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캄보디아 여행/ 앙코르톰(2)

ilman 2023. 3. 25. 09:44

앙코르 톰/ 세계 7대 불가사의(4)

해외여행 1순위라는 유럽 여행을 하지 못한 내가, 이번 경비에다가 조금만 보태면 갈 수 있는 서양 문화의 진수라는 유럽 여행을 버리고 왜 하필 이 인도차이나 여행을 택하였을까? 한 마디로 말하여 앙크로왓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을, 라오스를 들러 오게 된 것이다. 

떠나오기 전에 백과사전 등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찾아보았더니, 어느 책에도 앙크로왓이나 앙크로 톰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 있지 않았다.

9세기 15세기에 영화를 누리던 앙코르 제국이 역사 속에서 살아졌다가 세계 불가사의란 말이 생긴 후 19세기 초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앙코르 유적지란 광활한 것이다. 동서 길이만도 20km로 5백 리요 남북 길이만도 10km에 이르는 거대한 것으로 그중 10개의 유적 중에도 '앙코르톰'과 '앙코로왓'이 가장 유명하다.

오늘이 바로 그렇게 기다리던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앙코르 구경하는 날이로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이 앙코르 유적도 경주의 석굴암(石窟庵)처럼 신비 속에 묻혀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어느 날 우체부가 토함산에서 비를 만났다. 산이 무너져 내리는 큰비였다. 비를 그을 곳을 찾던 우체부는 우연히 산이 무너져 내린 어느 한 곳에 전에 보지 못했던 작은 굴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고려와 조선 시대를 뛰어넘어 얼굴을 드러낸 석굴암의 세계였다.

 

  앙코르도 1858년 프랑스의 탐험가며 자연 학자인 헨리 모오(Hani Mouho) 가 400년 간 밀림에 묻혀 있던 것을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그보다 먼저 발견한 선교사들도 있었으나 그들의 말을 유럽 사람들이 거짓이라 지나쳤다.

  그러나 헨리 모오는 귀국하여 이를 프랑스 신문에 기고하고, 기행문을 써서 널리 세계에 이 세계적인 인류의 유산 앙코르의 유적이 있다는 것을 알렸다.

발견 당시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이러하였다.

"저건 저절로 생긴 것을 문둥이 왕(자야바르만 7세)이 고쳐 만들었다. 거기 들어가면 문둥병 왕의 저주가 내려 죽는다.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

그래 그런가, 앙코르를 처음 발견한 앙리 모오는 발굴 다음 해 라오스에서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래 그런가, 나는 앙코르를 다녀와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 피부병은 문둥병처럼 신체의 은밀한 부분까지 쳐들어와서 그 좋아하는 술을 한 달째나 못 마시며 두문불출하고 있다.

앙크로 왓은  발견된 지 일년도 안 되어 세계에서 수십만 관광객이 모여들었고, 지금은 이 한적한 나라, 조용한 시엠리엡에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들이 세계에서 몰려와서 달러를 떨구고 가는 축복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국기, 화폐, 기념품에도, 심지어 술 이름까지 '앙코르 비어'라 하여 앙코르 팔아먹는 것이, 프랑스인이 나폴 레온 팔아먹는 것 못지않았다. 앙코르와트 입장료 하나만으로도 씨엠립엡 시의 전체 재정을 충당할 정도였다.

얼핏 보기에는 앙코르톰이 앙코르와트 보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앙코르톰은 하나의 유적이 전부인 주위의 다른 유적지와 달리, 여러 시대를 걸쳐 만들어진 유적이 모여 한 도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앙코르(Angkor:왕도, 도읍)  (Tom:크다) 은 곧 ‘커다란 도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100만 명이 사는 세계적으로도 큰 도시였다.

앙크로왓의 '그 조각의 미'로서가 아니어도, 앙크로톰 보다 앞선 그 지어진 연대와 함께 앙크로톰은 단일 유적인 앙코르와트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자리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큰 이유 중에 하나였으리라.

  앙코르 여행은 앙코르톰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것은 정문이 동쪽을 향하고 있어 아침 햇살을 받아 시시각각의 모습이 변하는 바이욘(Bayon)사원의 신비로운 4면 탑의 ‘캄보디아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다.

 캄보디아인들은 언제나 웃고 산다. 웃으면서 일어나서, 웃으며  살다가, 웃으며 잠든다. 폴포드 정권을 피해 태국 국경을 넘어가는 피난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때 태국인(泰國人)인가 캄보디아인(Cambodia人)인가를 구별하는 방법의 중의 하나가 손을 비틀어 보아, 아프다고 찡그리기만 하면 태국 사람이요, 찡그리면서도 웃으면 캄보디아 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앙코르톰은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가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광개토대왕에 견줄 만한 이 왕이 12세기말에서 13세기 초 불교 사원으로 지은 바이욘 양식의 건물이다. 이곳은 크메르(Khmer)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로서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당시에 강대국으로 성장한 미얀마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각 변이 12 km에 이르는 정사각형 성벽을 8m 붉은 흙인 라테라이트로 쌓았다. 그 바깥쪽에다가 가로 3 km 세로 4km 폭 10m의 해자를 두르고, 해자 속에는 아주 난폭한 악어를 풀어 적군의 침입을 막으려 하였다 한다.

이 성벽(城壁)은 히말리아의 연봉을, 해자(垓子)는 대양을 상징한다. 이렇게 앙코르톰은 왕권의 신격화를 위한 당시의 우주관에 따라 지은 것이다. 성문은 다섯 개로 각 문 위에는 4개의 얼굴을 가진 '아바로키테스바라'신이 새겨져 있다.
메류 산(Meru)에서 사방을 지배하는 신이다. 힌두교를 신봉하여 힌두교의 신인 '시바'나 '비슈누'와 일체가 되려 했던 다른 왕들과는 달리, 자야바르만 7세는 불교 신자였으므로 그 대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왕을 신과 동일시하여 왕의 위력을 세계에 과시함은 물론 사후에는 그 신과 함께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이욘 사원에 솟아 있는 탑은 54개 중 37개 만 남았는데 이 탑에 드러난 얼굴들은 모두 관세음보살의 얼굴이자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기도 하니, 이는 곧 '캄보디아의 얼굴'인 것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주로 남문을 통하여 들어온다. 남문은 성문 중에 보존이 비교적 가장 잘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남문으로 가는 돌다리는 중생이 사는 사바세계에서 신의 세계와의 연결을 의미한다고 하는 우주관에서 만든 것이다.

머리가 7개인 나가(뱀신) 두 마리를 서로 껴안은 신들이 다리 양쪽으로 쪼그리고 우리를 향해 앉았는데 왼쪽은 54명의 선한 신(善神)이고 오른 편의 54명은 악신(惡神)인 아수라 상이라니, 옛날에 이 나라에도 우리나라와  같이 왼쪽을 숭상하는 사상이 있었나 보다. 아수라가 큰 뱀의 오른쪽을, 신들은 꼬리 쪽을 안고 줄다리기를 하는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둘을 합하면 108명이 되는 것을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108 번뇌에서 해탈하고자 하는 문 같다.

이 강건한 동남아 얼굴인 거인들의 모습은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얼굴이 없어져 시멘트로 새로 만들어 놓은 것도 있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처럼 세월에 찌들어 가는 고색창연한 검푸른 색이 아니고 열대 햇발에 반짝이는 황금빛이었다 한다.

남문은 20m나 높이 솟구치어 우람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고 있는데 문의 꼭대기에는 네 방향의 4면 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이 아발로키테쉬바라 보살(bodhisattva Avalokiteshvara)이다. 메류산(Meru)에서 사방을 지배한다는 신이다. 그 남문 안팎은 모두 코끼리의 상아가 장식되어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 아름드리 숲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것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앙코르톰의 중심 사원 '바이욘(Bayon)' 으로 앙코르 유적지 중에서 불교 사찰로서는 가장 큰 규모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무덤 같이 보이던 것이다. 앙코르와트보다 거의 100년 후에 지어졌는데, 앙코르 유적지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그것은 당시 인구 100만 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 시엠리입에 사는 원주민이 겨우 6만 내외라니 나머지 인구는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이 사원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과 2층은 사각형, 3층은 원형을 이루고 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니까 1층 단의 외부 부조(浮彫)가 보인다. 당시에 목조로 있던 지붕은 물론 사라진 지 오래다.

부조 조각 내용은 '시암족(터키족)과의 전투' 내용이 많았다.

가족과 함께 전쟁터로 향하는 모습, 가다가 밥하는 모습, 물물 교환하는 장면, 빨래하는 모습, 가르치는 장면은 물론 심지어 해산(解産)하는 장면까지 있다. 불교 설화 등과 함께 당시 크메르인의 일상생활 풍속화였다.

2층에서 만나게 되는 석상들에서 특이하게 발견되는 것은 둥근 광배(光背) 대신 나가(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부조는 툭툭 튀어나오는 입체적인 양각(陽刻)으로 앙크로왓(Angkor Wat)보다는 더 깊게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나 예술적으로 보아 그곳보다 떨어진다는 평이다.

3층에서 마주친 장엄한 54개의 탑 앞에 섰을 때의 감격이란-.

너무 많이 알고 가는 것이 감흥을 반감하는 길이라고, 이 여행 떠나기 전에 사전(事前) 연구를 생략하여서, 마음속으로는 사면 석불(四面石佛)이 몇 개 정도이겠거니 생각하였었는데, 사면 불의 거대한 모습이 30여 개가 넘는다. 모두 돌로 쌓은 탑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봉우리 같지만 사람이 쌓은 정교한 탑이었다.

계림(桂林)의 이강에서 보던 봉우리처럼, 하롱베이의 바다에 솟아있는 봉처럼, 여기 불끈 저기 불끈 솟아있는 이 불상들은  한결같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앙코르의 미소'를 띤 각 탑의 사면의 불상은 아발로키테쉬바라 보살의 얼굴과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의 얼굴이 어울려 하나로 조화된 부처의 세계였다.

 세상에 이렇게 큰 봉우리 같은 탑에, 저렇게 큰 얼굴이 그것도 54개나 되는 탑에 200개가 넘는 얼굴상이 조각되어 있다니-.

불교의 나라 라오스에서도, 여기 앙코르에 와서도 보고 놀란 것은, 절에서 하나의 부처를 모시고 있는 우리나라 절과는 달리, 수많은 부처를 함께 모신 것이다.

일체 진리를 자비로운 눈에 품고 응시하고 있는 저 시원한 눈매에, 중후한 코. 막 웃음이 터질 듯한 엷은 미소를 품은 얼굴은 우리들 바로 우리 동양인 얼굴이다.

그 신비로운 친근한 미소 속에 우리는 이것이 앙코르의 진수(眞髓)로구나 하였다. 불가사의(不可思疑)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였다. 디지털카메라와 디지털 캠코더로 무장한 나에게는 다시 더 없는 물실호기의 행복한 순간이라. 찍고 다시 찍고, 돌아 돌며 다시 찍다 보니 어럽쇼 일행이 없다.

 

남문에서 들어와 나갈 문이 4개가 있는데 어디로 간다?

일행은 코끼리 테라스를 향한 동문 쪽에 있었다. 미안해 어쩌지. 허나 어쩌랴 주어진 시간이 30여 분도 안 되는 것에의 아름다운 반란인데. 그때 나보다 더 늦은 비디오 맨이 있어 얼마나 고맙던지.

 

  코끼리테라스(Elephant Terrce)/ 앙코르톰

왕궁으로 가는 길목에 '코끼리테라(Elephant Terrce) 스'라는 곳이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동남아 일대를 평정하던 그들의 전성기에, 보무도 당당히 승전 나팔을 불며 승전고를 울리며 들어오던 개선장군을 맞던 곳이다.

단상 3 개 중 중앙 단상에는 가루다(상상적인 새)가 받치고 있고, 앞쪽 테라스를 오르는 층계 좌우에는 커다란 코끼리 여섯 마리가 좌우로 나누어 서서 이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코끼리테라스다. 사열대처럼 널찍한 곳의 앞에 드넓은 광장이 있어 왕이 중요한 행사나 군인의 사열을 하던 곳이요, 오전 오후 두 번 집무를 보던 곳이다. 물론 이 위에 있던 목조 건물은 세월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코끼리테라스를 내려오다 보니, 함께 간 비디오 맨 정 선생(서울신문사논설위원)이 막 촬영을 끝내고 엄지손으로 기가 막힌 비경

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아, 이럴 수가. 테라스 360m을 빙- 둘러쌓은 5층 돌마다 새겨놓는 부조들. 한 뼘의 공간도 남기지 않고 새겨놓은 불상들, 압살라(천녀)들--. 이것만으로도 앙코르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되지- 하였다.

그래서 일행이 기다린다는 생각도 까맣게 잊고 그러나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며 캠코더를 찍으며 도는데 도중에 달러를 노린 악사의 노래가 길을 막는 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찾아 나선 가이드의 재촉을 받으면서도 나는 다시 또 올 수 없는 비경의 촬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욕이라도 먹을 때는 먹는 거야. 난 이걸 보러 온 거야, 이걸 찍으러 온 거란 말이야 하면서-.

승리의 문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곳이 앙코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바로 문둥병 왕 자야바르만 7세가 12세기에 세웠다는 '프레아칸(Preah Khan) 사원'이다. 자아바르만 7세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지은 불교 사원이었다.

여기서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인간의 힘과 자연의 힘의 대결을 볼 수 있다.

앙코르 제국의 이 유적이 400년 동안 역사에 사라졌던 사이, 바람에 실려 떨어진 팜 나무 씨들이 거대한 나무로 자라서 그 뿌리로 귀중한 사원을 파고들어 파괴하고 있었다.

벽은 갈라지고 천장은 무너지고 나무뿌리에 의해 폐허가 된 모습이었다. 이를 제거하고자 한 나무를 잘랐더니 자른 그 위에 싹이 다시 싹이 나서 포기하고 말았다고-.

나무에 의해 파괴된 사원은 지금은 오히려 그 나무에 의지하여 사원이 지탱하여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나무뿌리에 싸여 있는 사원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와 함께 덧없는 세월을 읽을 수 있어, 그렇지 않은 사원보다 더 관광객의 카메라 셔터 소리를 요란히 터트리게 하는 세계 관광 명소가 되었다.

가슴을 치면 천둥소리처럼 울리는, 사원 내 조그맣게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장난 삼아 가슴을 치며 오전 관광을 끝냈다. 이제 어서 가자. '앙코르와트(Angkor Wat)'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앙크로왓   

 지금 한국은 얼마나 추울까, 여기 시엠리엡은 연중 가장 기온이 낮다는 1월인데도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인데.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으로 앙코르톰을 다녀온 것이 오전이건만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바꿔 입고 점심 후 그 아까운 두어 시간을 호텔에 들어가 깊이 잠들었다.

이곳은 열대라서 사람들은 누구나 점심 후 두어 시간은 일손을 멈추고 오수(午睡)를 즐긴다. 즐긴다는 것보다 작열하는 열대의 따가운 햇볕은 도저히 몸이 마음을 따라 움직일 수도 없고, 이 나라에서는 그 시간대는 모두가 쉬는 시간이라 가볼 수 있는 곳도 없어서였다.

앙코르 유적지 관람은 영롱한 아침 햇빛을 받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앙코르톰을 먼저 보고 오후에 앙코르와트를 구경하여야 한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앙코르톰보다 더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유네스코까지 인정하는 앙코르와트를 먼저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앙코르와트는 수리야바르만 2세의 장례식을 위해 지어진 하나의 묘지다. 서방정토라는 말이 있듯이 정문도 앙코르와트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앙코르톰을 오전에 먼저 보고 앙코르와트를 둘러본 후 낙조를 보는 것이 순리에 맞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침에는 앙코르톰을 보고, 한낮에는 팜나무가 사원을 뒤덮은 프레아칸사원을 보고, 오후에 앙크로왓을 보고 나면 해거름이 된다.

그러면 프롬바켕에 가서 앙코르와트를 배경으로 넘어가는 장렬한 일몰을 보는 것이 환상적인 앙코르 유적 관광의 진수를 보게 되는 것이나 투어 여행에서 어찌 그것까지 감히 바라리오.

좀 높은 위치에서 앙코르와트를 보면, 중앙 첨탑을 3중으로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그 회랑 위의 사각 탑을 선으로 연결하여 보면 입체적인 4각 추(錐)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세계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다는 신들의 나라 수미산(메류산)을 상징한다는 중앙 첨탑이 60m 위에 솟아 있고, 그 아래 동서남북에 금, 은, 유리, 파리의 사보(四寶)를 상징하는 네 개의 망루 탑과, 히말리아 영봉을 상징한다는 성벽과, 그 성벽 밖에 대양을 상징하는 해자(垓字)에 가득한 물로 속세를 막고 있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하여 37년 동안 하루에 동원된 인원만도 10만 명이 넘었고, 코끼리가 4만 마리나 동원되었다.
그런데 나는 한때 코끼리 왕국이라고 일컬어지던 이 나라에 와서, 여행 중 코끼리 한 마리도 보지 못하였다. 가난해서 거의 다 팔아먹은 모양이다.

이 사원을 짓기 위하여 쓰인 사암은 여기서 60km 떨어진 '톤레삽'을 통하여 배로 운반해 왔다.

정문을 향하여 난 해자를 건너는 돌다리는 220m나 되었다.

정문을 들어서 좌우에 늘어선 목 없는 불상을 지나니, 65m의 높이 솟은 중앙 사탑을 높이가 서로 다른 제1회랑, 제2회랑, 제3회랑이 3중으로 조금씩 높아 가며 이를 둘러싸고 있다.

가장 바깥쪽 제1회랑은 길이만도 760m인데 그 안벽 전면에 부조가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다.

남회랑 동쪽에 있는 '야마의 사형 선고', 북회랑 서쪽의 '신들의 퍼레이드', '쿠르크세트의 전투장면', '염라대왕의 심판', '우유의 바다'에 신화를 주제로 한 내용들로 우리들에게 생소한 인도의 힌두교 서사시(敍事詩)의 세계였다. 그 조각들을 자세히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아무리 미술에 문외한인 우리의 눈에도 탄성을 발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특히 압살라(天女)의 돋우러 지게 조각한 부조(浮彫)가 그러하였다. 캄보디아 특유의 미소를 머금고 나직이 눈을 내려 뜨고, 맨발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어디서 본 것 같다.

그렇다, 저 얼굴은 엊저녁 캄보디아 민속춤을 보며 식사할 때, 춤추던 무희의 그 얼굴이요 그 몸짓이었다. 조용한 음악에 맞추어 손바닥을 뒤집히도록 뒤로 젖히고 가끔씩 한 발을 뒤로 올리던 그 모습이다.

저 터질 듯한 무르익은 유방을 들어낸 가냘픈 몸매는 조각만을 그렇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왕의 기쁨 조로서의 당시의 자연스러운 복장이던가.

그 하늘거리는 여체의 미가 5세기를 뛰어넘어 지금도 살아 춤을 추고 있다. 그 정묘하고 섬세한 몸매에 두른 옷에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흐르는 선은 지금도 살아 춤추고 있는 다시 더 비길 데 없는 미의 세계이다.

이 아름다운 압사라의 이마에 한가운데에 점이 있으면 천녀(天女) 압사라요, 점이 없으면 왕의 기쁨조 무희(舞姬) 압사라라 한다.

그 젖이 그리웠음인가 무엄하게도 압사라의 젖무덤마다 관광객의 짓궂은 손길로 까맣게 반짝이고 있었다.

앙코르톰보다 100년 앞섰다는 것. 그리고 더 정교하고 섬세함에다가 그 수많은 부조들로 인하여 앙코르톰을 제치고 7대 불가사의로 '앙코르와트'를 꼽게 되었나 보다.

이러한 조각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전개되는 그 이야기가 회랑(回廊)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앙코르와트를 세운 수리야바르만 2세가 힌두교 신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이었으나 후세 왕들이 불교를 믿는 바람에 힌두교 유물을 창고로 옮기고 거기에 불교적인 유물을 더한 것이 앙코왓이었다.

 

우리가 불교 나라 라오스 왕궁과 절에서 보고 온 라오스의 불상들은 그 크기와 그 수(數)로 하여 그 위엄을 드러내려 하였다면, 여기서는 크기보다, 정교한 조각의 수 없는 나열이 우리들을 감탄하게 하고 있다.

서구나 로마에 가서 볼 수 있는 부조보다 그 백 배 이상 많고 정교하다는 거대한 이 조각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당시를 살다 간 사람들의 모습들과 삶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전쟁터 장면이 나오면, 창칼을 든 행렬과 코끼리와 말을 탄 장군이 나온다. 전쟁터에 향하다가 식솔들이 밥을 하는 모습을 보면 당시에 전쟁은 온 가족이 전쟁에 함께 하였음을 보여 준다.

한쪽에서는 선생님이 학생을 칭찬하며 쓰다듬어 주고 있고, 아이를 낳는 여인을 산파가 도와주는 장면도 보인다.

그중 벽화 부조 중에서 백미(白眉) 중에 백미(白眉)는 힌두교 '유해교반(乳海攪伴Churning of tocean milk)이라는 신화'다. 50m 벽 전체에 우유 바다를 휘젓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중앙에 수리야바르만 2세의 얼굴과 비슷하게 조각했다는 비슈누 신이 커다란 거북 위에 올라서 있고, 그 양 옆으로 머리 쪽에 88 명 신이, 꼬리 쪽에 92명의 악신 아수라가 뱀을 안고, 불사의 명약 암리타를 얻기 위해 1,000년 동안 줄다리기를 하며 바다를 휘젓는다는 내용이다.

힌두교 창세기 신화로 앙코르톰을 들어가는 다리에서도 보던 것이다.

중앙 탑에 이르니 60m나 된다는 오르막길이 오르기에 범상치가 않다. 70도의 가파른 경사 길에 층계 하나하나가 너무 좁아 신발 하나 넉넉히 디딜 폭도 안 된다. 이 층계는 사람 오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모양으로 만든 것 같다. 저 3층이 왕과 승려만이 출입하는 것이라니 그들은 내부를 통하여 오르는 길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올라오는 이 있으면 이 성스러운 곳을 누구나 자연스럽게 몸과 몸을 낮추어 기어 올라오라는 뜻인가. 아무나 오르지 말라는 곳인가. 이곳의 모든 오르는 외부 도로는 50도가 넘는 급경사로 가팔랐다.

허나 내가 누구인가. 왕년에 산과 함께 살아온 산 꾼이 아닌가. 옆에 쇠줄을 외면하고 암벽 타듯 뒤돌아보지도 않고 일행에게 나 보란 듯이 용을 써 기어올랐다.

거의 다 올랐을 때, 어디선가 '반사이!'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사히 올라왔다는 것이다. 나보다 한 10살쯤 더 되어 보이는 일인 노파였다. 해방 후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3층 중앙의 탑은 완전히 파괴되어 텅 빈 곳에 6m가량의 정사각형의 수영장 같은 곳이 있다. '왕의 목욕 소'인데 물은 어떻게 날랐단 말인가.

이곳이 처음 발견될 당시 왕가의 재보(財寶)가 발견되었다는 곳이다. 이곳의 부도는 1층 회랑 같이 많지는 않으나 주로 압사라(天女)의 아주 정교한 부조가 모퉁이마다 숨은 듯이 서 있다.

  이 앙코르와트가 완공되기 전에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었기 때문에 3층은 1층 회랑처럼 찬란하지 않은가 보다.

저녁이 가까워 온다. 낙조는 어제 톤레삽에서 미리 보았으니 이제 이 나그네의 여행길도 이제는 귀국 길에 들어서는구나.

세월은 가고 추억만이 남는 것. 추억을 구체적으로 남게 하는 것이 사진이거니-, 하며 저물어 가는 앙코르의 모든 것을 디지털카메라와 캠코더에 담으려 손이 아프게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대고 있었다.

아, 아기다리고기다리며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앙코르여!

이 나의 감회를 일찍이 세계적 역사학의 태두 토인비(Toynbee)가 이렇게 대신하여 주었다.

“불가사의하고 경이로운 앙코르에서 나의 남은 여생을 마치고 싶구나."

거듭 말하거니와 앙코르와트가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말하고 있는 사전은 없다. 그러한 말이 생기기 이전부터 밀림에 굳게 갇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을 둘러본 사람이면 이곳을 '세계 7대 불가사의'가 아니라 '세계 3대 불가사의'라 한들 누가 있어 이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투어 일행들은 나만 빼고 50여 개국 이상을 다녀온 배테랑 여행가들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그리스 로마에서보다 더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유럽보다 더 거창하고 더 정교하며 더 다양하다는 것이다.

압사라가 하늘나라를 춤으로 노래하는 곳. 힌두교를 통한 고대 인도의 거대한 서사시를 부조로 읊조리고 있는 곳. 주판알 같은 창문의 신비한 모습. 방금 도배를 끝낸 것 같은 천장의 연꽃무늬, 부채처럼 활짝 치켜든 코브라의 모습. 어디를 가도 다시 만나 볼 수 없는 앙코르톰의 사면 불들의 캄보디아의 미소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다시 또 천년 이상이 더 흘러도 길이 남을 석조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역사의 자랑스러운 후손들은 어떠한가.

거지보다 더 비참한 생존을 톤레샵 가에서 수상 가옥을 짓고 집시처럼, 새처럼 가난을 살고 있다. 한창 배울 나이의 10살 전의 아이들은 처량한 소리로 관광객에게 달려가서 1달러를 구걸하게 하고 있으며, 몇십 달러에 캄보디아 여인들이 관광객에게 몸을 팔러 거리에 나서고 있다.

병원이 없는 이곳에서는 몸이 아프면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아편으로 아픔을 멈추게 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캄보디아 장래를 짊어질 인텔리는 폴폿 정권에 의해, 전 국민의 절반인 250만 국민이 아사(餓死)나 학살로 죽어 갔고, 끊임없는 내란으로 세계 최빈국의 대열에서, 생존을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나라였다.

뼈아픈 이러한 역사는 이 위대한 앙코르의 후예들로 하여금 후세 교육에 무관심한 국민을 만들고 말았다. 이 누구의 책임인가. 이 누가 책임져야 할 역사인가.

 

해외여행에서의 옵션과 쇼핑하기

여행의 즐거움이 잘 보고, 잘 먹고, 잘 자는 것이지만 그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쇼핑 잘하기다.

처음 해외여행으로 미국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더니 옵션 중에 하나가 식사를 하면서 보는 민속춤 훌라후프였다. 어린 처녀들이 야자열매 반 조각으로 유방을 가리고 야자 잎 치마를 두른 하체를 흔들어 돌리며 북에 맞추어 추는 훌라후프 춤은 하와이의 상징이요, 향기다.

이 옵션에 100불을 달라 하였다. 아내와 함께라면 200불이라 돈이 아까워 생략하기로 하였다.

돌아와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에게 이 갸륵한 나의 절약을 자랑삼아 말했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면 무엇하러 거기까지 갔냐는 것이다.

그때 내 가슴을 치던 것이 있었다. 그래, 돈은 쓰기 위해 버는 거야. 써야 할 때 아까워 쓰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낭비였어, 낭비! 그 이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서 플레밍고(flamingo) 보는 일에도,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박물관도 망설이지 않고 앞장섰다. 중국에 가서는 중국 여인 발 안마까지 받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였다.

이집트 룩소르(Luxor)에 갔을 때는 역마차 여행이 있어 일인당 5불씩 주고 탔더니 마부가 묻는다. “How many wife do you have?” 한다. 그래 아내를 가리키며 “She is my wife.” 했더니 대답한다. “Me too. because I am poor.” 이런 소리를 옵션 아니면 어디서 듣겠나.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면 달러가 왜 그렇게 크게 보이지? 1불이 일만 원보다 더 많은 것 같다. 내가 숫자에 너무 더듬거려서일까? 캄보디아 왕궁은 내부 촬영을 못하게 하고 겉만 찍을 수 있다는데 그리고도 카메라는 2불, 캠코더는 5불을 받는다 하여 녹음기만 달랑 들고 들어갔더니 함께 한 장() 선생이 구박한다. 글 쓰는 분이라 해서 거시기했는데 실망했다고. 자기는 카메라를 들고 들어왔다는 말이다.

 

나는 속으로 그랬다. 나 모처럼만에 잔소리 피해 온 인천 짠물 일만(필자)이다, 일만. 그렇게 해서 이번 여행에서도 준비해 간 달러를 절반도 못쓰고 왔다.

  돌아오니 후회가 난다. 사이공 유니온이라는 섬에서 파는 야자 잎으로 만든 1 불하는 모자를 서너 개 더 사 올 걸. 라오스에서 1~3 달러면 살 수 있는 목공예 품은 몇 쌍을 더 사 와야 하는 건데-. 그 인력거 시클로 하나만 사 올 것이 아니라 월남에서 여자들이 양쪽에 소쿠리를 담고 메고 다니는 가잉(ghang, 목도채)이라는 목각도 함께 몇 쌍 사 와야 하는 것이었어. 이천 도자기 엑스포에서 사 온 파키스탄 옥 코끼리 하나가 얼마나 외롭던가.

장 선생이 70불이나 주고도 아낌없이 사는 것처럼, 하노이, 사이공에서 관광 책을 사 와야 하는 거야. 언제 거기 다시 갈 수 있겠어. 하고 후회하였다.

캄보디아나 라오스에서도 그랬다. 명승지가 박혀 있는 2~3달러 하는 반소매 티를 10여 개 사다가 딸들 아들 내외에게 고루고루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사이공에서는 야자수 마시고 남는 열매만 빻아 만든 캐러멜을 5불 주고 6개 사 왔는데 얼마나 맛있어하던가. 갸륵하게 쓰고 남은 달러를 받으면서도. 왜 더 사 오지 않았느냐고 아내가 말하지 않던가.

버스 보내고 손드는 격이지만 절약한 이번 여행 쇼핑에도 후회가 많았다. 거기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물건들이라 아쉬움이 더했다.

사이공에서의 여행 마지막 밤, 노트르담 사원 광장에서 만난 점잖은 월남 샐러리맨과 만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다가 안고 있는 딸 사주라고 1달러 주고 헤어진 것이나, 거기서 1불로 파는 그물 침대 해먹 4개를 사 온 건 아주 잘한 일이었지-.

이렇게 쇼핑한 것은 여행이 끝나고 한국을 살면서, 내 여생의 마지막 여유를 투자하여 다녀온 곳을 가끔이라도 기억하게 하는 물건을, 거실이나 서재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남들보다 힘이 세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도 버거운 큰 가방을 가지고 다녔는데….

스페인 바르셀로나 피카소 박물관에 갔을 때, 큰 것을 산다고 잔소리하는 아내와 쌈 쌈 하면서 사다가 걸어 놓고 즐기는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gurnica)'처럼, 요번엔 라오스 아침 시장에 가서 사다가 거실에 걸어 놓은 코끼리 두상은 보면 볼수록 나를 흐뭇하게 한다.

 라오스를 떠나올 때 아침 시장(Talat Sao)에서 산 것이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50cm로 제법 큰 놈이다. 47달러 달라는 것을 돌아서는 시늉을 몇 번씩이나 하며 36 달러에 깎아 사 가지고 시장 구경을 다닐 때였다. 아뿔싸, 놈의 상아가 쇼윈도를 슬쩍 스친 모양인데 진열대 유리가 사선으로 순식간에 금이 주욱- 갔다.

순간 생각나는 것이 36계 줄행랑이었다. 주인이 알면 외국인이라고 유리 값의 열 배나 더 받겠지-. 이 코끼리 하나 값은 족히 더 받을 거야. 귀퉁이여서 본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야, 하면서 차로 돌아와 ‘후유-' 하였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서 입고 있던 조끼, 모자를 차에 벗어 두고 시장 구경을 다시 나갔다.

그러다가 이름과 달리 아침만 아니라 종일 열리고 있다는 라오스 최대 시장 아침 시장(Talat Sao)에서 가장 볼 만하다는 옥을 파는 곳도, 싸게 판다는 동물의 뼈, 발톱, 이빨도, 꼭 사가겠다고 벼르던 7,500 kipkip(1달러. 외국인에게는 2달러 부름)이면 살 수 있다는 전통 복장을 입은 라오스 인형도 못 사 오고 말았다.

돌아와서 살펴보니 코끼리 두상은 머리에 비해 작은 눈동자를 가진 놈이다. 코를 오른쪽으로 둥글게 감아올리고 있고 콧구멍 2, 귓구멍 두 개가 예쁘게도 뚫렸는데 유리를 해 먹은 하얀 상아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그때 내가 비겁한 어그리 코리안(ugly korean)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퍼진다.

 

   *.  인도차이나에서 본 우리 코리아

  우리들의 여행이 라오스와 베트남에서 비록 그 나라 수도와 대표적 유적지 주변을 둘러보고 온 것에 불과하지만, 10일 동안 함께 한 우리들은 거의 다 세계 6대주를 다 둘러보고 세계의 오지(奧地) 국가를 찾아온 사람들이다.
나이테를 보고 나무의 크기와 동서남북을 유추할 수 있듯이, 부분만으로도 전체를 살필 수 있는 눈과 귀가 튼 사람들이다.

우리가 지금 둘러보고 온 곳은 인도차이나(Indochina) 반도이었지만,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외국을 통하여 정작 보고 온 곳은 바로 우리나라 코리아였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가 못 사는가.

의식주는 사람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3가지 요소이지만, 여기는 상하(常夏)의 나라라, 의식주를 가장 쉽게 해결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웬만한 타월 하나면 옷이 해결되고, 식량이 되는 곡식도 노력에 따라서는 5 기작(期作)이 가능한 나라요, 파초 잎 하나면 그걸 깔고 덮고 어디서나 잠을 청할 수 있는 천혜(天惠)의 축복받은 땅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지내기 어렵다는 겨울이 없는 나라. 거지와 극빈자가 구별되지 않는 나라. 그래서 국민들은 바쁘거나 조급하지가 않고 게으를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한 바 있는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가 말하는 저차 문명(低次文明)에 고차 문명(高次文明)에로의 도전이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아서 문명을 향상시킨다는 그 대응에 소홀한 나라였다.

이와 같은 예는 아르헨티나에서도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는 브라질 다음으로 큰, 세계에서도 8번째로 큰 나라다. 여기에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국민 3,000만 명이 사는,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부유했던 이 나라가 지금은 IMF를 두 번씩이나 맞고 국가 부도를 내어 세계가 걱정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 이유가 천혜의 자원인 1차 산업 농.목축업(農牧畜業)에 안착하고 거기만 의존하다가, 발전하여 가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하여 오다가 국가 파산의 경지까지 몰고 가게 된 것이니, 천혜의 국토와 풍부한 자원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 인류 사상 처음 우주를 날아 보고 와서 한 말이 “지구는 푸르다."였다.

내가 이번 여행지 인도차이나 반도를 보고 느낀 것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한국에서 태어난 기쁨'이었다.

그동안 스스로를 엽전(葉錢)이라 비하하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니고 살던 사대사상, 외제 선호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88 올림픽 때 여의도 광장에서나, 대전 엑스포 전시장에서 대부분의 한국 관람객들이 모든 다른 나라 전시관을 젖히고 한국관 앞에서 1시간 이상씩 줄을 서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상상해 보시라. 이름도 생소한 라오스에 수도 비엔티엔에서 ‘자동문'이라 쓴 한국제 버스를 타고, 거기서는 일류 호텔이라는 라오스 호텔에서 LG제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대우 TV를 채널을 돌리니, 아리랑 채널에서 한국의 연속극이 상연되고 있을 때, 나라 밖에서 발전한 한국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코리언이 어디 있겠는가.

동남아에서는 지금 한류(韓流) 열풍이 상상 이상이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동북아가 조명받는 지금 한국은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얻었지만 인화(人和)만을 얻지 못했다"라고 위정자를 매도하고 있는 어느 실업 인의 신문 기사의 말이 사실이었다. 인도차이나 여러 나라가 이토록 못 사는 이유 중의 하나가 위정자라면,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부류가 위정자가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도 가장 강국이라는 베트남에서의 한류(韓流) 열풍은 대단하였다.

코리아를 본받아 따라가야 할 부러운 발전의 모범으로 삼고 있었고, 한국 제를 선호하며, 한국의 가수나 탤런트들은 그들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모래시계'라는 한국의 연속극은 호찌민시(구 사이공)에서만도 여섯 번이나 재방영되었다 하며, 우리 가수들 TV 탤런트는 그들의 우상(偶像)으로 그들의 입고 있는 옷은 젊은 베트남인들에게 그대로 유행이 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보다 더 매너가 좋고, 부유한 나라이지만 자기들을 한때 지배하였던 데다가 그보다 한국인의 문화가 자기네와 더 같기 때문이란다.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들과 너무 닮아서 우리나라 가이드 배(裵)군은 베트남인으로 혼동될 때가 제일 섭섭하다고 할 정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는 세계 제1위의 IT산업 국가요, 조선국(造船國)이요, 세계 제2위의 반도체(半導體) 국가요, 선박(船泊) 국가이며, 철강 국이요, 세계 제5위의 자동차 국가가 아닌가.

그래서 한 번도 성공을 하지 못하고 살아온 나와 같은 서민도, 재작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캐나다의 자연에 감격하였고, 작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는 스칸디나비아 제국에 가서 왜 잘 사는 나라인가를 묻고 다녔더니, 금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에 속한다는 인도차이나 반도 세 나라를 둘러볼 수 있지 않았는가.

거듭 말하거니와, 아프리카나 인도차이나나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고,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영광스럽다는 것을 느끼게 한 10일간의 투어 여행이었다. 우리가 노래하던 잠꾸러기가 없어서 좋은 나라에서 벗어나, 이제는 남들도 인정해 주는 저력 있고 능력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 여행이었다.

                                                    저자: 미안합니다.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메모리 1G가 나오기 이전이어서 사진이 흐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