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冠岳山) 산행기
지난주에는 왕복만도 5시간이나 되는 관악산을 3번 다녀왔다.
처음에는 자운암 능선으로 올라 사당동으로 내려왔고, 두 번째는 관악역에서 안양유원지 능선으로 해서 삼맘사(三幕寺)를 지나 삼성산으로 서울대학교 쪽 호수공원으로 하산하였다.
세 번째는 과천 종합청사 뒤로 해서 6봉을 왼쪽으로 두고 오르는 능선으로 8봉 능선을 타고 안양유원지로 내려왔다.
한 번으로 대강은 둘러볼 수 있는 다른 산과 달리, 관악산은 갈 때마다 조금만 길을 벗어나도 새 코스로 새로운 세계를 펼쳐주고 있었다. 어느 산 꾼의 글을 보면 그 코스를 14 가지로 나눌 정도였다.
*. 왜 관악산이라 하였을까
관악산의 ‘冠’(관)은 ‘갓 관(冠)’으로 강북 멀리서 보면 산의 형상이 갓 모습 같다 하여 옛 이름은 ‘갓뫼’였다. ‘冠’(관)을 ‘우두머리 관’(爲中之首)으로 풀이하면 주위의 산 중에서는 해발 629m로 가장 높은 산이라서 관악(冠岳)이라 이름 한 것이다.
이 산은 개골산(皆骨山)이라고 하는 금강산처럼 바위가 많은 암산이어서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리었고, 그 서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하였다.
관악산(629m)은 계곡이 얕고 돌이 많다 하여 남성산 백호(白虎)라 하고, 마주 보고 있는 청계산(618m)은 관악보다 높이는 낮지만 골이 더 깊다 하여 여성산 청룡(靑龍)에 해당되는 산이라 한다.
*. 풍수지리설에서의 관악
우리나라에서 풍수사상(風水思想)이 가장 활발했던 때가 조선 개국 초 수도(首都) 서울을정할 때였다.
그때 새 서울로 거론된 후보지로는 개경(開城), 계룡(鷄龍), 모악(신촌․ 서강 일대)과 한양(漢陽)이었다.
그중 한양(클 ‘漢’+水之北 ‘陽’)은 동서남북의 방위 신(方位神)으로 수호신(守護神)인 사신도(四神圖)에 해당하는 좌청룡에 낙산(洛山), 우백호에 인왕(仁旺), 북현무는 주산인 북악(北岳)인데, 남주작으로는 안산(案山)이 남산이라면 조산(祖山)은 관악산(冠岳山)이다.
그 남산과 관악산 사이를 외수(外水)인 한강(漢江)이 명당 한양을 감싸 안고 서쪽으로 흐르고, 내수(內水)인 청계천(淸溪川)은 한양 중심을 뚫고 한강과는 반대인 동쪽으로 흘러서 내외 수류 역세(內外水流逆勢)의 형국이라서 아무리 큰비가 온다 하여도 도성 안은 수해에서 안전할 수 있는 한양은 명당 중에도 명당(明堂)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눈으로 길지(吉地)를 파악하려는 풍수지리의 형국론(形局論)에서 보면 관악산은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으로 옛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불인 화산(火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피하기 위해서 주산(主山)을 인왕산으로 하여 경복궁 문(지금의 광화문)을 동쪽으로 내야 한다는 무학대사의 주장과, 한강이 불기를 막아 주니 괜찮다는 정도전의 의견이 있었으나 당시의 세도가인 정도전의 의견을 따랐다.
풍수(風水)란 음양(陰陽)에 의해 좋은 것을 좇고 흉한 것을 피하려는 추길피흉(追吉避凶)이 목적이다.
이 풍수(風水)에 깊이 심취해 있던 당시 위정자들은 바라보기조차 꺼리던 두려운 관악의 화환(火患)을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비방(秘方)을 해놓았다.
경복궁 정문(光化門) 앞 양쪽에 바다의 신이라는 해태를 만들어 놓기도 하고, 경복궁과 일직선상에 남대문을 세워 궁궐에서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하거나, 다른 문의 현판이 가로인데 반해 남대문의 숭례문(崇禮門)란 액자를 세로 세워서 화산(火山)인 관악의 불기운을 꺾어보려고 하였다. '崇'(숭)은 상형문자로서 그 모양이 활활 타는 불꽃을 연상하게 하는 한자이고, '禮('례)는 오행에서는 남(南)과 불을 뜻하는 글자로 관악의 불기운을 제압하려는 뜻이었다.
옛사람들이 이렇듯 화재를 두려워하였던 것은 당시에는 지금처럼 성냥이나 라이터 등으로 우리 생활에 절대 필요한 불씨를 그때그때 사용할 수 없던 시절이라서, 집집마다 불씨를 항상 꺼뜨리지 않고 항상 보관해오던 무렵이라서 화재가 잦았던 때문이었다.
옛날에 양반 촌이라는 한양 종각(鐘閣) 이북의 북촌(北村)에서는 관악과 마주 보는 집에서 자란 딸과는 혼인을 거절할 지경이었고, 그런 집의 며느리는 그렇지 않은 친정집에 가서 자식을 낳는 풍습까지 있었다.
금수목화토(金水木火土)의 오행(五行)으로 보면 남방은 ‘화(火)’이지만 남산과 달리 옛사람들이 관악산을 유독 이토록 두려운 눈으로 보게 된 것은 관악 정상 능선의 바위 모습 때문이었다.
보라, 연주대에서 서쪽으로 삼성산에 이르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바위들을.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면 관악산 모든 길은 연주대로 통한다.
-왕관바위
연주대로 오르는 길은 사당동, 과천과 안양유원지 등인데 어느 코스나 능선은 암릉이었다. 그 바위들은 지천으로 많아서 보는 각도에 따라 각각의 물형(物形)을 나타내는데 언제부터인가 호사가들이 바위마다 이름을 매겨 놓은 것이 100여 가지가 넘었다.
어느 네티즌은 공룡바위, 거북바위, 악어바위, 미소바위, 팬터 곰바위, 횃불 바위, 사자바위, 범바위 남근바위, 여근 바위 등 90여 개 이상의 사진을 찍어 홈피의 겔럴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칼바위
이상하게도 관악산과 삼성산은 이정표가 거의 없고 리본도 거의 없어서 길을 잃고 엉뚱한 곳을 가곤했다.
과천에서 6봉 길을 잘못 들어 6봉을 바라보고 오르는 동쪽 능선 길을 힘들여 올라오다 보니 건너편 바위 절벽 위 바위에서 부부가 점심 식사를 정답게 하는 모습을 보니 흘러간 젊은 시절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내가 사는 일산 호수공원에 중국에서 기증받아온 홀아비가 된 단정학 한 마리를 놓고 이런 시정(詩情)을 토해낸 적이 있다.
십장생(十長生) 학(鶴) 한 마리
짝을 잃고 혼자 산다.
청아한 목소리로 때때로 울부짖으며-.
우리 집
여보, 당신도
저리 살다 가겠지-.
-일산 호수공원 ‘홀아비 단정학’
드디어 정상의 능선에 올라 한강을 굽어보며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자리를 찾고 있는데, 과천을 향한 절벽 바위에 한 그루 소나무가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고 있는 자리가 있다. 신선이 있다면 바둑이라도 한 판 두고 노닐었을 정도의 환상적인 자리다.
거기서 점심 대신 준비해온 감자와 함께 정상주(頂上酒) 한 잔을 기울이면서, 7월 중순이면 매미도 울 때가 되었는데- 하고 있는데 저 왼쪽 절벽 아래에 매미 한 마리가 이제 막 허물을 벗고 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드디어 나도 관악 바위에 이름 하나 지어 줄 숨은바위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맴맴 메에- 우는 ‘매미 바위’를.
*. 연주대(戀主峰) 전설
연주대 정상은 관악산 기상레이더 관측소인가. 아니면 군부대인가.
우리가 보통 정상이라고 하는 곳은 오르기도 경사진 버거운 저 암반 위였다. 이 바위를 차일암(遮日岩)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세종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이 여름에 차일을 치고 이곳에 앉아 북쪽 대궐 경복궁을 바라보았다 해서 생긴 말이다.
북으로 서울이, 남쪽에는 수원이, 그 너머 멀리 양주와 광주와 연한 산들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되고, 해질 무렵이 되면 서
사진 출처: '한국의 산하' 사이트
낙조가 찬란히 빛나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다는 곳이 바로 이 연주대였다.
자고(自古)로 명승지를 좋아하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시인 묵객(詩人墨客)들이라. 서울대학교 쪽의 호수공원에 동상과 정자로 있는 자하 신위(申緯) 선생은 과천 쪽의 자하동천(紫霞洞天)에 살면서 시· 서· 화(詩書花)로 관악산을 노래하면서 살았고,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를 쓴 정조 때 영의정 채제공(당시 천주교 박해에 맞서 그 신봉을 옹호를 주장하던 분)이 67세에 올라, 83세에 다시 오르기를 약속했다는데, 나는 지금부터라도 술을 작작 먹고 90세 넘게 살아서 다시 올라 호연지기를 말하여 볼까 보다.
사당동 코스로 해서 오르기 전에 들렸던 낙성대의 감강찬 장군의 전설이 어린 곳이 바로 이 관악이다.
벼락 방망이를 없애려고 급히 산을 오르는데 자꾸 칡뿌리 덩굴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 그때 강 장군이 칡덩굴을 뽑아버려서 그런가 내 보기에도 이 산에는 칡이 거의 없다.
이 태조가 경복궁을 지으면서 화환(火患)을 막기 위하여 연주봉(戀主峰)에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 단지를 묻어 두었다거나 연주, 원각사를 지어서 불에 대처하기도 했다는 곳이 이 근처였다.
정상 바위에 우물을 파고 그 우물에 구리로 용을 조각하여 화환(火患)에 대처하였다는 곳은 출입금지 구역인 저 군부대 내에 있는 모양이다.
관악산,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이 연주대의 모습이다. 절벽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지은 아슬아슬한 작은 암자 그 응진전(應眞殿)을 향하는 길에 연주대 안내 소개가 다음과 같다.
-관악산의 기암절벽 위에 석축을 쌓아 터를 마련하고 지은 이 암자는, 원래 신라의 승려 의상대사가 문무앙 17년(677)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관악사를 건립할 때 함께 건립한 것으로 의상대(義湘臺)라 불렀다고 한다.
관악사와 의상대는 연주암과 연주대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내력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조선 개국 후 고려에 대한 연민을 간직한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개성을 바라보며 고려의 충신․열사와 망해버린 왕조를 연모했다고 하여 연주대(戀主峰)라 불렀다는 이야기고, 또 하나는 조선 태종의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과 둘째 왕자인 효령대군이 왕위 계승에서 멀어진 뒤 방랑하다가 이곳에 올라 왕위에 대한 미련과 동경에 심정을 담아 왕궁을 바라보았다 하여 연주대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불심을 절로 일으키게 하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연주대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무성한 나뭇가지를 피하여 더 좋은 포지션을 찾다가 그만 연주대가 보이지 않는 연주암(戀主庵)에 오고 말았다. 그 멋진 모습 찍으러 나뭇잎 지고 눈 속에 묻친 연주대 보러 다시 또 와야겠다.
-연주대는 신라 의상대사가 처음에는 관악사(冠岳寺)로 창건하였는데 이성계의 처남 강득룡이 연주대라 이름을 바꿨다는 암자다. 고려 충신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이곳에서 송도를 바라보며 고려 왕조를 연모하며 통곡하였기 때문에 그리울 '戀'(연) 임금 '主'(주) 연주사(戀主寺)라 했다는 것이다.
그 앞의 높이 4m의 연주암 3층 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104호)은 왕위를 잊지 못했다는 세종의 둘째 왕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세웠다는 탑이다. 그 아래에 연주암이 원래 있었던 자리인 관악 사지(冠岳寺祉)가 부도 하나 세워두고 커다란 공양주가 나타나기를 쓸쓸히 기다리고 서 있었다.
관악산 산꾼들이 말하는 관악산의 가장 어려운 길에는 두 코스가 있다.
서울공대에서 오르는 자운암 코스와 8봉 코스다. 자운암 코스는 처음 길에 갔으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며칠 전 삼막사를 거쳐 삼성산(三聖山)을 다녀오면서 시간이 늦어 생략했던 8봉을 가야겠다.
그러나 첫째 봉을 오르면서 나는 곧 후회하였다. 젊어서도 두려워하여 암벽을 만나면 우회하던 길을 이 나이에 오를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뒤 따라오는 이가 여자라 수탉 같은 오기로 무릎에 피가 맺히도록 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떨렸다. 그것이 하도 두려워. 그다음부터는 되도록 봉을 타지 않고 우회로를 택하다가 마지막 끝 봉에 가서는 또 한 번 오기를 내었다.
금수강산 우리나라에는 좋은 산이 얼마나 많은데 내 집에서 먼 이 산을 또 오랴해서, 끝 봉에 가서는 무리를 하여 올랐으나 고진감래(苦盡甘來)라서인가 생각보다 험하진 않았다.
그 봉은 재미있게도 사람 몸 하나가 겨우 빠져나오기 힘든 구멍이 있었다. 등에다는 배낭을 지고 앞에다가는 몇 달 전에 거금을 들여 산 디카 카메라 백을 메고 있어서 거기에 온갖 신경을 다 써 가며 겨우 빠져나오는데 바위에 긁히는 소리 요란하다.
‘후유-.’ 모든 어려운 고비를 지내고 나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제는 서울을 둘러싼 내사산(內四山)과 외사산(外四山)의 등정을 모두 마쳤구나 하는 행복이 물밀듯이 가슴속으로 들어온다. 먹을 물도 다 떨어졌는데 금상첨화(錦上添花)라, 바로 아래 계곡에서는 시원한 물소리가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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