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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鷄龍山) 산행기/지명 따라, 전설 따라

ilman 2023. 3. 18. 21:52

*1. 원점회귀형(原點回歸形) 산행
  동네 산악회 따라 산행에 나서는 것은 동네서 함께 떠나서 동네로 함께 돌아와 주는 편리성에다가 동호인끼리의 모임회라서  저렴한 비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편한 만큼 불편한 점도 많다.
나이 지긋한 분들과 평일에 떠나는 산행 길이어서, 명목은 산행이라지만 사찰 구경이나 계곡에서 노니는 것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데다가 거기에 한 수 더 떠서, 목적지를 오가는 도중에 버스에서 뛰놀고 싶은 아녀자들이 많다 보니, 나같이 종주에 욕심을 내는 이도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원점회귀형(原點回歸形) 산행으로 끝나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전문 산악회 산꾼들을 따라가고도 싶지만 내 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처지라, 버스 타고 오가면서 애로도, 후회도 많았지만 그래도 '집에 그냥 있는 것보다는 낫지-' 하고 따라나서게 된다.
그래서 오늘도 벼르던 계룡산 산행을 '신원사-연천봉'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올라간 길로 아깝게도 되 내려온 것이다.

  계룡산(鷄龍山)은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대표하는 산으로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던 산이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오악(五岳: 동의 토함산, 남의 지리산, 북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 중의 서악(西岳) 계룡산으로, 조선 시대에는 삼악(三岳: 묘향산, 계룡산, 지리산)으로도, 오악(五岳: 東岳/ 금강산, 西岳/ 구월산, 南嶽/ 지리산, 北岳/: 北岳) 중 중악(中岳) 계룡산으로도 불린 명산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풍수지리학상으로도 정감록(鄭鑑錄)에서 말하는 큰 변란도 피할 수 있는 소위 십승지(十勝地)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던 곳이었다.
 높이가 가장 높다는 천황봉(天皇峯)이 845.1m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백제문화의 유적과 사찰, 이 태조의 개국의 꿈이 서린 곳이다. 역사관광 또는 자연관광지로서도 그러하지만 기암절벽과 바위산, 깊은 계곡과 폭포, 아름다운 숲이 있어 국립공원 산 중에서 월악산 다음으로 작으면서도, 계룡산(鷄龍山)은 지리산에 이어 설악산 한라산을 제치고 두 번째로 국립공원에 지정된 명산이다.
  계룡산 4대 사찰로는 동에 동학사(東鶴寺), 서에 갑사(甲寺), 남에 신원사(新元寺), 북에 구룡사(九龍寺)가 있었는데, 구룡사는 절 터만 남아 있다. 30년 전 젊어서 왔었던 동학사에서 갑사까지처럼, 오늘 이른 봄에 찾는 신원사 계곡은 계룡8경에는 들지는 못하지만, 교통 천국인 우리나라에서도 교통이 불편하여 좀처럼 찾기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인가 연천봉 이르는 길(2.9km/1시간 20분)은 한산하였지만 가파른 돌길 너덜겅은 가팔랐고 몹시 지루하고 힘들었다.  신원사를 벗어나자 시원한 계곡 물 소리가 요란하다.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 지난 겨울이라서인가 눈 녹아 흐르는 소리도 그러하지만 눈처럼 하얗게 흐르는 수량도 많았다.
  신원사(新元寺)에서의 산행은 고왕암 입구를 지나 연천봉삼거리를 향하는 계곡길이다.
하류에서는 커다란 너럭바위 위를 흘러내리는 물을 굽어 보는 경치이던데, 산을 올라갈수록 가파른 계곡 따라 흐르는 소리는 바람 한점 없이 맑게 개인 봄 하늘을 상큼하게 울려 주고 있다.
 신원사 계곡길은 능선이 거의 없는 돌길의 오름 길일 뿐 데다가 뒤돌아보는 경치도 없어서 팍팍하여 몇 번이나 그냥 아무 데나 점심하고 내려갈까 보다 하였다.

 도치샘에서 신원사를 들리지 않고 먼저 떠나 갔다가 돌아오는 우리 일행을 만났다.
어디까지 다녀오는 길이냐고 물으니 연천봉(連天峰) 정상을 다녀오는 길이라 한다. 거기 경치가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저 산 뿐이란다. 싱거운 대답이었지만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그렇지, 바다에 가면 바다와 섬뿐이듯이 산에 가면 산 뿐이지 또 무엇이 있겠는가.
 드디어 연천봉삼거리에 도착하였다. 계룡산은 안부(鞍部)가 깊고 봉우리는 거기서 다시 갑짜기 더 가팔라진다.
 갑사와 동학사와 신원사의 갈림길에서니 갑사로 향하는 길은 눈길이 한창인 겨울 산이다. 그래서 계룡산 산행은 여름에는 시원한 갑사 길이 좋듯이 겨울에는 안전한 양지바른 남서쪽의 신원사 계곡 길이 제격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관음봉으로 해서 삼불봉(775m)을 지나 남매탑(570m)으로 해서 동학사로 가고 싶지만, 오늘 산행은 온 길로 되돌아 서야만 하는 원점회귀형 산행이어서 영천봉 정상에서의 전망에 만족해야 했다. 함께 떠나온 산행에서 일행에게 늦는 것보다 더 큰 실례가 있겠는가.
여기서부터는 그 동안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든 돌길 너덜겅을 오른 이유를 탁 트인 전망이 소리 없이 설명해 주고 있다. 정상은 이래서 기를 쓰고 오르게 되는 것이다.

  연천봉 오름 길을 철책 따라 오르니 정상 바로 못 미쳐 '등운암(登雲庵)'이 있고, 구름 같은 흰머리를 달팽이같이 올려 묶은 도사 하나 채소밭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 범속한 모습을 보니 예서 하루 머물면서 계룡산 8경 중 3 경이라는 연천봉 낙조와 일출을, 카메라에 담아보고도 싶지마는 아내와 동행하고 있는지라 그냥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였다.
잔설(殘雪)을 밟으며 연천봉(740m) 정상에 올랐더니 봉우리 전체가 바위산이다. 다른 산과 달리 계룡산팔경 중에 '제3경 연천봉 낙조'라는 설명이 돌 표지판 대신 서있다. 그 설명이 다음과 같다.

  계룡산의 주 능선에서 문필봉에 이어져 내려 돌올하게 솟아오른 연천봉은 해발 740m이다. 갑사계곡과 신원사계곡을 좌우로 하여 천황봉과 쌀개봉, 문필봉, 삼불봉등이 수목에 가리운 옷깃을 제치며, 우뚝 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눈아래 저 멀리에는 상원들과 계룡지, 경천지등이 펼쳐지고, 쾌청의 날씨에는 저 멀리 아득하게 백마강이 은빛으로 번쩍이며, 저녁노을을 물들이며 해지는 모습은 가히 절경으로서 계룡산의 제3경으로 자랑한다.
  연천봉은 계룡산 가장 서쪽에서 홀로 우뚝한 산이라 전망이 일품이었다. 빙둘러 모두가 산인데 시야가 일망무제로 탁 트인 곳에는 계룡지(鷄龍池)가 보이고 바다에 섬처럼 띄엄띄엄 마을과 도시가 떠 있다.

  건너 뛸 정도의 가까운 정자가 보이는 곳이 산꾼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음봉(816m)이고 그 뒤가 문필봉. 그 왼쪽 멀리 보이는 봉우리 셋이 삼불봉(755.5m)이다. 그 뒤로 금잔디고개가 아득하게 보인다.

우측으로 정상에 안테나가 보이는 봉이 지금은 출입금지로 지정된 군사시설보호지역인 계룡산의 주봉이다. 상봉이라고도 불리는 천황봉(845.1m)이 아직 눈에 덮여 정상의 겨울을 말하고 있다.

*2. 지명 따라, 전설 따라
 산 이름을 왜 계룡산(鷄龍山)이라 하였을까?
 -주봉인 천황봉(天皇峰:845m)에서 연천봉(連天峰:739 m)· 삼불봉(三佛峰:755.5m) 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닭의 볏을 닮은 뿔을 가진 용과 같고 그 밑 부분은 용 비늘처럼 보이는 산이라 하여 닭 鷄(계), 용 龍(용), 鷄龍山(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선 초기 신도안(新都內)에 도읍을 정하려고 이 태조와 동행한 무학대사가 이 산의 형국에 대하여 말했다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鷄'(계)에다가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에서 '龍'(용)을 따서 '鷄龍山'(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때 '西岳 계룡산’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계룡산이란 이름은 1천 년 전부터 쓰인 유서 깊은 이름이었음을 알게 하여 준다.
 계룡산에 대표적인 사찰로는 동쪽에 '동학사(東鶴寺)', 북서쪽에 '갑사(甲寺)', 남서쪽에 '신원사(新元寺)'가 있다.

그중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1년 (651년)에 보덕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절이다. 본디는 '신정사(神定寺)', '신원사(神元寺)'라 하다가 조선조 고종 때 '신원사(新元寺)'라 고쳤다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도 전한다. 조선조 건국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성계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 공사를 하고 있는데 "팥거리 할머니"가 있어 "이 성계의 꿈을 장차 임금이 될 꿈이라고 풀어주면서, 이곳은 뒷날 정 씨(鄭氏)가 도읍할 곳이니라 너의 땅이 아니니 너는 한양으로 가거라." 하였다. 이에 공사를 중단하고, 이 성계는 그 노파를 천기가 누설될지 모른다 하여 죽여 버리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그 넋을 달래기 위해 절을 증축하고 풀 '伸(신)' 원통할 寃(원) 伸寃(신원)의 음을 따서 신원사(神元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절을 중건하였다거나, 무학대사의 현몽으로 태조가 신원사 경내에 있는 중악단(中岳壇)에서 산신제를 올렸다는 기록은 이 전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팥거리 할머니는 산신이 되어서 대바위라 불리는 상봉에서 계룡산을 다스리고 이씨(李氏)라고 한다.
연천봉 가는 길에 대나무 숲이 유난히 무성한 곳에 고왕사(古王寺)라는 신원사의 부속 암자가 있다. 660년에 창건되었다는 이 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백제가 망할 때 의자왕이 이곳에 숨었다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붙잡혀 당나라에 갔다 해서 옛 '古(고)', 임금 王(왕), 고왕암(古王庵)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동학사(東鶴寺)는 신라 성덕왕 때 상원조사가 암자로 지은 곳에 회의 스님이 창건하여 상원사(上願寺)라 이름하였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유차달이란 사람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낼 때, 동계사(東鷄祠)를 짓고 절이름을 동학사(東鶴寺)라 하였다. 이 절의 東(동) 쪽에 鶴(학) 모양의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삼불봉(三佛峰)이란 명칭은 동학사나 천황봉에서 멀리 바라다보면 봉우리가 셋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세 부처님 모습 같다 하여 삼불봉(三佛峰)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계룡팔경 중 제2경으로 '삼불봉의 설화(雪花)'는 겨울 계룡산의 자랑이 되는 최고의 경관이어서 붙인 말이다.
  지리산8경 중에 6경에 '관음봉 한운(閒雲)'이 있다.
이것은 관음봉 정상에 있는 관음정(觀音亭)에 누워서 하늘에 떠다니는 하얀 구름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가로운 신선이 누워 구경하는 마음이 든다 하여 생긴 말이다. 이 일대는 계룡산을 대표한다는 절승 동학사 계곡과 신원사 계곡을 앞뒤에 두고 쌀개봉, 문필봉, 연천봉의 아름다움 속에 묻혀 있는 일대의 절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은선폭포라는 이름은 쌀개봉과 관음봉에서 흘러내리는 상류 동학사계곡 물이 20m 이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나, 폭포 앞의 기암절벽이라든지, 우러러 보이는 쌀개봉의 선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옛날 신선이 숨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숨을 '隱'(은), 신선 '仙'(선) 은선폭포(隱仙瀑布)라 한 것이다.

계룡산 겨울산행에서의 백미(白眉)로는 모두들 관음봉에서 삼불봉에 이르는 1.8㎞의 자연성릉 구간을 말한다.
자연성릉(自然城稜)이란 자연히 성곽 능선을 이룬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계속되는 능선 길이 협소하고 아기자기하고 변화무쌍하여 성곽 위를 거니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 2023 봄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