라서 ‘달(月)’이요, ‘치’란 고개 ‘치(峙)’ 자다.
여기 말고 엄홍길 박물관은 서울 망월사역 근처 도봉산에도 있다.
3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 도봉산 근처 원도봉으로 이사를 해서 그의 부모가 등산객을 상대로 먹거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산과 인연을 맺어 오늘의 엄홍길이 되었기에 그것과 인연한 시설물이다. 그만큼 엉홍길은 국내외로 유명 인사로 성공하여 이 고장을 빛낸 사람이다.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을 '성공한 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기억해 줄 때다. 대개 TV에 자주 등장하는 부류가 이에 속한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제일인 시대는 거(去)하고 TV에 자주 등장할 수 있는 운동선수, 가수, 아나운서 등의 시대가 내(來)한 것이다. 그들은 서민이 몇 년을 걸쳐 벌 수 있는 돈을 한달에 버는 행운의 사람으로 그래서 학벌이나 인격과는 별로 무관한 서민들의 우상이기 때문이다.
엄홍길 전시관과 등산학교는 대지 5,300평에 400평의 건물이 2005년 말까지 완공될 모양이다.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울린 고장 고성
거류산 오르는 등반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송산리 엄홍길등산학교에서 오르거나 그 반대쪽 당동에서 오르는 길이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등산 기점이 아닌지 등산로 입구가 불분명하여 서성이게 한다. 뒤쪽으로 큰 산 저것이 거류산이 아닌가 헷갈려서다.
이른 새벽인데 어디서인가 나무 자르는 전기 톱 소리가 바람결이 들려온다. 그 소리를 따라 오르다 보니 비로소 이정표가 있다. 등산로 좌우로 능선까지 계속 벌목이 쌓여 있었다. 그 통나무로 층계를 만들고 있는 인부들의 말을 들으니 앞산이 통영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 근처에서는 제일 높다는 벽방산(碧芳山, 650.3m)이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거류산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명산이어서 이곳에 무덤을 쓰면 자손 중에 큰 인물이 난다는 말이 있어서인가, 거류산은 초입부터 무덤이 많았다.
그러나 묘를 함부로 쓰면 흉년이 든다 해서 흉년이 드는 해에는 거류면 사람들은 모여서 산에 올라 그런 묘를 파 버리곤 했다. ‘묘 판다.’ 하는 말은 그래서 생긴 말이란다.
육산인 거류산은 어제 비가 왔는가 등산로가 한결 같이 물기를 머금은 검은 색으로 상쾌한 길인데 뒤 돌아보니 띠를 두른 것 같은 산의 논밭을 넘어 고성평야가 있고 그 벌판 넘어 바다가 있다. 그 바다 속에는 점점이 섬이 있고 그 사이 사이 조그만 배가 하얀 파도를 긋고 있다.
산과 벌판과 바다와 섬이 어울린 곳에 1억 2천년 전의 공룡은 그 노닐던 발자국을 남겼고, 충무공 이순신은 저 당포 바다에서 왜적 57척을 쳐부수는 승전고를 울렸다. 이렇게 수많은 세월을 거쳐 고성인은 고성의 역사를 만들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 거류산(巨流山) 정상 가는 길
거류산 정상 가는 길은 가족을 동반하여 오를 수도 있는 부드러운 완만한 길이었다.
좀 어려운 곳에는 어김없이 쇠사다리가 나타나더니 두 번째 쇠사다리에 이르러 우측 산기슭을 보니 산을 오르는 꼬불꼬불한 길 끝에 절 하나가 신록에 묻혀 있다.
정상을 다녀서 고성의 시조시인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의사(藏義寺)였다.
세 번째 쇠다리가 나타나더니 중국의 장가계에서 보던 ‘천하제일교’보다는 작지만 깊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쇠다리를 건넌다.
다섯 번째 가파른 쇠다리를 오르니 여기가 휴게소로 이정표가 있다. 전에는 이곳에 정자가 있었다는데 무너져 버린 모양이다.
엄홍길 등산학교 이정표에는 정상까지 3.0km라더니 여기 이정표로는 4.3km라니 어떤 것을 믿으란 말인가. 누구나 잘못을 범할 수 있지만 그 잘못을 알면 즉시 고칠 수 있는 자가 현명한 사람이라니 고쳐주었으면 한다.
휴게소를 지나니 비로소 거류산 정상이 까마득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거류산 등산 내내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런 나를 위해 누군가가 예쁜 표어를 나무에 써 달아놓았다.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을 때의 당신이 당신의 참다운 모습니다.” 쓴 이가 누군가 하고 보니 경남 선거관리위원회다.
희랍 신화에 이런 말이 있다. 제우스가 인간을 만들고 나니 모두가 똑 같았다.
그래서 각기에게 개성을 주기 위해서 거짓말 하는 분말을 뿌려 주고 나니 1/3이나 남았다. 그것을 나머지 한 사람에게 다 뿌려주었더니 그가 누군가 정치가였다.
언젠가부터 ilman의 행복이라 하여 3가지를 말하곤 했다.
담배를 끊은 것, 산을 좋아 하는 것, 정치가가 되지 않은 것.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세를 갖은 대통령의 말년의 추한 모습들이 그러한 생각을 굳게 하였다.
등산의 오름길에서는 별로 사고가 드물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추락하는 모든 사고는 하산 길에서 일어난다.
우리들의 대통령들은 오름길에서는 아름답다가도 하산 길에서는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어버리는 불행한 분들이기에 하는 말이다.
약수터가 좌측 3m에 있다는 봉을 내려가다 안부로부터 정상 오름길에 만난 이정표를 보니 정상이 0.4km가 남았다.
그런데 지나온 휴게소까지는 2.2km이다. 분명 휴게소에서 본 이정표에는 정상까지 1.8km이었는데 여기서도 잘못된 것 같다.
*. 거류산성(巨流山城)에서
정상 오름길 정상부의 서쪽 경사면에 자연석이 길게 쌓여 있는 곳이 바로 거류산성(巨流山城)이다.
둘레가 1.4km 정도인 모양인데 남아있는 600m의 성벽으로 보아 성벽 높이가 3m, 넓이가 4m가 되는 산성이다.
남해 바다 쪽을 향하여 쌓은 성으로 그 안으로 남서에 각각 성문을 두었는데 신라나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쌓은 가야시대의 산성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상을 보고 있노라면 동화 속에 나오는 성처럼 자연이 쌓아 놓은 성이다. 그 자연에 모자라는 높이를 돌로 보강한 것이 거류산성이었다.
정상을 향하여 좌측에 거북 모양의 바위 하나가 바위 위에 얹혀 있다. 저 바위를 흔들바위 라 하겠지-.
이어 기암괴석이 보이는데 그 중에 수백 년 묵음직한 소나무 한 구루가 바위 틈새를 비집고 나와 푸른 하늘을 향하여 청청하게 서 있다. 중국 황산(黃山)에서 보던 돌을 부수고 나왔다는 파석송(破石松)이 거류산에도 있었구나 하였다.
돌아보니 아까보다 더 남해 바다를 향한 시야는 넓어졌는데 여기서 당황포를 보니 호수 같이 육지에 둘려 싸인 것이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이다. 그렇구나, 그대로 두면 뉴질랜드 지도요, 뒤집어 놓으면 한반도 지도와 꼭 같다.
저 당황포에는 한 의기(義妓)의 슬기로 임진왜란 의 대첩을 이룩한 고성의 관기(官妓) '월이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빛나고 있다.
-임란의 침략을 위해 지도를 만들러 온 왜놈 첩자의 지도에 없는 통로를 그려 넣어 충무공의 대승을 이룩하게 한 이야기다.
임란 직전 의기 월이가 수상한 놈 술 먹여
잠들게 하고 짐 풀어 살펴보니 왜놈 첩자였다.
그 지도
변조한 덕으로
당황포 전승하였다네.
*.거류산(巨流山) 정상에서
드디어 해발570.5m의 거류산 정상에 섰다.
알려진 산이 아니어서인가. 이른 아침이라선가 아니면 인구 5만의 작은 고성의 산이라서 그런가. 등ㅇ산 내내 거류산에는 나 홀로였다.
적지 않은 나의 산행에 이렇게 처음부터 정상까지 혼자이기는 처음이다. 삽상한 바람이 마음까지 시원하게 씻어준다.
정상석에는 ‘고성군민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라는 표석이 힘차게 서있다.
그런데 멋진 푸른색의 산불 감시초소 옆에 깊게 패인 구덩이는 무엇일까?
우물이라기에는 그 바닥이 흙뿐이요, 앞에서 말한 ‘묘 파기’의 일환이 아닌가 해서 약간의 으스스한 기분마저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정상 석에 의지하여 바다와 산과 고성의 곳곳을 카메라 눈을 열고 파노라마로 담고 있다.
집에 가서 나침반을 놓고 거제도와 사량도와 남해 등을 찾아보는 즐거운 한 때를 가져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당포만으로 둘려 싸인 거류산은 고성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호사가들은 거류산을 고성의 마터호른(Materhorn)이라고도 불리운다. 구름 속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빙하로 깎기운 스위스의 삼각형 모양의 마터호른(Materhorn, 4,477m)을 닮았다 해서 생긴 말이다.
이름 모를 찬란한 색깔의 곤충 한쌍이 춘정을 나누고 있는 정상 앞에서 다시 찾아올 수 없을 정상을 기념하기 위해서 독사진을 찍고 싶었다.
인생칠십고래백(人生七十古來白)이라고 염색한 머리를 풀어버리고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과 함께 하는 나의 모습을.
*. 장의사(藏義寺)에서
사진출처: 산과산 사랑하는 사람
욕심 같아서는 거류산 종주 길이라고 할 수 있는 당동으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먼 곳에서 온 이 사람을 기다려 주는 고성 시조시인들이 있어서 서둘러
장의사(藏義寺)로 가야 한다.
장의사는 정상에서 2.6km의 거리에 있는 휴게소의 갈림길로 내려가면 된다.
문득 부는 바람에 송홧가루가 회오리바람 같이, 하얀 연기 뽀얗게 흩어지는 산길에는 여기는 남쪽 나라의 늦게 핀 진달래가 몇 군데서 지고 있었고 하얀 여름 꽃이 피고 있었다.
처음 가는 길은 언제나 근심이 앞서는 법이다.
그것이 시간 약속이 정해져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였다.
보통의 경우는 리본을 따라 간다. 그러다가 갈림 길을 만나 리본이 양쪽에 있을 때는 리본이 많은 쪽으로 가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은 뿌리칠 수가 없었다.
휴게소에서 장의사 갈림길을 들어서니 지금까지의 길보다 좁은 길이 계속된다.
이런 초행길에 목탁소리라도 들리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데 산죽길이 나타나더니 약수터가 나타난다. 인가가 가까워 진 것이다.
드디어 수런수런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리는데 이건 무언가. 계곡에 수없는 돌탑이 나탄다.
부도인가 했더니 부도는 아니고, 탑인가 했더니 탑도 아닌데, 분명 인위적인 힘으로 돌에 돌을 탑처럼 위로 갈수록 점점 작은 돌을 얹어 놓은 그러한 탑이 계속된다.
꽃들이 아름다운 것은 꽃밭에 모여 살 때이듯이 이런 탑이 계속되는 것이 마이산 같이 몇 백 기나 된다.
이것이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시조 보급을 위해 조성하고 있는 고성 시조시인들의 시조공원이었다.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거창한 1차 공사를 마친 것이다. 이 탑에 시조를 새겨 고성의 역사를 새로 쓰려나 보더 하는 생각이 나도 동참하고 싶게 한다.
이 장의사 주변 삼천 평이 넘는 다전(茶田)에는 죽로다우회(竹露茶友會) 회원들이 찻잎을 따고 있어 함께 정성으로 얽힌 절밥을 먹는데 어찌 나그네 그냥 갈 수 있는가. 시 한 수를 드린다.
* 죽로다우회 회원께
죽림(竹林)과 송림(松林) 속에
죽로(竹露)와 송화(松花) 받아
다향(茶香)으로 베푼 사랑, 화두(話頭)로 두드리고
다심(茶心)에
고이 담아서
중생(衆生)을 깨웁니다.
장의사(藏義寺)는 거류산 중턱에 있는 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雙磎寺)의 말사다.
신라 선덕여왕 때인 서기 632년에 원효대사가 절터를 찾아 전국을 순방하다가 거류산에 와서 명당인 이곳에 창건한 고찰이 장의사다.
그러나 임란으로 전소되었고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보광전, 천불전, 사성각, 종각과 요사채 등이 신도들의 불심을 모아 지어졌다.
식 사 후에는 주지 스님의 승방에서나와 갑장인 벽송(碧松) 김홍래 시인의 차 이야기를 들으며 차를 마시면서, 고성신문사 김성규 사장님이 정성껏 뽑아주신 고성 자료를 촬영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지난 3월에는 중국 항저우(杭州)의 용정차 밭에 가서 차를 마시면서 차 마시는 법을 들었더니 작년과 금년은 나에게는 다복(茶福)이 넘치는 해인가 보다.
(2005.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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