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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德裕山, 1614m) 종주 / 무주구천동(상)

ilman 2023. 3. 27. 10:25

설산(雪山) 덕유산(德裕山, 1614m) 종주(상) / 무주구천동
-2007. 2.13~ 15/삼공매표소-백련사(920m)-향적대피소(1)-향적봉(1614m)-중봉(1,594.3m)-백암봉(m)-무룡산(1,491.9m)- 삿갓재대피소(1)-삿갓봉(1,419m)-월성재(m)-남덕유산(1,507.4m)-영각사(700m) 총 26.7km(11:50)/내 아내의 유랑의 남편과-

*. 꿈꾸던 설산(雪山) 덕유산(德裕山) 종주

  덕유산(德裕山, 1614m)  종주는 '지리산(성삼재나 화엄사~대원사)', '설악산 종주(소공원-대청봉-귀때기청봉-)'와 함께 남한 능선 3대 종주 코스 중의 하나로 산악인들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산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게 되면 꿈꾸게 되는 것이 '종주산행'이요 나아가서 '백두대간 종주(白頭大幹縱走)'가 된다. 그 종주 중에서도 겨울산행 종주는 덕유산(德裕山)을 으뜸으로 친다.
서해 습한 공기를 실은 바람이 호남과 영남을 나누는 장쾌한 능선에 눈보라를 쳐오면 거기 온갖 나무에 설화 만발한 새로운 세상을 연출해 내기 때문이다.  덕유산은 한국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북덕유산'과 '남덕유산'을 통털어 산이 덕이 많고, 품이 크고 넉넉하여 너그러운 산이라,하여 '덕유산(德裕山)'이라 이르는 말이다. 무주구천동을 지나 백련사에서 시작하여 주봉인 향적봉(향적봉,1614m)에서부터 1,000m가 넘는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30여 km나 파도치다가 지리산 가기 전에 1,507.4m의 남덕유산의 동봉(東峰)과 서봉(西峰, 일명 장수봉m)을 일으켜 세운다. 거기서 700여 개의 철계단을 내려가서 영각사(靈覺寺)까지가 장장 26.7km가 덕유산 종주 코스다.

덕유산은 한반도 남부 한복판을 남북으로 능선으로 흐르면서 옛날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을 긋던 산이다. 지금은 영호남을 가르는 경계선으로서 동쪽이 영남지방 산수갑산 거창군이요, 서쪽이 호남의 첩첩산중 오지에 해당하는 무주이다.
정형외과의사는 무릎관절이 1/3이 망가졌으니 이젠 그만 등산을 접으라 한다. 떠나올 때 내과 의사는 요즈음 감기는 무서우니 찬바람을 쐬지 말라 하였다. 아내는 당신이 그렇게 꿈꾸던 '네팔과 인도의 해외여행이 1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그 나이에 엄동설한에 처음하는 '덕유산 종주가 가당치나 한 일'이냐고 한다.
스스로도 걱정은 되지만 이런 만류를 뿌리치고 나선 것이다. 왜그런지 이번이 아니면 설산 덕유산 종주는 영원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가자! 지리산과 설산 설악산을 단독 종주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서파에서 동파까지 '백두산을 종주'한 내가 아닌가' 이런 경험에다가 완벽한 장비와 준비를 하고 동네 산악회 '산속세계'를 따라 나섰다.
준비를 철저히 한다는 것은 짐의 무개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줄여도 줄여도 12kg 이하로 가방 무개를 줄일 수가 없었다. 이는 해가 갈수록 나쁘게만 달라지는 나의 몸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은 오기라 생각한다.
  덕(德)이란 사람의 품성을 말할 때 쓰이는 말이다. 밝고 크고 옳고 빛나고 착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따스하여 바른 길을 행하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말이다. 그것을 산을 두고 말하면서 거기다가 넉넉할 '裕 '(유) 자까지를 더하여 이 산 이름을 덕유산(德裕山)이라 하였다.
덕유산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산 이름으로 가진 것 같이, 산으로서 덕유산은 주능선 17.5km에 1,200m가 넘는 봉우리를 20개 이상이나 거느리고 있는 중후한 산이다.
봄에는 해가 철쭉꽃밭에서 떠서 철쭉꽃밭으로 진다는 철쭉의 산이 되다가, 여름이 오면 원추리꽃이 만발하는 녹음 속에 '구천동33 경'으로 몸과 마음의 더위를 식혀주는 산이다. 가을이 오면 단풍이 손짓하여 우릴 부르는 산 중에 명산이다.

*. 무주구천동 전설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 계곡은 덕유산 '향적봉'에서 시작되어 '나제통문(羅濟通門)'까지 36km에 이르는 계곡이다.

거기서 흐르는 물이 계곡을 깎고 바위를 갈아 만들면서 금강 상류의 지류인 원당천(元唐川)까지 흘러 간다.

그 계곡 따라 '한국의 10경'의 하나라는 '구천동33경'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이란 말이 자못 시적(詩的)이라서 '그 어원에 대한 전설이 없는가?' 찾고 또 찾다가 드디어 '암행어사 박문수 전설' 을 보고 무릎을 쳤다.

-초라한 차림의 박문수 어사가 덕유산 계곡에서 밤이 깊어 인가를 찾아 헤메다가 불이 반짝이는 외딴집 한 채를 발견하고 하룻밤을 유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주인인 듯한 한 노인이 젊은이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지 않는가. 질겁을 한 박 어사는 주인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저는 구(具)재서라는 훈장입니다. 그런데 아랫마을에 사는 천(千)석두라는 부자(父子)의 흉계에 빠져서, 내일 오후에는 아내와 며느리를 뺏기게 되었습니다. 그 천가 놈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네 식구가 함께 죽자고 하던 참이었지요."
박 어사는 구재서를 안심시킨 다음 그 길로 무주현으로 내려가서 네 광대에게 황,청,흑,백 네 가지 색깔의 옷을 입혀 가지고 이 골짜기로 들어왔다. 다음날 구재서의 집으로 가서 천가 놈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사모관대를 한 천석두 부자가 나타나자 누런 털 달린 도끼와 귀신을 그린 깃발을 든 한 괴물이 들이닥치며 초례상을 타악- 치며 저승사자 넷을 불러내더니
"내가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너희를 잡으러 왔으니 저승사자는 저 천석두 두 부자를 잡아가지고 돌아가라."
하니 저승사자가 천가 부자에게 달려 들어 결박 지어 가지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후 박 어사는 천석두 부자를 귀양 보내고 구재서에게 부인과 며느리를 돌려 보내 주었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무주(茂朱)에서 구(具→九)씨와 천(千)씨가 살던 마을(洞)이라 하여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위 이야기는 좀 황당한 얘기 같아서 또 없나 찾아보았더니 백련사(白蓮寺)와 연관된 전설로도 전하여 온다. 사찰 측에서는 신라 흥덕왕 5년에 무염(無染)국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하지만 다음 전설에서는 그 연대가 조금은 차이가 난다.

-신라 신문왕때 백련선사(白蓮禪師)가 이곳에 초암(草庵)에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 자기의 이름과 같은 하얀 연꽃(白蓮)이 솟아 나와 그곳에 절을 짓고, '백련암(白蓮庵)'이라 하였다. 불교 전성기 때에는 14개의 암자가 있을 정도로 사세가 융성하여서 9,000 여명의 승려들이 도를 닦던 곳이어서 '구천동'이라하였다. 그래서 백련사의 이름을 한 때는 '구천동사(九千洞寺)'라 하였다 한다.

내가 따라 온 일산 '산속세계 산악회'의 일정은 무주리조트에서 곤도라를 타고 설천봉에 올라 가서(20분 소요) 향적봉, 중봉 오수자굴(吳秀子窟)로 해서 무주구천동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그래서 나는 종주에 앞서서 구천동 33경을 가능한 하나라도 더 디카에 담으려고 일행과 떨어져서 삼공리 주차장까지 홀로 왔다.

*. 구천동 33경 전설
  덕유산에서 나제통문(羅濟通門)에 이르기까지 약 28km에 걸친 무주구천동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이 빚어 놓은 수림과 기암이 어울린 곳을 이 고장 사람들은 '구천동33경'으로 지정하여 놓고 자랑하고 있다.

  무주구천동에는 13개의 대(臺)와 10개의 소(沼)에다가 폭포와 계곡을 더하여 아름다움이 이루어지지만 이는 다시 둘로 나뉜다. 마음 먹지 않고는 차로 그냥 지나치게 되는 '삼공탐방 주차장'에 이르기까지에 있는 1경 나제통문~ 14경 수경대(水鏡臺)까지 14개 경을 '외구천동(外九千洞)' 이라 하고, 그 주차장 위 15경 월하탄(月下灘)~ 33경 향적봉(香積峰)까지 19개 경을 '내구천동(內九千洞)' 이라 한다.

  '외구천동(外九千洞)'은 볼 수가 없을 것이니 아쉬운 대로 '무주군 홈피'에서 소개하는 그림이나 보면서 뜻글자인 한자로 그 곳 이름을 바꾸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어리짐작으로나마 그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말할 수밖에 없구나.
구천동 계곡을 오른쪽으로 끼고 가다 다리를 넘어서면 계곡은 다시 왼쪽으로 흐르게 되는데 구천동 계곡은 길 따로 계곡 따로가 아니라 계곡이 길과 함께하는 탐방로였다.
다음은 구천동33경 중 선인들의 전설이 어린 곳을 중심으로 알아보려 한다. 우리들도 그 전설 속의 하나가 되어 아름다움을 완상할 수 있을 테니까.

제일 먼저 만난 곳이 조그만 두 개의 폭포가 달밤이면 선녀가 춤을 추는 듯하게 보인다는 15경 월하탄(月下灘 )이었다.
이어 나타나는 16경 인월담(印月潭)은 반석위로 흐르는 작은 폭포수가 소(沼)를 만든 곳으로 수목이 하늘을 가린 구천동에서 하늘을 바라 볼 수 있는 오직 한 곳이란다.
- 인월담(印月潭)은 신라 때 인월화상이 절을 짓고 수도했던 인월암자(印月庵子)가 있던 곳이라 하여 생긴 이름인데 새로 세웠는지- 아치형의 다리 너머에 '인월암' 화살표가 보인다.
덕유산은 산세가 높고 웅장하여 삼국시대부터 산악 요새지로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무렵에는 의병대장 문태서(文泰瑞)가 일본군의 총을 빼앗아 일본군 4명을 사살하여 노획 한 총 4정을 의병의 기본무기로 삼았다.

어느날 구천동 백련암 부근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리다가 의병 10여명이 죽자, 백련암에서 전사자들을 장사 지내주고 돌아 가던 중 사자담 모퉁이에서 일본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의병들은 중과부적(重過不敵)으로 산으로 도주하고, 장군은 인월담 폭포의 안 움푹 들러간 바위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가 후에 왜적을 격파하였다는 호국의 역사적인 장소가 인월담이기도 하다.

17경 사자담(獅子潭)은 소 옆에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거암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옛날 칠봉(사자봉)에 살던 사자가 내려와 목욕을 즐기던 곳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는 곳이다.
19경 비파담(琵琶潭)은 옛날 하늘에서 7선녀가 내려와 비파를 뜯으며 즐겼다는 곳으로 그 모습도 몇 개의 폭포가 모여 이루어진 비파 모양의 큰 소다.
22경 금포탄(琴捕灘)은 바위 사이를 흐르는 여울소리와 무성한 수목에 스치는 바람 소리가 거문고 타는 소리를 낸다는 곳으로 삼공삼탐방지원센터와 백련사의 각각 2.8km의 중간 지점에 있는 여울이다.
23경 호탄암(虎嘆岩)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지금부터 약 3 50년 전의 일이었다. 덕유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산신을 모시고살고 있었다. 어느날 산신의 명으로 지리산으로 특약을 구하러 가던 중 안개가 자욱한 이곳을 뛰어가다가 바위에서 미끄러져서, 소(沼)에 빠진 호랑이(虎)는 100일간 꼼짝 못하고 울부짖으며 탄식만(嘆) 하였다 한다.
25경 안심대(安心臺)는 -김시습의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도망다니며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였던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깊은 산속 이곳에 와서야 마음을 놓아 안심(安心)하게 되었다는 곳이라 한다.
26 경 신양담(新陽潭)은 속칭 '새양골'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옛날 이곳에 신양사(新陽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곳으로 기암과 맑은 담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28경 구천폭포는 폭포가 적은 덕유산에서 만나기 어려운 아담한 작은 2단 폭포이지만 여름철 수량이 많을 때는 3단 폭포가 되는 곳이다.제2경 은구암과 강선대와 같이 천상의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5개의 부도가 있는 것을 보니 백련사가 가까워졌나 보다. 여기가 김시습의 '매월당부도(梅月堂浮屠, 전북도유형문화재 43호)로 25경 안심대 전설과도 연관된 곳이다.

외구천동을 그냥 지나치기 섭섭하니 몇 군데나마 소개한다.
제1경 나제통문은 설천면과 무풍면의 암벽을 높이 3m 길이 10m로 뚫은 문으로, 이름 그대로 신라와 백제 때의 문이 아니고 일본 강압기 시대 이 고장 일대에서 체굴한 금과 농산물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서 뚫었다는 문이다.
제6경 일사대(一士臺)는 구천동 입구에서 약 6km 지점에 있는 일명 '수성대'라고도 일컫는 곳으로 구천동의 3대 경승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 일사대(一士臺)의 '一士(일사)'는 구한말 우국지사며 학자인 송병선의 호 '동방일사(東方一士)'에서 유래된다. 이곳 경치에 혹한 일사 선생이 이곳에 서벽정(捿碧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가르치며 소요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수백 명이 앉아 쉴 수 있는 너럭바위 위에 '인간사를 영원히 버리고 나의 도를 창주에 붙인다'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다.
8경 가의암(可意岩)은 손으로 일일이 마치 다듬어 놓은 듯한 반석이 층을 이룬 위에 맑은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절경이다.
-그 당시 이곳을 탐승하던 노인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 불평들이 많았다. 지나가던 고승이 노인들의 뜻대로 너럭바위를 만들어 편히 쉬게 했다고 하여 가의암(可意岩)이라 했다고 한다.
9경 추월담(秋月潭)은 주위에 암석이 아름다워 소금강(小金剛山)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였다. 김천일 장군의 장인 양도사(楊道士)가 이곳에서 선경 같은 주변 경치 속에 가을밤 물에 잠긴 달의 신비로운 아름다움 속에 취하여 드디어 도(道)를 깨우쳤다 하여 추월담(秋月潭)이라 부르게 되었다.
-14경 수경대(水鏡臺)는 신라 때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수경선생이 소요하였다는 곳이다.

*. 무주구천동에서의 유감

나는 요번 기회에 무주가 자랑하는 구천동33천을 하나라도 더 촬영하기 위하여 구천동에 왔다.
그러나 '내구천동'만은 샅샅이 뒤지고 다니던 내 마음이 왜 이리도 허전한가.
요번에 내가 본 내구천동은 15경부터 32경까지였지만 겨울이라서인가. '아아!' 하고 탄성을 지를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다음은 그 중에 한 구천동33경에 대한 이야기다.
백련사를 향하는 길에 작달막한 폭포 같은 것이 있어서 사진을 찍을까 말까 하다가 보니 구천폭포라는 간판이 보인다. 마침 하산하던 한 여인이 지나가면서 말한다.
. '어마나, 저것도 폭포래!'
아름답다란 됨됨이가 기쁨과 만족한 느낌을 줄 만한 사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물을 보거나 들을 때 좋은 느낌을 가질 만한 사물을 이르는 말이다. 그 아름다움은 누구에게서나 느끼게 되는 공통적인 마음이요, 그것은 일시적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종합적인 판단에서 우러나와야 할 구천동을 무주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구천동33경으로 너무 세분화하여 놓음으로써 그 경치를 스스로 폄하하였다면 지나친 억설일까? 아무리 좋은 말도 많으면 잔소리가 되고, 어느 선생님이 있어 중요하다는 말을 도가 지나치게 쓰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이니 말이다.
구천동 33경으로 나누는 것보다 이를 몇 가지로 축소하여 묶으면 어떨까?

참고 자료/ 구천동 33경 위치
1)라제통문-2.9km-2)은구암-0.5km-3)청금대-1.9km-4)와룡담-인근-5)학소대-0.3km-6)일사대-0.4km-7)함벽소-0.3km-8)가의암-2.0km-9)추월담-0.6km-10)만조탄-1.2km-11)파회-0.4km-12)수심대-1.8km-13)세심대-인근-14)수경대-3.0km-15)월하탄-0.3km-16)인월암-0.2km-17)사자암-0.2km-18)청류동-km- 19)비파담-인근- 20)다연대-0.3km-21)구월담-0.9km-22)금포탄-0.7km-23)호탄암-1.1km-24)청류대-인근-25)안심대-0.2km-26)신양담-0.3km-27)명경담-0.5km-28)구천폭-0.2km-29)백련담-인근-30)연화폭-인근-31)이속대-0.3km-32)백련사-2.5km-33)향적봉

구간별 거리
삼공탐방지원센터-5.6km-백련사(920m)-향적대피소-향적봉(1,614m)-1.0km-중봉(15,94.3m)-1.0km-백암봉(1,480m)-송계3거리-2.2km-동업령(1,320m)-?km-무룡산(1,492m)-2.1km-삿갓골대피소-삿갓봉(1,418m)-2.9km-월성재-1.4km-남덕유산(1,507m)-3.6km-영각탐방지원센터--0.5km-영각사입구(740m)                                 -2023. 봄 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