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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인천(仁川) 이야기

ilman 2024. 5. 4. 14:40

내 고향 인천(仁川) 이야기

                                                    ilman 성철용

55회 인천고등학교(仁川高等學校) 동창회 모임을 위해 인천행(仁川行)전철에 오르니 잊고 살던 아득한 옛날이 생각이 떠오른다.

새파랗던 젊디 젊던 고3 시절,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그 어렵다는 명문 대학에 합격하고도 서울까지 지금은 단돈 일 이 천원이면갈 수 있는 곳을 차비가 없어서 대학입학식(入學式)에도 갈 수 없었다, 덕분에 입학식 날 배웠다는 교가를 나는 끝까지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내가 47년 세월을 뛰어넘어 좋은 세월을 만나 백발의 나이로 노인 무임승차로 라디오를 들으며 경기도 일산(一山)에서 동인천역까지 가고 있다가난한 사람의 물건 팔아주기 좋아하던 내가 방금 전철에서 산 라디오다.

인천은 비류(沸流) 설화가 숨 쉬는 곳.

서기 372년 백제 시절에 중국을 왕래하던 능허대(凌虛臺) 나루터가 있었던 곳,

1902년 최초의 해외 이민이 조국 떠나 하와이(Hawai)로 향하던 인천항(仁川港).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 개항한 항구 도시 인천(仁川).

전 이대 총장 김활란(金活蘭), 장면 총리와 화가 이당 김은호(金殷鎬)님의 고향,

내가 태어나서 자란 인천을 향하고 있다.

 

인천(仁川)을 왜 인천(仁川)이라 하였을까?

  인천(仁川)의 옛 이름은 고구려 시절 비류(沸流)가 나라를 세울 때에는 이 고장이 '물의 고을'이라 해서 물골이란 뜻으로 미추홀(彌鄒忽)’이라 했다. 고구려 때에는 '매소홀(買召忽)'이나 '소성(邵城)'이라고도 했다.

고려 때는 인주 이 씨(仁州)가 대대로 살고 있는 명문거족의 고장이 인천이었다.

고려의 문종(文宗)에서 인종(仁宗)까지 7대에 걸쳐 이곳에 살던 인주 이 씨(후에 仁川 李氏) 가문에서 왕비가 간택(簡擇)되어서 그중 5명의 왕이 탄생하였기 때문에 고려 때에는 당시 인천을 ‘7대 어향(七代 御鄕)’이라고 하였다.

어향(御鄕)이란 왕비의 고향이요, 따라서 왕의 외가 마을이다. 이 고장을 고려 숙종(肅宗)은 어머니 고향이라 하여 '경원(慶源)'이라고 높여 부르다가, 인종(仁宗) 때부터는 이 고장을 아예 인주(仁州)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조선 태조 때까지 인주(仁州)라 불러오다가 조선 태종(太宗) 이후 인주(仁州)는 다음에 의거 인천(仁川)으로 바뀌었다.

  “무릇 군현(郡縣)의 이름 가운데 주(州) 자를 띤 것은 모두 ()’·‘()’자로 고친다.

                                                                                        조실록 조선 태종 1310월 15일(1413)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 했던가. 새해 들어 갑자기 내 고향 인천이 그리워서 인천에 갔던 길에 어린 시절 주로 살던 동네가 생각나서 역에서 내려 송현(松峴) 시장을 거쳐 약우물터를 향하여 걷기로 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렇게 멀던 곳이 몇 걸음에 철룩다리가 나타나는데 주변 상가가 흉하게 헐려 있다. 지나가는 이에게 물어보니 전철을 복복선(複複線)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이 경인철도는 1889에 노량진까지 210리를, 한강철교가 개통되던 190078일에는 서울역까지 260리가 한국 최초로 개통되었다는 바로 경인선(京仁線) 철교다.

나는 '인천 중학'을 나와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 좋다는 인생의 황금기라는 대학시절을 가난에 풍덩 빠져 고학(苦學)으로 낭비하여 살다 보니 나는 중 고등시절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멀리 살 수밖에 없었다그래 그런가.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친한 친구가 별로 없이 외톨이가 되어 살아왔다.

그러다 세모(歲暮) 무렵 최창희 씨가 회장으로 있을 때 인천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처음 가서 백발이 성성한 친구들을 모임에 다녀와서 이런 글로 지나간 날을 그리워한 일이 있다.

 

벼르다 찾아가본 고교 동창회

꼭 같은 나이를 살던 우리 속에 묻히니

잊고 살던 옛날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더라.

별빛을 빼앗아 간 태풍 같은 긴 세월이

흰 눈을 머리에 뿌리며

깊게 할퀴고 간 낯선 얼굴 속에

돌려주는 옛날 모습이 그 속에 묻혀 있더라.

등록금 가져오라 쫓아 보내던 담임선생님도

그렇게 가난했던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도

이제는 궁상을 털고 사라져 간 그리움들.

우리들은

그때 없던 자식들이

떠난 자리에서

절주(節酒)로 마셔야 하는 나이에

망년회(忘年會)에 서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되찾은 젊디 젊던 시절을 안고

변함없이 반짝이던 그 별을 밟으며

늙은 마누라로 돌아간다.

다음엔 나도 카드를 긁어서라도

술 한 잔 사고 싶구나.

우리들 인고(仁高) 55회 친구들께            

 

  누구나 가난했다던 그 시절, 그 무렵의 가난보다 더 가난했던 고교시절에, 수업료 독촉하는 담임선생에게 점심시간마다 쫓겨 다니던 길을 따라가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살던 약우물 터 송현동 40번지에 가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구나.'

그러나, 내가 찾아간 고향은 그 흔적이 한 조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입주(入住)를 두어 달 앞둔 낯선 대형콘크리트 아파트촌으로 송두리째 바뀌어 있었다. 천지개벽이 아니라 동네가 개벽하여 없어진 것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얼굴로 성형 수술을 한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만이 바뀐 것이 아니라, 송현동 입구인 송현동 시장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오른쪽 뒷산 전체인 수도곡산까지를 깎아 272,100여 가구가 아파트 촌락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더니 내가 찾아온 고향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는, 다시는 찾아올 수 없는, 찾아올 필요가 없는 고향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경우 내 고향의 발전을 축하해야 할 것인가. 잃어버린 고향을 슬퍼해야 할 것인가.

옛날 고교 시절 동네 입구 공터 수평 대에서 기차 소리를 들으며 서울로 통학하는 동내 여학생을 기다리던 곳에는 보기 싫게도 건축 잔해가 가득히 쌓여 있다.

그 골목에 들어서면 입구에 있던 그래도 당시에는 잘 살던 왼쪽 쌍둥이네 집 구멍가게를 돌아 만나게 되던 쌍우물이 있었고, 거기서 좌측으로 올려다 보이던 숲이 무성하던 수도곡산은 보기 싫게 성형수술을 한 듯 누런 황토 흙 속살이 드러난 것이 그 꼭대기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만이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그곳에는 창피하게도 '달동네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나는 이렇게 변모하는 고향을 그리며, 그리움을 품고 살던 그 아름답고 시장하던 시절을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나이가 고향이 되어 버린

설날 무렵.

가슴속 깊숙한 마음을 열어 봤더니,

까맣게 잊고 살던

인천 약우물터 어린 시절 쌍우물 가,

겨울이 겨울답던

눈 익은 골목 속에서

하나도 춥지 않게

밤을 서성대던 젊디 젊은 내가 보인다.

백발을 이고 사는 지금

눈을 감아도

그 우물 속에

세월처럼 잠든

반짝이던 별들의 이야기를

두레박 가득 가득히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은

쌍우물을 두고도 수돗물을 사 먹었던 그 시절에

약우물 터를 바라보는 바다와 함께 듣던

기적 소리 때문일까.

그 하얀 구름 속에 풍겨 오던

억지로 지워버리려던 그리움 때문일까.

하얗게 부서지던

밀물과 썰물 때문이었을까

                                    -쌍우물 가

  거기서 한세월을 살았다는 노인을 만나 함께 허술한 목로주점에 들렀다. 집이 헐린 대신 받은 26평짜리 아파트가 어느 정도 지어졌나 보러 온 사람이다. 6.25 때 연백에서 피난 나와 이곳에서 살아온 70대 노인이었다.
피난통에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평생을 부두에서 운치(짐나르는 일)로 쪼들리다가 준비 없이 노후를 맞은 사람. 돈 없어 병으로 42세에 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13녀를 키워 혼인시켰으나. 더 말해야 무엇하랴. 그의 피곤한 얼굴에서 고단한 인생역정을 읽겠는데-.

헤어져 돌아오다 보니, 올 때 기차에서 산 라디오가 주머니 속에서 손에 잡히니 갑자기 후회가 난다. 이걸 그 노인에게 주면 얼마나 요긴하게 쓸까 해서였다. 우리 같은 또래 나이에 라디오는 자식보다 가까운 친구가 되던데-.

중앙시장 모퉁이에서 만두를 굽는 50대 중반의 사람이 있었다. 소주로 점심을 때우던 가난한 시절의 내가 생각나서 소주에 만두 천 원어치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졸업한 인천중학에 합격하고도 돈이 없어 못 다녔다며 한숨짓는다. '그럼 자넨 내 후배일세-' 하며 아까의 라디오를 주고 왔다. 안 받겠다는 만두 값을 굳이 치르면서-.

  떠나올 때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 윤영신 교장이 동인천역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인 그 친구의 머리도 백발로 변한 지 오래였다. 헤어져 살던 동안의 우리들의 대화는 우울하게도 내내 병 이야기뿐인데 우정은 술이 되어, 막걸리로 소주로 맥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친구야!
나 성철용이오.  ilman이라 호() 하고, 정년 무렵에 '수필작가'와 '시인'으로 등단하고 지금은 여행작가로 행세하고 있다오,  ilman이라 호한 것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건강을 위해 1만원 어치만 술먹자고 지은 자호(自號)한 거라구.
" ilman의 국내외 여행기"란 불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니 초대합니다. 주로 여행기로 2,000여 여 편을 불로그에 실어놓았으니 심심하거든 찾아보시라구요. 지금은 열심히 섬여행기를 쓰고 있는 것은 죽기 전에 마지막 내 소원은 '국립 해양공원 섬이야기' 책자를 내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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