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의 도시/ 스톡홀름 (Stockholm)
어제 저녁 핀란드를 떠나온 호화 여객선 실야라인이 아침에 멈춘 곳이 스웨덴인데, 입국 수속도 밟지 않고 신기하게 그대로 나왔다. 거기가 바로 스톡홀름(Stockholm)이었다.
북유럽의 나라들은 서로를 믿고 존중하며 사는 나라이라서 인가, 관광객의 진을 빼고 출입국 시키는 러시아와 비교하면 이런 선진국의 자부심이 자못 부럽기만 하다.
스웨덴은 유럽에서 4번째 큰 나라다. 한국보다 2.4배나 크고, 길고 가는 나라이다. 인구는 우리나라 1/9밖에 안 되는 900만 명으로 인구 밀도가 아주 낮다.
전 국토의 절반이 삼림지대로 호수만도 9만 6천여 개나 된다. 경작지가 10%뿐이지만 나라에서 지원하는 발달된 농업 기술로 하여 거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삶의 질을 누리고 사는 선진국으로 2,000년 IMD평가로 세계 국가 경쟁력 9위였다.
1810년대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것을 최후로 오늘까지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6.25사변 덕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일본처럼,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의 덕을 본 나라다.
싸움에 휩쓸리지 않아서 전쟁 중 호황을 누리어 선진국에 진입하였기 때문이다.
물의 도시 스톡홀름은 '물위의 아름다움'이란 이름 그대로 발트 해와 마라렌(Malaren) 호수가 만나는 곳의 14개 섬에, 53개의 다리가 하나의 스톡홀름으로 이어주고 있다. 그래서 스톡홀름은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현대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섬보다 아름다운 곳이 있던가. 바다와 뭍의 어울림, 그 해안선 등등-. 그래서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리어 지고 있다.
스톡홀름(Stockholm) 주변에는 2만 4천 개나 되는 아름다운 크고 작은 섬이 있다. 거기에다가 중세 옛 모습을 간직하기 위하여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만난 건물들은 바다에 둘려 싸인 자연의 아름다움과 한데 어울려 환상적인 스톡홀름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 자연 풍광에다 고풍스런 모습으로 인하여 스톡홀름은 북구의 베네치아로, 문화적인 면으로 ‘북구의 파리’로 애칭 되고 있다.
스톡홀름은 바다로 둘려 싸인 도시이기 때문에 시내 어디에서나 요트와 수영과 낚시를 즐길 수가 있다.
왜 스톡홀름이라 하였을까? 13세기 초에는 많은 무역선들이 오고 갔기 때문에 통제가 필요하여 통나무로 울타리를 쌓았다. ‘스톡(Stock) '이란 통나무요 ‘홀름(Holm)'이란 섬이란 뜻이어서 ’통나무 섬'이란 뜻으로 스톡홀름이라 하였다고.
바사호 박물관에 가는 도중 크고 작은 많은 공원 중에 귀에 익은 노벨 공원이 있다.
그렇다. 우리가 지나는 이곳은 옛날 노벨이 노닐던, 세계적인 여우 잉그렛 버그만이 자라던 나라와 도시요 그 거리였다.
저기 보이는 돛대는 있으나 돛이 없는 커다란 하얀 군함은 호텔이다. 물의 도시답게 호텔은 물론 레스토랑으로 쓰이는 배가 물 위에 떠서 관광객을 저렇게 우아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침몰하여 더 유명해진 전함/
오슬로 바사 (Vasa)호
스웨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룩한 시대는 바사 왕조였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와 싸워 스웨덴의 발트 해 지배를 완성시킨 왕이 바로 북방의 사자 왕이라는 구스타프 2세였다.
왕은 스웨덴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배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국력을 기울여 건조를 시작한 지 3년만인 1628년 8월 드디어 진수식(進水式)을 하는 날이었다.
바사 (Vasa) 호는 길이 47.70m에 64문의 대포를 적재한 1,300톤 규모의 당시로는 세계 최대 전함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전함 바사 호는 독일과의 30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진수식에서 불행하게도 100m도 못 가서 전쟁의 문 앞도 가보지 못한 체 선원 150명과 해군 300여명과 함께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너무 많이 실은 대포와 포탄의 무게에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후 수심 30m인 발트 해에서 대포는 일부 건져낼 수 있었으나 당시의 기술로는 그 커다란 전함을 예인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난 후 해양 고고학(海洋考古學)을 전공하던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이란 학생이 바사 호에 대하여 교수의 강의를 듣고 바사 호를 예인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이 꿈이 현실화되어 드디어 안데스의 불굴의 집념은 1956년에 바사 호를 발견하게 하였다.
유럽 각국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1961년에 스웨덴은 국력을 기울여 목조 전함 바사 호를 333년 만에 인양하게 되었다.
목조 전함은 세월을 잊은 듯이 멀쩡하였다. 단단한 1천구루의 참나무로 제조하였고 발트 해에는 소금기가 없어서 나무를 갉아먹는 박테리아가 서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굴 당시의 스웨덴 왕은 우리나라 경주를 다녀갈 정도로 고고학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인 후 20년 동안 보수를 끝내고 드디어 1990년 지금의 7층으로 된 여러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도록 배려한 바사 박물관 (Vasa varvet)이 개관되어 인류 고고학의 개가를 이룩하였다.
바사 (Vasa )란 구스타프 2세의 아버지로 덴마크와 싸워 스웨덴을 독립시켰던 구스타프 바사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시 전함은 4척이 있었지만 그 임무를 수행한 전함보다, 침몰하였기 때문에 중세의 조선기술을 고스란히 보전하게 되었고, 현존하는 배로 가장 오래된 역사를 말해 주는 스톡홀름의 제일가는 자랑거리가 되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모든 것에 양면성(兩面性)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제작 과정과 그 예인 작업 자체가 인간 의지의 승리였다. 전함 바사 호는 전함이라기보다 후미의 선체의 황금빛 화려한 180여개의 조각 하나 하나와 더불어 중세 선박 미술사를 말하여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와 같았다.
*.'신(神)의 손'/ 밀레스 조각공원(Millesgarden)
스웨덴의 세계적인 조각가 카를 밀레스는 19C 초 사람으로 파리로 가서 로댕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올가라는 초상화 화가와 결혼하여 아이 없이 살았다.
뒤늦게 귀국하여 발트 해가 보이는 리딩고(lidingo) 섬의 언덕 자기 집에다가 그의 조각은 물론, 그가 평생 수집한 것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그가 죽을 때 자택과 함께 나라에 기증하였다.
그래 그런 가 조각 작품마다 그의 손길이 느껴지기도 하고, 밀레스 (Milles)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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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가 이 나라에는 이혼율이 높다. 여성의 사회 참여율이 높아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좋으나 싫으나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는 사람들이 드물다.
이혼하는 부부 사이에 아이가 있으면 1주일씩 엄마 아빠와 함께 살 수가 있다.
만약 재혼하면 배 다른 형제끼리 어울려 복잡한 가정에서 살게 되기도 한다.
차창 밖에 이상한 사람이 지나간다. 덥지 않은 초여름에 팬티만 입고 시내를 경보로 가는 사람이었다. 결혼하면 짓궂은 신랑 친구들이 신랑을 다는 그런 문화가 여기도 있는 모양이다.
대부분의 가정이 적어도 한 대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고 국민 70%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 1998년 현재 우리나라 교민은 865명이다. 이상은 30대 중반의 긴 머리 처녀 한국 현지 가이드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녀는 발랑 까진 가이드처럼 능숙한 언변의 가이드가 아니었지만, 다양하고 심도 있는 안내로 우리들에게 신빙성을 주는, 교양과 품위를 가춘 조용한 여성이었다. (이상은 2001년 기준)
-다음 최종회 ' 노르웨이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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