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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北岳山] 산행/서울의 내사산(內四山)

ilman 2023. 3. 27. 18:24
 : 2007-05-23 18:12
 
 
  
 (2007. 5. 23/창의문-돌고래쉼터-백악마루-청운대-곡장-촛대바위-숙정문-말바위전망대-와룡공원 총 4.3km/ 동내 어른과)



*. 북악산에 대한 그리움


북악과 삼각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있는 것을 보가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 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光化門)에서 북악산(北岳山)을 바라 보면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처럼 북한산(北漢山)은 북악(北岳)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보인다. 대학 시절 혜화동에 살 때 성터 따라서 숙정문(肅靖門)까지 갔다가 군인의 제재를 받고 더 이상 못 갔던 곳을 오늘 우리 동네 하 형(河兄)과 함께 가고 있다.
 요번에 개방된 출발지는 세[ 곳이다. 와룡동(臥龍洞) 말바위 쉼터 코스 (안국역에서 마을버스 2번), 홍령사 쉼터 코스(북악터널을 바로 지나 있음), 창의문(彰義門)쉼터 코스(최규식 경무관 동상이 있는 자하문)가 그것이다. .
우리는 '창의문 코스'로 가지만 이 코스는 몹시 가파르고 힘든 코스여서 평소 등산을 잘 하지 않은 분이거나 노약자 또는 어린이는 '말바위 쉼터'나 '홍련사 쉼터 코스'를 문화재청에서는 권하고 있다.
*. 창의문 (彰義門) 이야기
 

  내가 오르는 창의문(彰義門)은 서대문과 북대문[肅靖門] 사이에 있는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義]을 드러나게[彰] 하자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이 문은 '창의문'이나 '북소문'이란 이름보다는 '자하문(紫霞門)'으로 널리 알려진 문이다. 이 근처의 계곡 이름이 '자하계(紫霞溪)'였기 때문이다. 이 문은 '사소문(四小門) ' 중에 유일하게 옛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문으로도 유명하다.
  '창의문'에서 자세히 보아야 할 곳은 두 군데가 있다. 그 하나가 '무지개문'의 상단에 그려 있는 '봉황 한 쌍'의 그림이다. 속설에 의하면 창의문 밖의 지형(地形)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 모양의 봉황을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문루 밖 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이다. 누혈은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만든 것인데 연잎 모양의 조각 모습이 참 멋지다. 이렇게 빗물 하나에도 우리의 선인들은 실용적인 것에 멋을 더하였다.

*. 서울 성곽(城郭) 관람
서울 성곽 관람은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그 층계가 작으만치 850에서 875개에 달하는 가파른 층계로 총 거리가 4.3km의 오름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을 2시간 정도에 마치는 일정이어서 충분히 쉴 시간은 거의 없다. 그래서 쉼터가 있는데 그 쉼터는 전망대를 겸한 곳이었다.
  사진 촬영은 많은 제약이 있으리라 생각되었는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군시설은 국민으로서 찍어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몇을 제하고는 그 시설도 많지가 않았다.
 북악산 관람은 '창의문' 우측으로 난 나무 계단을 오르면 거기 '창의문 쉼터'가 있고 거기의 출입관리소에서 인터넷으로 접수한 사람 50명, 거기서 직접 접수하는 사람 중 선착순으로 50명이 주민등록으로 신분을 확인하고 주는 패찰을 목게 걸고 해설 안내원과 안전요원의 안내를 받으며 산행을 하게 된다.
이 산행은 곳곳에 있는 쉼터별로 잠깐씩 쉬어가며 해설을 듣곤하였다.

*.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 이야기
  우리가 오르는 창의문 오르는 초입에 있는 안내판의 이름이 '북악산 서울성곽' 관람안내다.
서울의 사방에는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요새가 되는 '내사산(內四山)'이 있다.
 낙산(東), 인왕산(西), 남산(南), 북악산(北)이 그것이다.
  이 내사산(內四山)을 외사산(外四山)인 용마산(東), 덕양산(행주산성)(西), 관악산(南), 북한산(北)이 밖으로 또 둘러싸고 있다.
게다가 한강은 동서(東西)로 흐르고, 청계천은 그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흘러서 서울은 원래부터 여름철 한강의 범람에서 안전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창의문 앞에 이런 석비가 있다.
'청계천 발원지: 이 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양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흐르고 있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다.'

  이 태조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무렵 한양의 인구는 약 1만 명이었다. 태조는 태조 4년에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짓고, 한양(漢陽) 방위를 위하여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의 성곽을 쌓고, 그 드나드는 문으로 사대문(四大門)과 그 사이에 사소문(四小門)을 지었다.


-사대문(四大門)
동: 흥인지문(興仁之門), 일명 동대문. 보물 1호
서: 돈의문(敦義門, 일명 서대문) 지금의 신문로에 언덕에 있었으나 1915년에 헐어 없어졌다.
남: 숭례문(崇禮門): 일명 남대문. 국보1호
북: 숙정문(肅靖門) 일명 숙청문(肅淸門), 북대문
-사소문(四小門)
동북: 광희문(광희문)
서남: 소의문(소의문)
동남: 창의문(창의문)
서북: 혜화문(혜화문)

*.' 서울'의 어원에 관한 이야기
  조선 태조 당시에는 서울을 한양(漢陽)이라 불렀다.
-漢陽(햔양)의 '漢'은 '한강'이란 뜻이요,' 陽'은 '水之北曰陽'(물의 북쪽을 '陽이라 함')이라 하여 생긴 말이다.
'서울'이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이 전하여 온다.  

- 조선 초, 태조가 이 성을 쌓을 때. 성 둘레를 어떤 범위로 삼아 성을 쌓야 하나를 크게 고민할 때였다. 어느 날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낮에 보니 안쪽만 녹아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눈이 안에만 내렸다는 설도 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정하여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눈의 경계 따라 성을 쌓도록 정인지에게 명하였다. 그래서 이 서울의 성곽을 ‘눈성’ 또는 ‘설성(雪城)’이라 하였다.
-서울을 '서울'이라고 하게 된 것은 위 이야기처럼 '雪'(설)로 '울'타리를 하여 주었다 하여 '설울'이라 하였는데, '불삽-부삽, 솔나무- 소나무, 불나비-부나비'처럼 우리말에서 두 낱말사이의 'ㄹ'이 탈락하는 '음운탈락현상'에 따라  '설울-서울'이 되었다는 것이다.

*. 북악산 쉼터 이야기
  북악산 등반은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이요 그러다 보니 자주 자주 쉬어야 했다. 그래서 도중 도중에 쾌적한 쉼터를 마련해 놓았다. 등반 중 제일 처음 만난 쉼터가 '돌고래 쉼터였다.
이름을 '돌고래 쉼터'라고 하는 것은 그 쉼터 우측 소나무 밑에 돌고래를 닮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백악산 산행에서는 정상을 처음 볼 수 있다는 설레임도 있지만 오르다 보게 되는 북한산의 절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르는 곳은 백악산의 뒤이어서 우측 보현봉에서 시작되어 독바위에 이르는 서울을 빙둘러싸고 흐르고 있는 북한산 능선의 찬란한 파노라마가 전개되고 있었다. 삼각산이라고 하는 인수봉 백운대와 국망봉은 보이지 않았다. 북한산 뿐만 아니라 인왕산이 북악산 성터와 함께 고즈넉한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 백악마루터 쉼이야기
백악마루에 오르니 이런 생각이 난다. '오래 살았더니 별꼴 다 보겠네'가 아니라 '오래 살았더니 백악산도 다 오르는구나!'
그동안 내 나름대로 서울의 외사산(外四山)과 내사산(內四山)을 정리하였는데 오직 북악산만 쓰지 못하고 있다가 드디어 백악산에 오르니 감회가 남다르다.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고맙게도 읊어 준 시인이 있다. xxx 시인었다.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모스크바에도 없는 山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요 산이 중요인 나라에
오늘
싱싱한 산 한 재가
방금 채색한 각황전(覺皇殿)처럼
사월 초순 첫 초록 재치고
솟아올랐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가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금지딘 빗금을 넘어 그대가
사람 만나러 내려 올 때
솟아난 것은 한낱 돌덩어리가 아닌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이었구나.

이렇게 풀어 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홍련사에서 숙정문 지나
창의문에 이른 길 따라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아무나 그 문들을 활짝 열어
그대 슬하에 감추인 칼바위며 촛대바위를
순우리말로 되찾아 오네.
-풍경 뻬레스트로이까 ‘북악산 개방에 부쳐’에서


백악마루는 시야를 막는 잡목 하나도 없이 사방이 시원하게 뚫린 약간은널직한 곳이었다.
서쪽 끝에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는 바위가 있고 남산을 향한 곳에 '백악산 342m'라는 정상석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다음과 같은 비석이 서 있다.

-이 곳은 북한군의 공중 위협으로부터 청와대를 방호하기 위해 1979. 10. 15일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진지를 설치 운용한 자리며 2000년 9월 9일 보다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이 곳 북악산을 우리가 살고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영원한 삶터로 가꾸기 위해 옛모습으로 복원하다,
민족과 함께 영원히 살아 숨쉬길 기원하며   -2001년 새아침, 

*. 1. 21소나무
곡장 쉼터를 향하는 길에 사람들이 한 소나무 앞에 모여서 무언가를 보고 있다.
뭘까? 1.21소나무였다.
소나무에는 총알로 깊숙하게 패인 자국이 있고 그런 곳마다 주위에 흰 페인트로 둥글게 표시를 하여놓았다.
1968년 1월 17일 북괴군 124군 부대의 김신조 외 30명이 그들 말대로 '청와대를 까러 왔다'가 아까 우리가 올라온 자하문에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도망가는 공비들과 교전을 벌인 곳 같다.
그 잠입한 사건 때문에 지금까지 38년 동안 일반인 출입 금지지역으로 묶여 있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배려로 그 일부나마 국민에게 개방된 것이다. 노 대통령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처음 대통령이 되고서 제일 기분이 좋았던 것 중의 하나가 북악산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혼자 누리는 게 은근히 기분도 좋고 특권을 누리는 것 같아 좋아했는데 나중 몇 번 더 와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자’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작년에는 '홍련사 입구- 숙정문-촛대 바위'까지만이더니 금년 4월에 전면 개방을 하여서 벼르다가 이제야 찾아 온 것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의 약속대로 개방된 코스에서 하루를 보낼 수는 없지만 그 약속은 지킨 셈이었다.
성을 끼고 오르내리다 성벽을 유심히 보면 성벽 돌 중에 한자로 쓴 바위에 글씨가 보인다. 처음 성을 쌓을 때 천자문의 천지현황(天支玄黃) 순으로 공사 구역표시 등을 써놓은 글이다.

*. 성벽(城壁)에 대한 이야기

 


서울의 성벽은 태조 때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수축하기 시작하여 세종과 숙종을 거치면서 완성한 것이다.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길이 18.2km를 평지는 토성(土城)으로, 산지는 석성(石城)으로 260년간 쌓은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41만 9천 600여 명이 동원 된 대역사였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10.5km만 남게 된 것은 1899년 전차 개설로 동대문과 서대문 구역, 남대문, 혜화동 등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 되었기 때문이다.
  성곽 축조 방식을 보면 어느 때에 쌓은 것인가가 분명히 들어난다.
큰 메주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은 것이 태조 때 성벽이요, 장방형의 돌을 기본하되 사이사이 잔돌을 섞어 쌓은 것은 세종 때 쌓은 성벽이다. 그보다 크게 정사각형으로 장정 4명이 들 수 있는 무게의 크기로 규격화하여 튼튼히 쌓은 것은 숙종 때 쌓은 성벽이다.(그림 참조)
  성벽 위의 담장을 '여장(女墻) '또는 '성가퀴'라 한다. 성(城)이란 아군의 몸을 가리면서 적을 총이나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총격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이다. 1개의 여장을 1타라 부르는데 1타에는 3개의 총쏘는 구멍이 있다.
가까운 곳을 쏘는 곳을 아래로 비스듬한 근총안(近銃眼) 하나가 있고 그 양쪽에 먼 데를 겨냥하는 수평으로 된 원총안(遠銃眼)이 각각 1군데씩 있다.

*. 곡장(曲墻) 이야기
 
성을 쌓을 때 성벽에 바싹 다가붙은 적을 공격하는 시설로 '성우(城隅)'와 '곡성(曲城)'과 '치성(雉城)'이 있다.
이 세 가지 성은 모두 성벽보다 바깥으로 내쌓은 것이다.  성의 네 모퉁이를 성우(城隅)'라 하고, 돌출한 모양이 반원이면 곡성, 네모꼴이면 치성으로  모두 성벽에 붙은 적을 사각(斜角)으로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런데 백악산의 곡장은 여장과 함께 친절하게 그림까지 그려 설명하고 있는데 그게 잘못된 것 같다. 곡성과 치성은 분명히 다른 모양인데 뭉뚱그려서 치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더 분명한 고증으로 바로 잡아야 하겠다.

 
 
*. 해태바위


정상에서 내려오다 보면 백악산 중간 쯤 백악산 중턱에 둥근바위가 있다. 해태바위였다.
'해태'란 시비선악을 안다는 상상적인 동물이다. 경복궁의 광화문 문밖 양쪽에도 있고, 경복궁 근정정 처마 마루에도 있는데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생각하는 상상적인 동물이다.
서울의 외사산 중에 관악산 정상에 올라가 보면 활활 타는 불꽃 모양의 바위가 많다. 그래서 관악산이 불산이라 하여 화재를 두려워 하던 사람이 그 불을 막기 위해서도 세웠는데 그래서 저 해태바위도 궁중의 화재를 막아주는 해태바위라 한 것이다.
이 해태는 머리 위에 뿔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서로 싸울 때 의롭지 못한 이나 옳지않은 사람이 있으면 이 뿔로 받아 버리는 '정의의 사도'라 한다.

*. 촛대바위에서
  촛대바위 전망대로 오기 전에 멀리서 본 촛대바위는 그 아래가 20m를 넘게 보이더니 정작 촛대바위 전망대에 와서 보니 그 바위 뒤통수만 보인다.
작년 8월에 촛대바위까지만 북악산이 개방 되었을 때 나와 동갑이었던 친절한 안내원의 설명이 기억난다.

-지금 우리는 촛대 바위보다 높은 위치에서 촛대바위 뒤통수만을 보고 있어 평범한 바위 같지만 밑으로 내려가서 보면 13m나 되는 촛대 모양의 우람한 바위지요.
저기 보이는 삼각점 같은 것은 측량 표지가 아닙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 강점기에 왜놈들이 조선의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서 쇠말뚝을 박은 자리에서 쇠말뚝을 뽑고 저렇게 표시한 자리입니다.
이곳 북악산은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김신조 등 124군 부대가 침투한 직후부터 일반인이 출입금지 지역이라서 이곳은 휴전선과 같이 서울 한복판에 자연 생태계가 고스란히 보전 된 곳입니다. 지금은 1차 계발계획으로 단순하지만, 2차, 3차까지 진행되면 북악산 관람은 더욱 다양해 질 것이고, 그때에는 양적인 성장 발전만 거듭해온 우리나라가 청계천, 한강 등의 역사 유적과 함께 북악산도 선인들의 얼을 찾아볼 수 있는 곳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대바위 바로 그 아래 30여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남산[木覓山]을 중심으로 한 서울 시내가 한눈으로 들어오는 곳이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에 올라 서울을 조망하는 것처럼 감개가 무량하다.
옛날 이태조가 서울로 천도할 때는 인구 1만 명, 숙종 때에는 인구 10 만 명이었다는 한양이, 이제는 인구 1천만을 뛰어넘는 세계 10대 도시 중의 하나가 된 서울을 우리는 굽어보고 있다.

*. 북대문 숙정문(肅靖門)


  서울 사람들도 남대문, 동대문이나 지금은 없어진 서대문까지는 알아도 북대문이 '숙정문(肅靖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태조4년에 건립하였을 당시에도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었고, 문을 나서면 북악산이 가로 막아 있고 성북동 골짜기로 오르내리는 문이라서, 북대문인 숙정문보다 동소문(현 혜화문)을 통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였다.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학적으로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북악산의 양 팔에 해당하므로 동령에 해당하는 숙정문과 서령에 해당하는 창의문(지금의 자하문)에는 문을 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팔에다가 문을 어떻게 낼 수 있느냐 해서였다.
그래서 예로부터 두 문을 폐쇄하고 그 앞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던 문이 숙정문(肅靖門)'이다.
  숙정문이 열릴 때도 있었다. 가뭄이 심할 때나 홍수가 있을 때였다.
음양5행설에 의하면 남(南)은 양(陽)이요, 북(北)은 음(陰)이다. 맑은 날은 양(陽)이요, 비 오는 날은 음(陰)이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음기(陰氣)가 많은 숙정문을 열고, 양기(陽氣)가 많은 숭례문은 닫은 가운데 숭례문[남대문]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반면에 금년처럼 비가 많이 올 때에는 숭례문[남대문]은 열고 숙정문[북대문]을 닫고 숙정문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이처럼 숙정문 지역은 음기가 강한 곳이어서 이를 두고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동국세시기(홍석모)에 이런 말이 나온다.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 수 있다.(홍석모의 '동국세시기')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 두게 하였다.(이규경의 '五洲衍文長箋散稿')
-음(陰)에 해당하는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 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있다.

  이와 같이 숙정문은 항상 닫혀 있는 문이라서, 세상 사람들은 창의문(彰義門, 紫霞門)을 흔히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숙정문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곳이 있다. 창의문에서 보던 빗물을 내려 가게 하던 한 쌍의 누혈(漏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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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바위 전망대
  말바위 전망대란 성균관대학 후문 뒤에 있는데 서울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거기에 있는 바위의 모습이 위치에 따라 말같이 보인다 해서 그것을 '말바위전망대'라 한 것이다.
거기서 직진하면 삼청공원이요 로타리식으로 만든 멋진 나무 층계를 따라 돌아 성터를 우측에 끼고 내려가면 성대 후문이 나온다.
거기서 마을버스 2번을 타면 안국역 쪽으로 빠지고, 좌측으로 가면 성북동 구 보성고등학교(현 서울과학고등학교) 쪽이 나온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안국동 가는 2번 마을 버스가 오고 있었다.
                                                                                                                - 2023. 봄 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