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제 시절에 인천의 아주 가난한 흙수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우리 부모님은 고향이 충청도 논산 분으로 옛날 사람이어서 두 분 다 학교는 문턱도 밟아 보시지 못한 분으로 연고 없는 대처 인천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세계에서 몇 째 안 가는 가난한 나라에서도 그중 아주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 식구가 어렸을 적 살던 동네는 송현공 약우물터로 바다가 굽어 보이는 지금의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있는 수도국산 기슭에서 어린 시절부터 소학교와 중고 시절을 거기서 보냈다.
오늘은 내가 어렸을 적 부르던 오늘의 팝송 같은 노래나 6.25 당시 부르던 군가에 대해서 추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 당시 장난 삼아 부르던 못생긴 해학적으로 낮잡아 놀려 댈 때 부르던 다음과 같은 노래가 90이 가까운 지금까지 입에 맴돈다.
북평 대가리 양품 낯짝,/ 짱구 대가리 양푼 같이 넙적한 낯짝(얼굴)
꽹맥이 눈깔에 빈대코/ 꽹맥이처럼 커다란 눈깔에 빈대 같은 납작코
거미 모가지에 말뚝 배꼽/ 비쩍 마른 가는 모가지에 말뚝 같이 툭 튀어나온 배꼽.
마당발!/ 볼이 넓고 바닥이 평평하게 생긴 발
이런 말도 생각이 난다.
오망예,/ 오망( 사리에 어둡고 요망스러운)네야
부엌에 가서 당그리 가저온/ 부엌에 가서 고무래 가져온.
당그리가 뭣꼬?/ 고무래가 무언인고
녹고 녹고/ 녹고(??) 녹고(??)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6. 25 사변이 발발한 때라서 국군 장병에 입대식이 소학교 마당에서 열렸고 그때 시장 박학서 인천시장이 입대하는 장병을 보내며 울던 모습이 기억난다. 당시 입대는 죽음의 길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들은 이런 군가(軍歌)를 불렀다.
어머니,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까마귀 싸우는 골에 저는 갑니다.
38선을 통과하여 태극기를 날리며
죽어서 백골이나 돌아오리다.
아내여, 굳세게 이 세상을 사세요.
우리가 만났을 때 100년 살자고-
지금은 이별가를 합창하고 가오나
꽃 같은 우리 아내 언제나 볼까?
'음악에 숨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요한 밤 (0) | 2022.12.24 |
---|---|
화개장터 (0) | 2022.11.28 |
이 곡을 아시는지요 (0) | 2018.10.15 |
설날 시리즈/ '까치 설날' 이야기 (0) | 2018.02.15 |
'晋州라 千里 길' 대중가요 이야기 (0) | 2018.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