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詩) ** ☎

내 고향 수도국산 달동네

ilman 2023. 9. 8. 10:23

 내 고향(故鄕)이 수도국산 기슭 '약우물터'인 줄 알았더니-.
백발`되어 찾아온 내 고향은 '수도국산(水道局山) 달동네'로 개명하여 나를 맞으니
조금은 창피하다.

가난이란 얼마나 서럽고 힘든 고개였던가.
가난은 불행이었고, 의식주와의 필사적인 전쟁이었으니,

가난보다 더 큰 죄악은 없지 않았던가.

그런 가난을 드디어 넘어섰더니  

  가난도 행복이더라. 

  가난도 그리워 꿈 꿔오던 재산(財産)이더라,

수도국산 달동 내 출신 노 시인(老詩人)이라서

그리 노래하며 살았던가.
달 보며 돌아와서,  달 보다 잠들어서,

월세방(月貰房) 사는 이.

사글세집(朔月貰-)으로 살 사람이

내 집 갖고 살 수 있는 천국 같은 유일한 내 집이라서, 

산동네가 달동네서였을까.

달동네가 산동네였을까.

 나는 옛날을 만난다.

쌍우물을 두고도 수돗물을 사 먹던 시절

그 수돗가에서 만나던 그 소녀를-

그 좁디 좁은 컴컴한 골목에 숨어 
기다리던 나의 사랑을 만난다.

가난해서 헤어졌으나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소녀와 

이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수돗가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다시 만나

옛날 못 나눈 서럽던 이별의 역사를 나누어 봤으면

죽어도

()이 없겠다.

 

몇년 전이던가.  백발의 나이로 내 고향 인천(仁川),

내가 살던 송현동(松峴洞) 약우물터를 찾았더니,

고향은 송두리째 없어져 버리고 그 자리에 낯선 대형 아파트촌이 들어서 있었다. 
동네 앞 산이었던 수도국산에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서 있어서  그때 감흥을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나는  이 달동네에서 '영화 초등학교', '인천중학교', '인천고등학교'를 다녔으니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1940~ 50년대를 인천의 산동네 달동네에서

모두가 어려웠던 당시를 남들보다도 더 어렵게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4년 동안 고학(苦學)으로 대학을 나왔고,

서울 객지에 내 집 한 칸 마련하느라고 젊음을 온통 다 바쳤다.

그렇다고 당시에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가난이란 가져야 할 나이에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붙이는 부끄러운 말일뿐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서 옛날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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