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한 많은 미아리고개’(완성본)/대한극장 상영 2019년
때: 203년 6월 보훈의 달장소: 성북 미아리 소공원 일원과 삼각지 전쟁기념관등장인물:주인공/ A노인(77세), 손녀(한별 중학생),조연: B노인(65세), C 노인(77세), 참전용사 노인, 동내 여인 등
S#1: 돈암동 어느 가정
할아버지: 한별아, 오늘이 무슨 날일까?
손녀: 현충일요. 학교 안 가고 노는 날요.
할아버자: (격앙된 소리로) 노는 날이라니. 선생님께 설명 못 들었니?
손녀: 여쭤 보니까. ‘그런 건 몰라도 돼-’. 그러시던데요?
할아버지: (혀를 차며) 이런 세상에. 현충일(顯忠日)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과
순국선열의 충성을 기리는 날인데 몰라도 된다니! 노는 날이라니. 말세로구나 말세!
할아버지: (국기를 조기로 다는 것을 도와준다.)
S#2: 6.25날 다시 돈암동 어느 가정
(FO, F! 되면서)
손녀: (신문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 (신문을 가리키며)한별이도 잘 잤니? 오늘이 인민군이 남침(南侵)한 6.25 날이로구나.
손녀: (의아한 표정으로) 어, 남침(南侵)요? 우리 담임선생님은 북침(北侵)한 날이라고 하시 던데-.
할아버지: (경악한 표정으로 사이) 너 지금 무어라고 했니? 남침(南侵), 북침이 무슨 뜻인지 나 알고나 하는 말이니? 너는 어느 쪽이라 생각하니?
손녀: 남침(南侵)요. 그런데 선생님이 말씀한 북침(北侵)이나 남침이 같은 말 같에요.
할아버지: (안심하는 표정으로) 어째서?
손녀: (태연하게) ‘남침은 북한군이 남쪽을 침입했으니 남침(南侵)이고요, 북침(北侵)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侵掠)했으니 북침(北侵’)이라 하는 거죠.
할아버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렇다면 남한이 북쪽을 침입하였면 뭐라고 해야겠니?
손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사이) 남한이 북한을 침입했으니 남침이죠.
할아버지: 그렇다면 북한을 남한이 침입했다면 북침(北侵)이라 하겠네.
손녀: 헷갈리네요. 어떻든 우리 담임선생님은 ‘6.25는 북침으로 일어났다.’ 하시던데요?
할아버지:(기가 막히단 표정으로) 그 선생은 6.25 때 태어나지도 않은 분이라 모르고 하는 말야.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있듯이, 선생님 중에도 이런 선생님 저런 선생이 있는 법이여. 이럴 때는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 상책이야 국어사전을-.
손녀: (국어사전을 찾아 천천히 읽는다.)남침 ‘북쪽에서 남쪽 지방을 침범함’ (혼자말로) 아하, 그래서 6.25는 북한군이 남한을 침범했다고 남침(南侵)이라고 하는구나.
할아버지: 허허, 네 말을 듣다 보니 할아비도 혼동되는구나.
손녀: (지팡이 짚고 나가는 모습 보고)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할아버지A: (머리를 썰레썰레 흔들며) 미아리고개의 소공원에 친구 만나러 가지. (혼잣말로) 말세로구나 말세!
S#3: 미아리고개 소공원
(두 노인이 노인A을 반기며)
노인C: 갑장(甲長)!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오셨구려.
노인B : 오늘이 6.25가 63주년 되는 날이라서 미아리 고개를 유심히 살피며 올라오다 보니 '미아리고개 유래 기념비'기 있던데 보셨습니까. 돈암동에서 40년을 살면서도 전 오늘 처음 보았는데-.
노인A: 그럼, 내가 누구요? 우리나라 어느 곳에, 어떤 것이 있는지. 그곳에 어떤 전설이나 유래가 있는지 현미경처럼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오? 난 벌써부터 휴대폰에 사진까지 찍어 가지고 다니는 걸-.
(자랑하듯 스마트폰의 사진을 보여 주는 모습을 B, C노인이 보는 이미지가 고개 유래비와 함께 그 내용이 자막과 함께 노인A 목소리 나레이션)
“미아리 고개는 그 원래 이름은 ‘되너미고개’라 하였답니다. 이름을 ‘되너미고개’라고 하였던 것은 (자막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되놈[狄]들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하였다가 이 고개로 넘어갔다(踰) 해서 생긴 고개(峴)여서랍니다.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이라 하고요.(사이)돈암동(敦岩洞)의 ‘돈암’이란 말도 그 '되너미'란 이름이 변하고 변하여 한자로 '돈암(敦岩')이라고 하였다는군요.
노인 C: '되너미'가 '돈암'이 됐다면 왜 이 고개를 ‘미라리 고개’라 한 것일까요?
노인A:
(미아사‘彌阿寺’ 이미지를 배경으로 나레이션) '미아(彌阿')라는 말은 ‘저승으로 넘어가면 다시는 이승으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뜻의 불교 용어랍디다. 이 고개 넘어 제7동에 있는 ‘미아사(彌阿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더군요.
노인C: 그런 이야기는 제 선친에께서 들은 말씀 같아요. 일제 강점기 시대에 미아리 고개 너머에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가 있어서 미아리 고개를 넘는 상여가 많았다고.
노인B: 이 미아리 고개가 더욱 유명해 진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반야월 작사 “단장의 미아리 고개"란 대중가요가 때문이 아닙니까?.
S#4: 미아리 고개 소공원
노인A: 지팡이로 소공원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동판(銅版) 조각을 가리키며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대중가요 중 국민들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애창하여 부른 노래가 단장의 미아리고개더군요.
(산보 나온 사람들도 귀 귀울이는 모습과 함께 이하 미아리 소공원의 동판과 미아리고개를 배경으로)
-(반야월의 사진이 OL되면서) 6. 25가 터졌을 때, 저는 그 소식을 들은 바로 그 이튿날 홀로 피난 길을 떠났습니다. 그 때 제 가족이라고는 아내와 맏딸 '수라'가 있었을 뿐이었지요. 미처 피난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일이 그리 크게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가족을 수유리 집에 그냥 남겨 두고 저만 혼자 피난길을 떠난 것이지요. 저는 우선 처가가 있는 경상도 김천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가에 도착한 지 며칠도 안 돼서 아내가 들이닥쳤습니다. 그의 몰골은 말할 수 없이 초라했는데 이상하게도 마땅히 데리고 함께 왔어야 할 귀여운 딸 '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어찌하고 홀로 왔느냐?” 제가 묻자 마자 망연하던 아내의 표정이 바뀌면서 마구 소리치고 울면서 피멍든 두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혼자 떠나고 미아리가 적의 손에 들어가자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수유리 집을 떠났는데, 그 새 잘 먹이지 못하여 굶어 있던 터에 총소리, 대포소리가 요란해지자 공포에 질리고 무서워 떨다가 미아리고개를 채 넘지도 전에 우리 수라는 그만 객사하고 말았데요. 피난길이 너무도 화급하여 아이를 매장할 곳도 찾지 못한 아내는 고갯길 옆에 맨손으로 흙을 파고 묻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 뒤 9. 28 수복이 되어 서울로 돌아와 제 딸 수라가 묻힌 미아리고개 그 근처의 여러 군데를 파 보았지만 아이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그때의 비통한 심정을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 속에 담았지요.
S#5: 한 많은 미아리고개
(이야기 하는 중에 한 여인이 산보 나왔다가 일행에 섞여 노인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노인 C: (여인을 보며) 열심히 들으시는 모습을 보니 이 동네 사시는 분 같네요.여인: 네, 요 아랫동네에 살아요.노인 C: 저도 요 아래 동선동에서 사는 돈암동 본토박이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한년 다닐 때 에 6. 25를 이 돈암동에서 맞았어요.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장난스럽게)'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는 통일의 노래 처럼 보훈의 달 6월을 맞아서 그 한 많은 미아리고개 현장에서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사연을 이렇게 듣다 보니 '단장의 미아리 고개'란 그 노래가 듣고 싶네요. 그것이 저의 꿈에도 소원인데. 그 노래 한곡을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노인 A, B, C와 에 산책 나온 동네 사람들이 요란히 박수 치며 거든다.)노인 C: (여인의 싫지 않은 듯한 표정을 보고 ) 기왕이면 저 동판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 말 앞에서 불러 주시면 어떨까요?여인: (모두 일어서서 다시 터지는 박수 속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일행들 후반부에서는 따라 부른다.)노인B, 제가 어렸을 때 6.25 무렵 소련제 T-3 탱크가 미아리고개를 넘어 올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국군과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에서 격전을 벌였을 때 대전차포가 없는 우리 국군은 화 염병과 함께 전보선대를 가로로 짤라서 탱크를 못 오게 막으려던 우리 국군들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노인 C: 저도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북으로 납치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며칠 동안 끌려 갔는데 그 인원이 8만 명이 넘었데요. 그런데 왜 북한군이 남한의 각계 요인들을 납치해 갔을까요? 노인 A: 저도 그게 이상해서 그에 관한 책을 읽어 봤더니 김일성이 북한에 세운 사회주의 체제를 확 립하기 위해서 북한 국민의 사유지를 모두 몰수하였데요. 이에 반대하는 지식인, 지도 층은 모두 숙청해 버렸고. 지식인 300만 여명이 북을 버리고 남한으로 월남하였다지요. 그래서 북한에는 각계각층의 인재들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노인 C: 그것도 그렇지만 납북인사들에게 자진 월북한 것이라고,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허위 선전하기 위해서였답니다. ( FO FI)
S#6 : 휴전 기념일 다시 돈암동 어느 가정
손녀: (신문을 보고 계신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 오냐. 오늘은 무슨 날인지 아니?
손녀: 휴전 기념일요.
할아버지: 달력에도 없던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니?
손녀: 우리학교 사회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 주셨거든요. 내일이 휴전기념일이라고 휴전에 대하여 알아 오라고,
할아버지: 고마운 선생님도 다 계시구나. 오늘 7월 27일은 휴전 협정 60주년을 맞는 날 이란다.
손녀:(손가락으로 계산하며) 2013년에서 60을 빼면 휴전이 1953년에 휴전이 되었군요. 할아버지는 그때 몇 학년이셨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단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휴전을 반대했어. 휴전하 면6.25에 그 많은 희생이 물거품이 되 버린다고,
그 무렵에 공산당 중립국감시요원인 체코와 폴랜드 대표들이 월미도에 머물러 있을 때였지. 그 월미도 제방 입구에서 할아버지도 전국에서 모여 든 학생들과 함께 데모를 했어. 판문점에 한국대표 대신 UN군 대표가 있는 것은 그 때문야.
할아버질 따라 해봐. 그때 그 구호를.
(손녀와 함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뒤로 흔들며 할아버지가 선창하며 손녀와 함께 복창한다.)
“체코 폴란드 대표안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대한민국은 휴전을 반대한다. 반대한다.”
그런데 북한은 이 날을 전승 기념일(戰勝記念日)이라고 크게 기념하는 모양이더라.
너 지난 6.25 날에 남침의 뜻을 분명히 알았지? 한 번 더 예기해 봐. ‘남침(南侵)이란?’
손녀: ‘남침(南侵)이란 북한군이 남한을 침범한 것’
할아버지: 그걸 친구들에게 어떻게 말하면 쉽게 이해할까?
손녀: 남침, 북침(南侵)은" XX를 XX한다." 이니까 목적어와 서술어 관계라고요.
할아버지:'그렇지. 한별이는 할아버지의 자랑스런 손녀였구나!
할아버지가 오늘은 북한군이 남침(南侵)한 그 증거를 자세히 이야기 해 줄께.
(손녀가 노트를 갖고 와서 필기 준비를 한다.)
(T-34 탱크와 전쟁 무기 비교 그림과 월남 귀순한 북 미그기, 땅굴 등을 배경으로) 전쟁이란 국가나 민족끼리 무력(無力)을 써서 싸우는 거야. 이때 전쟁을 도발하는 측은 적보다 3배 이상의 군사력이나 무력이 있는 쪽에서 일으키는 거구. 임진왜란 때만해도 우리들은 창과 칼로 무장했을 때 왜놈들은 조총(鳥銃)이란 무기를 갖고 쳐들어 왔거든.6. 25때도 그랬어. (배경화면과 함께 이하 숫자는 자막으로)지금과 마찬 가지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공군력이었지. 그때 북한군의 전투기나 폭격기가 168대였는데 아군은 훈련기 10여대뿐이었어. 육군의 최강 무기라는 탱크가 인민군은 272대였는데 우리 국군은 한 대도 없는 것은 고사하고 그 탱크를 쏘아 부술 대전차포가 한 대도 없었어. 그보다 북한군은 18만 4천여명으로 남한 9만 8천보다 2배였단다. 그뿐이 아니엇어. 6.25가 마침 일요일이어서 그날 국군의 절반이 넘게 외출이나 휴가를 나갔는데 어디 우리가 북침할 수 있었겠니?할아버지가 KCCA모임 따라 제2 땅굴과 제3 땅굴을 다녀왔는데 현재 발견된 땅굴만도24개가 더 있더라. 이것도 분명히 남침을 위한 것인데 그 땅굴도 북한은 대한민국이 팠다 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어. 휴전 이후에 북한의 대남 도발이 얼만 줄 아니? 10여만 건이나 되는데 이 모두 북한이 도발하여 저지른 전쟁 범죄란다.)
할아버지: 한별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우리나라가 공산화 되는 것을 막으려고 세계 여러 나라가 우릴 도왔어. 군대를 파병해준 고마운 나라만도 16개국이야.
(알링턴 국립묘지 배경으로) (그 중에 가장 많이 도와준 나라가 미군이야.할아버지 할머니가 미국동부 여행을 하면서 워싱톤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가봤더니 거기 동판에 쓰여 있는 글이 있어 그걸 보고 울었단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우리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쳐 싸운 우리의 아들 딸들의 명예를 기린다.) 그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전사가 3만7천, 부상 10만, 행방불명 8천이나 되었어. 그때 미군 장성들 의 아들이 142명이나 한국전에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단다.그뿐이 아냐. 전쟁 후 전국토가 잿더미가 된 우리나라에게 원조물자를 보내 주고, 전후복구와 경 제개발을 도와준 나라가 미국이었단다.)
손녀: 이상하네요. 우리 학교 선생님 중에 6,25는 당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이 전쟁광 멕아더를 시켜서 일으킨 전쟁이라고하시던데. 그럼 그 선생은 빨갱인가 보죠?
할아버지: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냐. 그분들도 우리나라 국민이니까. 그래서 요즘에는 ‘빨갱이’란 말을 쓰지 않고 그런 사람들을 ‘종북주의자(從北主義者’)라고 하지.
손녀: (혼잣말로) 우리 할아버지는 움직이는 사전이셔.
할아버지: 요번 토요일에 할아버지는 KCCA 모임 따라 삼각지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가기로 했는데. 한별아 너도 함께 갈래?
손녀: KCCA가 뭐하는 모임인데요?
할아버지: ‘한국콘텐츠 창작가 협회’라는 시니어 즉 노인들의 모임인데 비디오 클럽 일종이다. 거기서 할아버지는 동영상을 제작 편집하는공부를 하고 있지.
손녀: 동영상이 무엇인데요?
할아버지: 동영상(動映像)이란 움직이는 사진으로, 정지 사진을 움직이는 사진으로 바꾸어 주거나, 켐코더로 촬영한 움직이는 사진을 제작 편집하는 것을 배우고 활동하는 모임이지.
한별: 거기 할아버지는 디지털 할아버지들인가 봐. KCCA 모임 따라 저도 전쟁 기념관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그날이 노는 토요일이거든요.
S# 7. 전쟁기념관 가는 길
(‘울고 넘는 삼각지’ 배경음악으로 카메라가 KCCA 회원 따라 4호선 삼각지역 내 '배호 기념 코너'를 지나 6. 25의 노래 배경으로) 전쟁기념관을 들어서 전쟁기념관 마당의 각종 조각을 구경하다가 ‘전쟁과 평화의 쌍동이시계탑’에 서면 참전용사 같이 훈장을 단 한 노인의 소리가 들려온다.)
한 노인: (남 들으라는 듯이 말한다.) 저 시계가 '6: 25 : 4'에 멈춰 있는 것은 북한군이 남침한 시 각야. 암침의 시각..
‘
S# 8. 전쟁 전사자 비명 앞
(KCCA 회원이 전쟁 전사자 비명 앞에 헌화하며 묵념하는데 폭격소리 전투 소리가 어울린다.
그 중 한 노인이 그 비명 중에 자기 부모의 이름을 찾다가 발견하고 오열하며 흐느끼며 절하고 있다.)
한 노인: 아버지. 아버지!
S#9: 전쟁 기념관 6.25 관계 영화
KCCA 회원들 전쟁기념관 내 6.25 장면 이미지 앞에서 해설사의 설령을 듣고 있다.
(자료화면 순서대로) 6.25 남침 준비- 병력비교 등등.
S#10: 미아리 고개
(학살 이미지와 평화로운 미아리 고개 차량행렬을 대조시키며 할아버지의 나레이션)6.25는 소련의 지원 하에 전차와 야크전투기, 야포 등으로 중무장하고 미아리고개를 넘어 남침했으니 남침 초기의 6.25 한국전쟁이란 준비된 북한군과 준비 안 된 우리 국군과 싸우는 일방적인 불행한 싸움이었어. 그러다 UN군의 개입과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 작전 성공은 수세에서 공격의 계기가 되어 38선까지 북진하게 되었지.그런데 말야, 당시 UN군의 파병 목적은 38선까지 북진하여서 휴전하고 38선을 지키자는 것이었어.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 전군에게 명령했단다."내가 이 나라 최고 군총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을 따르라. 38선을 넘어 북진하라, 북진하라."그 명령에 따라 국군 제3보병사단 제35연대가 강원도 양구에서 38선을 돌파하여 진격했어. 그날이 1950년 10월 1일이라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지.)
손녀: (화면 밖에서) 아아, 그래서 국군의 날을 10월 1일로 정한 것이였군요.
할아버지: 그후 평양, 원산을 진격하여 중국과 국경인 초산진에서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았단다.
손녀:(혼잣말로) 어마, 그래서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었구나. 그렇다면 그때 우리는 통일을 할 수가 있었네요.
할아버지: 그럴 수 있었지. 그런데 중국의 모택동과 북한의 김일성 간에는 그 전부터 약속 이 되어 있었어. 6.25에 미군이 참전하면 중공군도 도와 준다구.
그래서 중공군 정예군 5만 명이 쳐들어 온 거야. 그 5만명은 당시 북한군 전체의 1/3 이나 되는 인원으로 중공군 중에서도 정예 병력이었데.
그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꾕가리와 피리를 불며 미아리고개를 통하여 또 서울로 쳐들어 온 거야.
그래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서둘러 피난을 떠난 것이 1.4 후퇴였지. 그 때 서울에 남아 있는 서울 시민이 겨우 20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는구나.
UN군이 아니더면 적화통일이 될 뻔했던 것처럼, 중공군이 아니면 북진통일이 될 뻔 한 것이 6.25였단다.
S#11. 6. 25의 피해
(배경에 피난 길, 피난살이, 학살 현장 등이 전개 되면서)
(6. 25는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룰 주었어.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동안우리측의 인명 피해만도 사상자 수가 약 150만, 20만명이 행방 불명, 25만이 부상, 10만명의 납북은 물론 전쟁 과부, 고아, 전국민의 피난살이와 전국토는 재기 불능의 초토화가 되었단다.이런 전쟁은 다시 또 없어야 하는데 북한은 한술 더 떠서 핵무기로 우리를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이를 어쩐단 말이냐?)
할아버지: 한별아. 네 장래 희망이 뭐냐?
손녀 :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통일과 평화와 행복을 노래하는.
할아버지: 꼭 그렇게 되거라. 네 소원이 이루어 진다면 언제고 이 할아비 부탁 하나 들어 다오.
‘통일를 염원해 쓴 할아버지 시(詩)의 작곡가가 한별이가 되어다오. 작곡가가.“
(한별과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배경으로 자막이 흐른다.)
백두대간(白頭大幹) 허리 끊겨 제 각각 한(恨) 세월(歲月)
흘깃흘깃 혈육(血肉)으로 따로따로 반 백년반(반百年)
언제나 저 산하(山河) 이 산하(山河) 되어 우리 함께 살아볼까.
그리움이 북향(北向)하다 천지(天池)에 고이었고
서러움이 남향(南向)하다 백록담(白鹿潭)에 담기었다
언제나 천지(天池), 백록담(白鹿潭)에 기쁜 눈물 더해 볼까
-우리의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