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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진악산(進樂山, 732.3m) 산행기

ilman 2007. 2. 11. 10:42

  충남 금산(金山)의 진산이다.진락산(進樂山)으로 가고 있다. 

진악산은 충남에서는 서대산 903.7m, 대둔산 877.7m, 계룡산 845.1m 다음으로 충남에서 네 번째로 높다지만 서울의 도봉산(740m) 정도 높이의 732.3m의 산이다.
 일산신도시 한뫼산악회 2002년 세모 등반을 따라가는 길이다.

산악회가 비영리적인 친목 모임으로 저렴한데다가 평일에 떠나는 것이라서 함께 가는 이가 60대 이후의 노인들이 많기 때문에 종주보다는 구간 등반이나 하는 것이지만, 동네에서 떠나서 동네로 돌아와 주는 맛에 오늘도 즐겨 따라나선 것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도 있지 않던가. 
 이 산을 종주하려면 표고 200m의 계진리 회관에서 출발하여 시골 농가집 같은 '서공암' 암자를 지나 '빈대바위'를 보며 진악산으로 올라 우리가 오르고 있는 '보석사(寶石寺)'로 내려오는 것이다. '

'빈대바위'란 진악산 우측에 있는 바위가 빈대가 붙어있는 모양과 흡사하다 해서 생긴 이름이다. 빈대가 사라진 오늘날에 사는 젊은이에게는 생소한 말일 께다.
우리는 그 반대편인 성곡리 진익신 뒤편 석동초등학교 쪽에서 보석사(寶石寺)를 향하여 올라가고 있다.

 단청을 하지 않아서인지 추레하게 서있는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낙옆을 밟고 경내 들어서니 '의병 승장비'가 제일 먼저 우리를 맞는다.
이 승장비는 일찍이 승장(僧杖)으로 익힌 무예를 따를 자가 없더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500명을 규합하여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금산 벌에서 왜장 고바야까와 결전하다가 조헌과 700 의사와 더불어 장렬히 전사한 의병 승장 영규대사(호:기호)를 기리는 각이다.
이 비는 일제 말에 왜놈이 자획을 뭉개어 땅속에 묻었던 것을 해방 후 복원한 것이다.

  아름드리 전나무가 400여 m 이어진 길을 지나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높이 40m에 둘레만도 10.4m나 되는
1천년 이상 묵은 은행나무였다. 천연기념물 제30호라는 용문사 은행나무 다음으로 우리 나라에서 큰 은행나무로 천연기념물 365호로 지정된 나무다.
 신라 때 지었다는 이 절은 조구대사가 여섯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서로 붙어 저렇게 큰 하나의 나무로 자랐다 한다. 8 15 해방 때와 6 25 사변 때 이 나무는 크게 울어 경사와 재난을 알렸다 하여 이곳 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수(守護樹)로 삼고 사는 나무다.

그 앞에 계곡을 가로 질러 송판울 깔아놓은 초라하지만 운치 있는 다리를 넘어 통나무 층계를 올라선 곳이 보석사(寶石寺)다. 임란 때 불타 버리고 신축된 사찰이었다.
 보석사(寶石寺)는 신라 헌강왕 때 조구대사가 지었다는 절이다. 이 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구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31본사 중에서도 중요한 사찰 중의 하나다.
 절 뒤 산 중턱에서 금(金)을 캐어 불상을 주조하였다해서 보석사(寶石寺)라 이름하였다는 천년고찰이다.
임란 무렵 이 절에서 영규대사가 도를 닦았다 해서 경내에 의선각(毅禪閣)이 있고 거기에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의선(毅禪)'이란 그 충의를 기리기 위해 나라님께서 내리신 이름이다.
  한국의 불교는 산악신앙(山岳信仰)과 관계가 깊어 산의 가장 아름다운 위치에 아담한 절이 있고, 절은 바람소리, 목탁소리, 풍경소리, 종소리와 어울려 웬만큼 큰산이면 어디서나 한국적 자연을 열고 있다.
거기에다 그 고장 관공서에서는 고장 사랑으로 하여 그 주위를 아름답게 꾸미면서 고향 발전을 위하여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진악산 오르는 길도 그러하였다. 등산로 저편에는 계곡 따라 삼림욕장을 멋있게 꾸며 놓았고 그 쉼터에는 한번 길다랗게 누워 보고 싶은 의자로 등산객을 유혹하고 있다. 초가집 지붕 모양의 표지판에는 한국인이 즐겨 읊조리는 명시(名詩)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거기에다 삼림욕장(森林浴場)에는 자연학습원을 두어 '송사리는 물을 왜 거슬러 헤엄칠까요?', '서산에 지는 해는 왜 붉게 보일까요?', '단풍은 왜 드나?', '새는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을까?' 등등이 무심히 지나치며 살던 지혜를 설명해 주고 있다.

 영천암(靈泉庵)의 그 유명하다는 영천약수는, 산을 오르는 길에 자연히 만나게 되는 곳이 있지 않고, 찾아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듬성듬성 까치 밥이 매달린 감나무 사이로 보이는 축대 위의 일자로 보이는 암자는 멀찍이서 사진에 담고, 앞서간 일행을 따라 등산길로 서둘러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서기 886년에 창건하였다는 목조 고옥(古屋)이라는데-, 영천암 뒤에는 굴속에서 흐르는 영천약수가 있다는데-.
 계곡을 벗어나자 힘든 오름 길은 계속 되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길은 너덜겅으로 퍽퍽한데, 모처럼 만나는 널찍한 공터에는 이름 모를 무덤들이 길 가운데에서 을씨년스럽게도 길을 막는다.

 다음 목표는 이름도 생소한 '도구통바위'다. 무슨 뜻일까? 긍금하여 집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도구통'이란 '절구통'의 충청, 전라, 경상 사투리였다.
절구통이란 통나무나, 돌이나, 쇠 따위를 속이 우묵하게 만들어 거기에 곡식 따위를 넣고 절굿공이로 찧거나 빻는 것인데 가서 보니 절구통이라고 하기에는 우묵한 곳이 없고, 절굿공이라 하기보다는 돛대 같은데 거기 아까의 멋진 표지 하나가 서있다. 가서 보니 엉뚱하게도 유치환의 '바위'란 시가 있다. 안내판이 있을 자리에 꼭 필요하지 않은 시가 있다니 과잉 친절이었다. 거기 또 하나의 표지가 있어 보니
백제 시절, 효자 강 처사(處士)가 노모의 병 치료를 위해 이곳 관음봉 관음굴에서 기도하다가 현몽으로 찾아간 곳에서 인삼 씨를 얻어 금산이 인삼 고장이 되었다는 말까지는 좋은데- .

사족(蛇足)을 달아놓은 곳이 못내 아쉽다.
"금산에는 1,200여 점포가 있는 전국 최대의 인삼 약령 시장이 있으며 언제든지 방문하시면 인삼과 약초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금산군수 이름으로 명승지 앞에 써놓아서는 안 될 말이었다.
  도구통바위부터는 진악산의 참모습이 시작되었다. 억새 오솔길이 그러하였고, 밧줄을 붙잡고 올라가야 하는 바윗길도 그러하였지만 아슬아슬한 바위 산등성이 좌우로 전개되는 연봉들이 더욱 환상적이었다.
사진을 찍다보니 뒤쳐질 수밖에 없어 가장 늦게 점심도 굶은 체 능선 따라 정상을 향하였다.

진익산 가는 길에 진악산 정상보다 5m나 더 높은 737m의 고지가 있어 일행들은 거기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진악산보다 높은 곳이라니, 진악산 정상을 바라보며 점심과 정상주를 마시자는 것이다.
"산에 와서 가장 큰 낭비가 정상을 밟고 오지 않는 거거든요. 우리 나이에 언제 다시 올 수 있겠어요?"
하며 아깝게도 애써 올라온 길을 한참이나 내려가서 진악산 정상을 향하였다.
정상이라는 곳에 사람이 몰려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파란 지붕의 간이 대피소 근처에도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였다. 목적지를 보지 못하고 가는 길보다, 보고 가는 길은 퍽 수월 하였다.

정상은 평평한 것이 헬리콥터 장이기도 했다. '732.3m 진악산'이란 돌기둥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온 나를 뿌듯하게 맞아준다. 지리산 노고단의 운해보다, 지리산 종주 길에서 만나게 되는 연봉의 모습이 보다 더욱 장엄한 세계가 열려오기 시작하는 것이 저절로 탄성을 발하게 한다. 
한국에 이러한 자연이 있음을 새삼 깨달으며, 먼 나라를 방황할 때마다 고국에 돌아가서 찾아 보리라 벼르던 한국의 산하의 절승에 나는 얼마나 행복하였는지-.

 산과 산이 멀리 있으면 산 빛은 초록을 떠나 하늘보다 짙은 푸른빛을 감돌게 한다. 시드니의 불루마운틴이 그랬고, 미국의 그랜드케년이 그랬다.
거기에서 만난 감탄이 여기보다 더하지가 않았다. 거기서 본 규모가 여기보다 더 광활하지도 않았다.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머리를 한 바퀴 비잉- 360도로 돌려야 볼 수 있는 이 장관은 마치 파도가 진악산을 향하여 몰려오는 것 같았고, 망망대해에서 시선이 가는 곳마다 마주치게 되는 산하의 모습은 파도치는 물결을 바라 보는 듯하였다. 산파(山波)의 세계였다.
북으로부터 877.7m 대둔산, 903.7m 서대산, 1241.7m 민주지산, 1,614m 덕유산, 1125.9m 운장산 등등-.

산 너머 산. 연무 너머 또 산으로 계속되는 연봉들이 보이는 진악산 정상 전망대에-. 그러나 엉뚱하게 '바위'란 유치환의 시가 여기에도 있다. 이 자리에 지리산처럼, 여기 저기 불끈 솟은 산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하나 하나 그려 설명을 달아놓는다면 이곳을 찾는 이에게 국토의 아름다운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게 하여 줄 터인데-.

나는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종주가 끝나는 곳에 차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등산이 시작된 곳에 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온 분들이 연로한 분들이라서, 이곳까지 오신 분들이 몇 안되어서였다.
정상에서 4분도 못 되는 거리에 그 유명한 빈대바위가 있건만, 조금만 더 가면 관음굴과 물골이라는 바위굴이 있건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고스락 경치나마 이렇게 실컷 보고 부지런히 하산하자.'
'고스락'이란 꼭대기를 말하는 사투리이니 산정상의 경치란 말일 게다. 오늘은 즐거움(樂)으로 나아간(進) 날이로구나.
어느 학교에서인가 애국조회 때마다 부르는 교가 소리가 들려 오는 듯하다. '진악산 정기를 받아 금산에 피어난 배움의 터전 ~~'
                                                                                                                      -2002.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