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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미아리고개 / 시나리오 시안

ilman 2013. 6. 14. 20:51

한 많은 미아리고개/시나리오 시안(試案)

 

때: 203년 6월 보훈의 달

장소: 성북 미아리 소공원 일원 등

등장인물: A노인(77세), 손녀(중학생), B노인(65세), C 노인(77세), 동내 여인 등


S#1: 돈암동 어느 가정

할아버지 노인 A: 한별아, 국기 달았니? 오늘이 현충일인 건 알지?

손녀: 네.
할아버자l: 아, 이런! 현중일에는 조기를 달아야지. 반기(半旗)나 검은 천을 기의 윗부분에 두르거나, 깃폭만큼 깃봉 아래로 내려 다는 게 조기(弔旗)라구.

손녀: 할아버지, 그런데 왜 현충일을 6월 6일로 정한 거에요?

할아버지: 우리 조상들은 1년을 24절기로 나누어 살았는데 그 중에 4월 청명일(한식일)에는 조상 산소에 가서 떼를 입히고 성묘를 하였단다. 그리고 망종(芒種) 때에는 산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왔어.  망종(芒種)은 양력으로 바꾸면 6월 6일 경이라서 그 날을 나라 위해 순국하신 장병과 순국 선열을 추모하는 현충일(顯忠日)로 정한 거야.

손녀: (끄덕이다가 지팡이 짚고 나가는 모습 보고)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할어버지: 미아리고개 소공원에 친구 만나러 가지.
손녀: (할아버지 등에 대고 혼자 말로) 우리 할아버지는 움직이는 사전이셔.


S#2: 미아리고개 소공원

 

 (두 노인이 A 노인을 반긴다.)

C 노인: 갑장(甲長)!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오셨구려. 어제는 전쟁기념관엔 잘 다녀오셨는가?

A 노인: 웬걸, 삼각지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이수까지 갔다 왔다 헤맸어, 옛날에 다녀오고도 깜빡하데-. 나이 탓인가봐.

B 노인: 거기서 무엇이 제일 인상 깊으시던가요?

A 노인: ‘(골돌히 생각하다가) 전쟁기념관 입구에 있는 6.25 당시 우리나라를 지키다가 산화(散華)한 UN군 전사자 3만 8천명의 이름을 모신 명비(名碑)도 그렇지만 그보다 ’평화의 시계탑‘이 제일 인상적입디다.

 

  남북이 전쟁에 사용했던 탱크, 포탄 등의 망가진 고철 잔해의 무기 더미 위에다.두 자매가 쌍둥이 시계를 갖고 있는 모양이지요. 내 짐작으로 높이가 한 10m는 되는 것 같아요. 

현재 시간을 표기하고 있는 시계는 맨 위 소녀가 어깨에 메고 있는  '평화의 시계'이고. 누워 있는 소녀의 시계는 4시 정각을 가르치며 시침이 멈워 있는 것이 '전쟁의 시계'래요.
내 옆에 있는 노인이 남 들으라는 듯이 크레 말합디다. 그 시계가 가리키는 '6: 25 : 4'이 북한군이 남침한 시각이라고.
C 노인: 이 공원을 올라오다 '미아리고개 유래 기념비'를 보셨소?

A 노인: 그럼, 난 벌써부터 휴대폰에 사진까지 찍어 가지고 다니는 걸-.  

(스마트폰의 사진을 보여 주는 모습을 B, C노인이 보는 이미지와 함께 나레이션이 시작 된다.)

“미아리 고개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서울 성북구 돈암동(敦岩洞)에서 길음동(吉音洞)을 지나 의정부(議政府)로 이어지는 고개로 국방의 요충지가 되던 곳입니다.그 원래 그 고개 이름은 ‘되너미고개’라 하였답니다. 이름을 ‘되너미고개’라고 하였던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되놈(여진족,‘狄’, ‘胡’)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하였다가 이 고개로 넘어갔다(踰) 해서 생긴 고개(峴) 이름이라지만 다른 이야기도 있어요.(사이) - 이 고개는 서울에서 의정부로 통하는 오직 하나의 길목이라서 조선시대 사람들이 일하려 갈 때나 귀가할 때 꼭 ‘되’넘어 올 수밖에 없는 고개라 해서 ‘되너미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옛날에 이 고개는 우마차(牛馬車)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길이 매우 경사지고 험준한 고개여서 도보로 가는 사람들만 이용하였답니다. 우마차들은 종암동의 말행길(馬行路)로 돌아서 의정부 쪽으로 갔었데요. 
당시 사람에게는 이 고개는 높은 고개여서 올라오면 힘이 빠지고 허기가 져서 밥을 ‘되’(다시) 먹어야 하는 고개라 해서 ‘되너미고개’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답니다.
 돈암동(敦岩洞)의 ‘돈암’이란 말도 '되너미'란 이름이 변하고 변하여 한자를 빌어 '돈암(敦岩')이라고 하였다는군요

..

노인 B: 되놈들이 넘어왔다 해서 '되너미'로 그 '되너미'가  '돈암'이 됐다면 왜 '미아리고개'라 한 것일까요?

A 노인: 이 고개를 ' 미아리고개'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미아 제7동에 있는 불당골에 오래 전부터 있던 ‘미아사(彌阿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미아(彌阿')는 원래 불교 용어랍니다. ‘저승으로 넘어가면 다시는 이승으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뜻의 불교 용어랍니다.
B 노인: 아, 그런 이야기는 우리 선친께서 하시던 말씀 같아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이 미아리 고개 너머 삼양동 일대에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가 있어서 '이 고개를 넘으면 이승으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상여가 넘어 가는 것이라구'요.

B 노인: 이 미아리 고개가 더욱 유명해 진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반야월 작사 “단장의 미아리 고개"란 대중가요가 아닙니까?.

 

S#3: 소공원 반야월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 동판
A 노인
: 지팡이로 소공원의 반야월의 동판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가리키며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대중가요 중 국민들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부른 노래 같아요. 저 노래 가사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산보 나온 사람들도 귀 귀울이는 모습과 함께 이하 영상 등을 배경으로 하여 나레이션으로)

옛날 '뿌리깊은 나무' 출판사의 책에서 작사자 고 야월 선생이 '터놓고 하는 말'이란 제목으로 이 노래말을 짓게 된 사연에 대한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어요.

-6. 25가 터졌을 때, 저는 그 소식을 들은 바로 그 이튿날 홀로 피난 길을 떠났습니다. 그 때 제 가족이라고는 아내와 맏딸 '수라'가 있었을 뿐이었지요.  미처 피난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일이 그리 크게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가족을 수유리 집에 그냥 남겨 두고 저만 혼자 피난을 간 것이지요.저는 우선 처가가 있는 경상도 김천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가에 도착한 지 며칠도 안 돼서 아내가 들이닥쳤습니다. 그의 몰골은 말할 수 없이 초라했는데 이상하게도  마땅히 함께 왔어야 할 귀여운 딸 '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어찌하고 홀로 왔느냐?” 제가 묻자 마자 망연하던 아내의 표정이 바뀌면서 마구 소리치고 울면서 두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혼자 떠나고 미아리가 적의 손에 들어가자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수유리 집을 떠났는데, 그 새 잘 먹이지 못하여 굶어 있던 터에 총소리, 대포소리가 요란해지자 공포에 질리고 무서워 떨다가 수라는 미아리고개를 채 넘지도 전에 그만 객사하고 말았데요. 피난길이 너무도 화급하여 아이를 매장할 곳도 찾지 못한 아내는 고갯길 옆에 맨손으로 흙을 파고 묻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 뒤의 이야기입니다. 9. 28 수복이 되어 서울로 돌아와 미아리고개 그 근처의 여러 군데를 파 보았지만 아이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그때의 비통한 심정을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 속에 담았지요. 

S#4: 한 많은 미아리고개

 

(이야기 하는 중에 한  여인이 산보 나왔가 다가 일행 중에 섞여 노인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노인 C:(여인을 보며) 열심히 들으시는 모습을 보니 이 동네 사시는 분 같네요.

여인: 네 요 아랫 동네에 살아요.
 노인 C: 저도 요 아래 동선동에서 사는 돈암동 본토박이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한년 다닐 때에 6. 25를 이 돈암동에서 맞았어요.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는 통일의 노래처럼 보훈의 달 6월을 맞아서 그 한 많은 미아리고개  현장에서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사연을 이렇게 듣다 보니 '단장의 미아리 고개'란 그 노래가 듣고 싶네요. 그것이 저의 꿈에도 소원인데.그 노래를 부탁드리면 안될까요?

(노인 A, B, C와 에 산책 나온 동네 사람들이 요란히 박수 치며 거든다.)

노인 C: (여인의 싫지 않은 듯한 표정을 보고 ) 기왕이면 저 동판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말 앞에서 불러 주시면 어떨까요?

여인: (모두 일어서서 다시 터지는 박수 속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일행들: 후반부에서는 따라 부른다.)

(나래이션) : 이 노래 이전에도 한(恨) 많은 단장의 고개가 미아리고개였습니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 태조가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오면서 넘던 고개가 '되너미 고개'라는 미아리고개였습니다.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지간(君信之間)이라는 치욕적인 조약을 맺고 어쩔 수 없이 저들의 요구대로 공녀(貢女)란 이름으로 50만 명의 죄없는 우리 나라 부녀자들을 이국 땅 청나라 심양으로 보낼 때 울면서 넘어가는 딸과 며느리 들을 보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고개였으니 어찌 한 많은 고개가 아니겠습니까? 당시 조선 인구가 1천만밖에 안 되었을 시절의 일이었답니다.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인 6.25 때에는 북괴군7개 보병사단 등

11만 1,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침한 그 주력부대인 1군단이 소련제 최신 T-34 탱크를 앞세워 서울 침략을 위해 넘던 고개가 바로 비정(非情)의 미아리고개였습니다. .

그 3년의 뼈아픈. 전쟁이 휴전(休戰)이란 이름으로 허무하게 끝날 무렵, 한국의 애국자들과 각계 각층의 지도급 인사 8만 3천여 명이 노랫말처럼 강제로 쇠사슬에 묶여 북괴에 납치 되어 북으로 가고 가족들은 하릴 없이 보내던 고개였으니 어찌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아니겠습니까. 단장(斷腸)이란 창자가 끊어진단 말이 아닙니까?

 왜 북한군이 남한의 각계 요인들을 납치해 갔겠습니까?
일제에서 해방과 동시에 김일성은 사회주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국민의 사유지를 몰수하니까 지식인, 지도층이 크게 반발하자 숙청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에 반대하는 지식인 300만 여명이 남한으로 남하해 갔기 때문에 북한은 각계 각층의 요인들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들을 납치하여 가면서 자진 월북한 것이라고 북한은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허위 선전하고자 함이었답니다.

 

S#5 : 다시 돈암동 어느 가정

 

손녀:  할아버지, 내일이 7월 27일 휴전 기념일이레요.

할아버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니?

손녀: 우리학교 사회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 주셨거든요. 휴전에 대하여 알아 오라고,

할아버지: 그러지 않아도 그 얘기를 해 주고 싶었어, 할아버지가.

  내일 7월 27일은 휴전 협정이 60주년을 맞는 날이란다.

손녀: 가만 있자-. 2013년에서 60을 빼면 흊전이 1953년 7월 27일이었겠네요.

할아버지: 그렇지.

휴전협정은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시절에 조인 되었는데 그 무렵 공산당 중립국감시요원인 체코와 폴랜드 대표들이 월미도에 머물러 있을 때였지. 그 월미도 제방 입구에서 할아버지도 전국에서 모여 든 학생들과 함께  데모를 했어. 할아버질 따라 해봐. 그때 그 구호를.

(손녀와 함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뒤로 흔들며)
“체코 폴란드 대표안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대한민국은 휴전을 반대한다. 반대한다.”

그런데 북한은 이 날을 전승 기념일(戰勝記念日)이라고 크게 기념하는 모양이더라.

자기들이 남침(南侵)하여 수없는 사람들을 죽게 해 놓고 6.25는 남한의 북침(北侵)이라고 오리발으 내미는 것처럼 휴전일을 자기들이 승전한 날이라고 북한 주민을 속이며 선동하고 있는 거야..(사이)

: 할아버지가 지난달 6월에 전쟁기념관에 갔을 때 친절한 전쟁기념관 김충일 전문안보해설자 아저씨와  인터뷰 할 때 캠코더로 그 장면을 찍어 놓은 동영상이 있으니 그걸 보며 이야기 해 줄까?

(할아버지는 캠코더를 TV에 장착하는 동안 손녀는 노트와 볼펜을 가지고 TV 앞에 앉는다.)

 

S#6: 전쟁 기념관 6.25 관계 영화

 

 6.25에 최신 소련제 T-34탱크를 앞세워 미아리 고개를 넘을 때 북한군은 242개의 탱크가 있었는데 한국에는 1대도 없었어. 북한 공군에 비행기가 222대의 전투기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한국에는 연습기 22대 뿐이었단다. 요즈음 TV 방송국에서 타고 다니는 그런 비행기였어.

국군의 병력보다 북한군은 2배나 많았구.

인터뷰 자료화면: (자료화면 순서대로) 6.25 남침 준비- 병력비교 등


S#:7: 미아리 고개 

 

  (평화로운 미아리 고개 차량행렬을 배경으로 나레이션)

(학살 이미지를 배경으로) 6.25는 소련의 지원 하에 전차와 야크전투기, 야포 등으로 중무장하고 미아리고개를 넘어 남침했으니 6.25 전쟁은 준비된 북한군과 준비 안 된 우리 국군과 싸우는 일방적인 불행한 싸움이었어.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군은 낙동강까지 밀리다가 그냥이면 적화 통일 될 것을 고마운 UN군 참전으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하면서부터 실지 회복을 위한 북진이 시작된거야. 

휴전이 가까워 질 무렵 후퇴하는 인민군은 많은 애국지사를 인민재판이란 이름으로 학살했어.

이 미아리 고개를 통하여 애국자들과 각계 각층의 지도급 인사  8만 3천여 명이 쇠사슬에 묶여 납북되어 갔구. 

 

  당시 UN군의 파병 목적은 38선을 지키면서 휴전하는 것이었어.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 전군에게 명령했단다.

 "내가 이 나라 최고 군총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을 따르라. 북진하라, 북진하라."

그 명령에 따라 국군 제3보병사단 제35연대가 강원도 양구에서 38선을 돌파하여 진격했어. 그날이 1950년 10월 1일이라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지.

그후 평양, 원산을 진격하여 중국과 국경인 초산진에서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았단다.

손녀:(혼잣말로) 어마, 그래서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었구나. 그러면 그때 우리는 통일을 할 수가 있었네요

할아버지: 그럴 수 있었지. 그런데 중국의 모택동과 북한의 김일성 간에는 그 전부터 약속이 있었어. 6.25에 미군이 참전하면 중공군도 도와준다구.

 

그래서 중공군 정예군  5만 명이 쳐들어 온 거야. 그 5만명은 당시 북한군 전체의 1/3이나 되는 병력이었어.

그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꾕가리와 피리를 불며 미아리고개를 통하여 또 서울로 쳐들어 온 거야.

그래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서둘러 피난을 떠난 것이 1.4 후퇴라는 거였지.그 때 서울에 남아 있는 서울 시민이 겨우 20만만이이었다는구나.

UN군이 아니더면 적화통일이 될 뻔했던 것처럼, 중공군이 아니면 북진통일이 될 뻔 한 것이 6.25였단다.

(배경에 피난 길, 피난 살이, 학살 현장 등이 전개 되면서) 6. 25는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룰 주었어.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동안우리측의  인명 피해만도 사상자 수가 약 150만, 20만명이 행방 불명, 25만이 부상, 10만명의 납북은 물론 전쟁 과부, 고아, 전국민의 피난살이와 전국토는 재기 불능의 초토화가 되었단다.
이런 전쟁은 다시 또 없어야 하는데 북한은 한술 더 떠서 핵무기로 우리를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이를 어쩐단 말이냐?

할아버지: 한별아. 네 장래 희망이 뭐냐?

손녀 :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토일과 평화와 행복을 노래하는.

할아버지: 꼭 그렇게 된다면 이 할아비가 부탁 하나 하자, 할아버지가 통일를 염원해 쓴 할아버지 시(詩)의 작곡가가 되어다구. 작곡가가.

('우리의 소원'을  배경음악으로  서서히 글자가 한줄씩 UP 된다.) 

 

백두대간(白頭大幹) 허리 끊겨

제 각각 한(恨) 세월(歲月)

흘깃흘깃 혈육(血肉)으로

따로따로 반 백년반(반百年)

저 산하(山河)

이 산하(山河) 되어

우리 함께 살아보자 

 

그리움이 북향(北向)하다

천지(天池)에 고이었고

서러움이 남향(南向)하다

백록담(白鹿潭)에 담기었다

언제나

                                          천지(天池), 백록담(白鹿潭)에

                                          기쁜 눈물 더해 볼까

                                                                    -우리의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