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종묘(宗廟) 이야기

ilman 2022. 10. 18. 16:31

종묘(宗廟)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있는 종묘(宗廟)는 조선 시대 역대 왕(1392~1910)과 왕비와 추존(追尊)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봉안하고 기리며 제사 지내는 유교 사당으로, 궁궐보다 앞선 1395년에 완성한 사적 125호다.
동양에서는 물론 이런 형태의 건물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곳이어서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 지정된 유명한 곳이 종묘(宗廟)다.

 종묘는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계곡에다가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데, 바로 앞의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역수(逆水) 하여 흐르는 적()과 홍수가 미칠 수 없는 배산 임수(背山臨水)의 풍수지리학상 최적의 자연환경이 되는 길지(吉地).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에 수도를 한양(漢陽, 현재의 서울)으로 옮기면서 이 길지에다가 대궐 신축보다 먼저 종묘(宗廟)를 건축하도록 하였다.

 초기에는 정전(正殿)에다 태조의 선조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인 사조(四祖)를 모시다가, 그 후에 세종대왕 같이 큰 업적을 남긴 불천지위(不遷) 19 왕을 봉안하게 되었고, 나머지 왕들은 정전 서북쪽에 있는 영녕전(永寧殿)에 모시게 하였다.

이는 신라 시대에는 5 묘제(五廟制),고려 시대에는 7 묘제(七墓制)라 하여 승하하신 왕의 4대조나 6대조까지 위패를 안치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공덕이 높아 세실(世室)로 정한 제왕 이외의 신주는 조묘(祧廟)인 영녕전(永寧殿)에 모셨다.

왕이 승하하시면 조천(祧遷)이라 하여 종묘에 안치되어 있던 위패를 정전의 서북쪽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시고, 막 승하하신 왕의 위패를 정전에 새로 안치한 것이다.

종묘는 '향대천(香大廳)'과 주전인 '정전(正殿)',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 16)' 세 곳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종묘 정전(宗廟 正殿)

 종묘 정전(宗廟 正殿)은 국보 227호로 왕과 왕비가 승하한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신주를 옮겨와 모시던 건물이다. 정전에는 이태조를 비롯하여 세종과 정조와 같은 공덕이 있는 역대왕과 왕비 49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정전 건물 앞에  묘정(廟庭)의 월대(月臺)는 안정을, 건물의 반복되는 듯한 19 개의 기둥은 왕위의 연속을, 기와지붕의 긴 지붕은 왕조의 무한을 상징하는 숭고한 건축미의 극치를 구현하고 있다.
이런 목조 건물의 긴 정면 19칸과 측면 33칸으로 된 총 35칸 규모의 19개 방에 49위의 신주를 모셨다.

 이 긴 맞배지붕의 건물이 드넓은 묘정(廟庭)의 앞마당 월대와 어울려서 이루는 모습은 동서양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인 보물인 건축물로 손꼽힌다.

  정전(正殿)은 남문, 동문, 서문이 달린 직사각형 모양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전(正殿)은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건축물이며, 그 좌우에는 전각 앞 월대 쪽으로 나온 동월랑(東月廊),·서월랑(西月廊) 등 행랑(行廊)이 딸려 있다.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정전(正殿)은 긴 복도가 있고, 나무문이 각각 달려 있는 내부에 19실이 있다. 이 묘실들은 다시 여러 개의 칸으로 구분되어 칸마다 하나씩 각각 신주 49개를 모시고 있다각 칸에는 칸막이가 쳐진 협실(夾室)이 딸려 있다. 
정문(正門)은 신령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여 열려 있어도 사람의 통행을 금지했다. 왕도 동문으로 드나들었으며, 악사(樂士)들은 더 작은 서문을 이용하였다.

 

-종묘(宗廟) 견학

후세왕으로

두꺼운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종묘의 외대문(창협문)으로 들어서 > 하마비(下馬碑)를 지나면 정전으로 향한 길은 중앙이 신로(神路), 좌측 우측 동로가 왕이 다니는 왕로(王路)요, 좌측 길이 세자로(世子路)다. > 그 도중 좌측에 제례를 지낼 때 왕이 잠시 머물며 앞선 왕들의 공덕을 기리던 망묘루(望廟樓) > 제례에 바칠 향, 축문, 폐백을 보관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제관들이 대기하던 향대청(香大廳)> 태조가 고려 공민왕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지었다는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 > 신하들이 제례 시에 기다리던 제실(祭室) > 제사 각종 음식물을 준비했다는 전사청(典祀廳) > 역대 공신 83명의 신주를 모신 공신당(功臣堂)을 지나> 정전의 월대에 오르면 위에서 말한 49위의 19개 방에 신주를 모셨다는 맞배지붕의 긴 정전을 보게 된다.

한국 목조 건물 중에 가장 길다는 35칸 규모의 정전(正殿)에는 맨 좌측에 이태조로부터 차례로  후세왕의 신주를 모셨는데  세종이나 정조대왕 같이 위대한 왕을 제외한 왕들을 모신 >  정전의 서북쪽에 있는 영녕전(永寧殿)으로 간다. 

영녕전(永寧殿 보물 821)은 정전(正殿)의 별묘(別廟)로 태조의  4대조인 추존왕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  정묘에서 옮겨온 왕과 왕비의 신주를 위해 세워진 별묘로,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편안하라는 뜻을 지닌다. 사대조 이외에 왕의 신주 16위와 왕비의 신주 18위 총 34위를 모신 곳이 영녕전(永寧殿 )이다. 

영녕전(永寧殿 )은 문이 세 개가 달린 직사각형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전각 앞 넓은 섬돌 월대(月臺)에는 얇은 화강암석이 깔려 있다. 종묘 제례세서 왕과 문무백관과 왕친들은 이 월대에 올라서 제레를 지낸다.  

.-종묘 제례를 지낼 때

그 순서로는 위 그림과 같이 신을 맞는 신관례(晨祼禮)> 신께 제물을 드리는 천조례> 왕의 초헌(初獻)> 세자의 아헌(亞獻) > 영의정의 종헌(終獻)을 올리고> 음복(飮福)>  송신례(送神禮) 순으로 한다. 
 이런 제례가 행해지는 동안에 악공(樂工)들은 ()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음악을 연주하고 무희(舞姬) 들은 춤을 춘다.

이를 종묘제악(宗廟祭樂)이라 한다.

이런 종묘 제례의 목적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풍요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사직 제례(社稷祭禮)로 당시로서는 국가 존립을 위한 국가적 대행사였다.

 제례시에는 내실 신실(神室) 앞에 정성껏 격식대로 제상을 차린다. 그 앞쪽 건물 밖에도 술잔을 올리기 위해 준소상(奠所床)을 차린다. 이때 곡식이나 고기 등은 익히지 않은 날 것을 그대로 올린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이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정시제와 임시제로 봉행되었는데, 정시제(正時祭)는 춘하추동 4계절마다 계절의 첫 달인 춘 정월, 하 4월, 추 7월, 동 10월의 상순 등에 지냈고, 임시제(臨時祭)는 나라의 흉사나 길사 등으로 큰일이 있을 때 그 까닭을 신명에게 고하는 고유제(告由祭)로 올렸다. 

 조선 시대에 종묘 대제 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과 종친을 거느리고 제향을 올리는 것을 '친행(親行)'이라 하였고, 왕이 유고 시에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는 것은 '섭행(攝行)'이라 하였다.

현제는 더 간소화되어 이 씨(李氏) 가문에서 '종묘 대제봉향위원회'를 구성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 왜놈들에게 되찾은 종묘와 창덕궁 숲길

  일제가 1910년 한일합방 직후부터 획책하다가 1932년에 왜놈들은 한국의 사직을 모신 종묘와 동궐인 창경궁과 창덕궁을 잇던 종묘관통도 숲길을 우리 민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없애버리고 율곡로(栗谷路)를 내면서 한국의 얼과 맥을 끊어버렸다.

그것을 32년 만인 2022년 7월 22일에 우리 대한민국정부가 그 숲길을 복원해 놓았다. 차도는 지하를 뚫어 지하 차도를 만들었고 지상은 옛처럼 숲길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조선조에는 종묘를 끼고 동서로 오르내리던 동 순라길과 서 순라길이. 길을 끊어 놓은 지 32년만에 복원한 것이다.  이제는 덕수궁 돌담 길 같은 연인들의 아베크 코스의 새로운 돌담길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 옛날처럼 종묘를 끼고 동서로 오가던  동 순라길과 서 순라길이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한글학회가 지은 '우리말 큰사전'에서 '순라군을 찾아보았다.

순라군[巡邏군:): 도둑 화재 따위 인정(人定), 밤 10시경)에서 파루(罷漏 새벽 4시경)까지 도성 안을 순찰하던 군사

                                -참고 '한국민족문화대 백과사전/고궁박물관 '궁에서 왕을 만나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