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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1경 해미읍성(海美邑城)/ 순교(殉敎) 이야기

ilman 2023. 3. 11. 19:17

해미읍성(海美邑城,사적 116호)의 비극

그림 출처: 서산 시청 홈페이지

드디어 우리 고향문인협회 33명은 새벽을 달려 2시간 30분에 서산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에 도착하였다.
해미읍성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아치형의 남문이 진남문(鎭南門)으로 해미읍성(海美邑城)의 정문이다.

  이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하여, 육군인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병영성( 營城)으로 쓰이다가 효종 때 청주(淸州)로 옮겨간 후 읍성(邑城)으로 이용되어 왔다.
처음 축성할 때에 성 주위에 해자(垓字, 도랑)를 파고 성벽과 해자 사이에 가시가 많은 탱자를 심어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일명 '탱자성(撐子城)'이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서문의 이름도 탱자 '枳(지)', 성 ( )' '조성루(枳城樓)'라 하였다.
 성곽 둘레는 1,800m요, 높이가 5m,넓이 19만4천m2인데,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좁아서 성 위로는 사람 한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폭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관된 평성(平城)이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 제116호)이다.

  이 해미 읍성은 평시에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다가 비상시에는 방어기지로 이용하던 곳이다.

그래서 공사를 처리하던 '동헌(東軒)'이 있고, 왕명을 받아 내려오는 벼슬아치를 대접하는 '객사(客舍)'와, 관리와 그 가족들이 살던 '내아(內衙)'가 있다.

러나 이 성은 읍성으로 보다는 1866년 병인 박해 (迫害) 때 1,000여 명이나 되는 천주교(天主敎) 신자의 학살(虐殺)로 인하여 '천주교의 성지(聖地)'로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이름도 상서로울 '瑞(서)' 뫼 '山(산)', '서산(瑞山)'이라 하는 곳에 이런 상서롭지 못한 역사가 있다니-.
 정조(正祖) 대왕은 사헌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어명을 해미현에 내렸다.
"서산군 양반들이 천주학(天主學)을 전수하여 윤리에 위반되는 언행이 다분하다 하니 읍졸(邑卒)로 하여금 엄중히 다스리어 서학(천주교)의 뿌리를 뽑게 하라."
 그래서 동족이 동족을 국민의 절반이나 그중에서도 폴포드(Pol Pot )의 급진 정책을 반대하는 지식인들을 학살한 캄보디아 킹스필드에서처럼, 제 나라 읍졸 군사가 제 나라 백성인 읍민(邑民)을 학살하는 불행한 대참사(大慘死)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도 이렇게 부끄러운 역사를 가졌던가.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미사를 집전하는 부끄러운 역사가 된 것이다.
이 사람 생각에는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 속에 갇히어 죽어 애통하는 마음이 '천주교인들이 조상의 제사를 금한다는 말에 영향을 받아 내린 어명인 것 같다. 


배교(背敎)에 맞선 천주교 신자들 .

육신은 찢어지고 고문으로 사라져도
천주님!

천주님! 부르며
이 몸 주고 영혼 찾다 가셨네.

 이런 천주교 신자들을 가두어 두었다는 움푹 파인 감옥 터에는 돌무더기뿐인데 거기에 순교한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듯 오석으로 '순교(殉敎) 기념비'가 서있고, 그 무렵 잔인했던 어두운 역사의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앞에 충청도 사람들이 '호야나무'라 부르는 수령 300년 이상 된 '회화나무'(충남기념물72)가 서 있다.
이 회화나뭇가지에 1866년 병인박해 때 철사에 천주교 신자들의 상투를 묶어 매달아 놓고 고문을 한 동그란 흔적이 흉하게도 하얗게 그 슬픈 이야기를 사실로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명 인사인 경우였고, 이름 없는 서민들의 경우에는 서문 '지성루(枳城樓)'를 이용하였다.
부정한 것은 서문 밖으로 버린다는 전해오는 말 따라 서문으로 시체를 실어 날랐고, 천주교 신자를 색출할 때에는 서문 통로에다가 십자가, 묵주, 예수, 마리아의 사진 같은 성물(聖物)을 두고 이를 밟고 가는 자는 살려주고, 성물(聖物)을 피해 가는 자는 죽였다. 그러나 거의 모든 신자들은 천주에 대한 믿음으로 피해 가는 것으로 죽음을 태연히 맞았다니 신앙심이, 종교가 이렇게 위대한 것인가.
죽이는 방법도 주리를 틀고, 돌로 치고, 목을 베기도 하고, 서문 밖 돌 위에 해골이 터지도록 메치거나, 참수하거나 겨울에는 얼려 죽이는 만행을 어명(御命)이란 미명하에 자행하였다.
그래도 관아에 죽음으로 맞서서 평화로운 표정으로, 옥 같은 맑은 영혼으로 배교(背敎) 대신 죽음을 택한 곳이 바로 이 해미 읍성이다.

이를 서문 밖 그 자리에 하늘을 바라 우뚝 솟아 있는 '순교현양비(殉敎顯揚碑)'와 그 옆에 다리에 있었던 피 어린 기다란 바위를 두고 기념하고 있다.

 여기서 1km쯤에 거리에 신자를 그냥 생매장하였다는 '여숫골'이 있다. 많은 천주교도들을 일시에 처형하기가 어려우니까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는 곳이다.
'여숫골'이라고 하게 된 것은 죽어가면서 신도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예수 , 마리아 -'소리가 멀리 들으니 '여수' 같았다 해서 '여숫골'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곳을 천주교 성지로 조성하고 그 자리에 해미읍성 모양의 성당을 지어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

층계를 따라 북쪽으로 오르니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 그림 같은 정자가 있다. 거기서 바라보니 저 멀리 서산을 비잉 둘러싸고 있는 산의 영봉 위에 맑은 가을 하늘이 파랗게 열려있다.

그 아래 성을 밟고 동문 잠양루(岑陽樓, 해미의 옛이름)까지 가는 우리들 고양문협 회원들의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 평화로운 고장 해미에 그런 참사가 있었다니-.
                                   - 2003년 9월 19일/고양문인협회 주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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