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산행기/서울 내사산(內四山) 시리즈1
서울의 진산(鎭山)은 크게는 북한산(北漢山: 삼각산)이고, 작게는 그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嶽山) 곧 북악산(北嶽山)이다. 서울의 산에는 밖으로 크게 네 개의 산과 안으로 네 개의 산이 있다. 외사산(外四山)으로는 동서남북에 용마산(595.7m), 덕양산(124.8m ), 124.8m 관악산(124.8m ), 북한산(836.5m)이 있다.
내사산(內四山)으로는 낙산(洛山, 111m), 인왕산(仁王山,338m), 남산(木覓山,262m),북악산(白嶽山, 342m )이 있다.
금년에는 그 여덟 개의 서울 산의 산행기를 쓰기를 벼르다가 마침내 인왕산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석가탄신일에 불자(佛子)인 아내에게 절과 산을 겸하기 위하여 우리는 3호선 독립문 역에서 내려 인왕산을 향하고 있다.
아까사아가 하얗게 지고 있고 넝쿨장미가 담에서 빨갛게 피어나는 초여름이었다.
인왕산은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 낙산(洛山)과 함께 우백호에 해당하는 화강암이 노출되어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수석을 펼쳐놓은 듯한 암산이다. 산은 높지 않지만 북한산에서 뻗어 내린 용(龍)의 산세가 네 산 중에서도 가장 웅장하다.
인왕산(仁王山)이란 지명은 조선조 태조 때에는 서봉(西峰) 또는 서산(西山)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사찰이 있다하여 인왕산(仁王山)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말이 광해군일기에 전하여 온다.
경주 석굴암에 가면 그 입구에 눈을 부릅뜬 불교의 수호신이라는 한 쌍의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보게 된다. 금강(金剛)이란 말은 불교 용어로는 여래(如來)의 지덕(智德)이 견고하여 일체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다는 말이지만, 금강석(diamond)처럼 몹시 단단하여 어떠한 물건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금강이란 말이 인왕(仁王)인 것을 보면 인왕산이란 도성(都城)을 지켜 주는 수호 산이라는 유추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인왕산의 한자는 仁王山(인왕산)으로 써야지 仁旺山(인왕산)으로 써서는 안 된다.
조선조 후기의 화가인 정선(鄭敾)이나, 강희언(姜希彦)의 산수화에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仁王山(인왕산)이라 쓰여 있는 것을 악랄한 일본인들이 일본(日本)의 日(일)이 조선 王(왕)을 누른다는 뜻으로 ‘王’(왕) 자를 ‘旺’왕) 자로 고쳤다는 말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당시 왜놈들은 우리 조선민족을 가축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길들이고자, 우리 국토를 영원한 일본 국토로 만들고자 하는 야욕으로 우리나라 곳곳을 자기들 뜻대로 지명을 뜯어고쳤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왕산 일주문에는 아직도 '仁旺山仁王寺'라 쓰여 있는가.
한국에는 산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생긴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사상 때문에 사람들은 유난히 바위가 많은 인왕산 바위 곳곳에다가 치성을 드리고, 그 술과 안주가 되는 과일과 돼지 머리를 그대로 두고 간다 한다.
그래서 밤이 오면 이 일대의 노숙자가 모여 들고 그러면 이곳의 정자에서는 찬란한 밤의 향연이 벌어지게 된다고-.
신성한 절에 웬 무당의 요란한 굿 소리인가. 이상한 마음을 품고 찾아간 곳이 국사당(國師堂)이었다. ‘國師’(국사)란 ‘왕의 스승’이란 말인데- 하면서 처음에는 의아하였지만 마당의 표지의 안내 설명을 보니 여기에는 불상은 없고 비단에 채색한 그림으로 모신 21점의 화상(畵像) 중에 이태조와 그의 스승격인 무학대사가 있었다니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그 당시 漢陽(한강 漢, 북쪽 陽)에 도읍을 정하고 서울의 수호신사로서 남산 꼭대기에다가 목멱신사(木覓神祠)의 사당을 만들어 놓았더니 후대에 오면서 무속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1925년 일제가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이곳 인왕산 산록으로 옮겨 오자 남산이란 뜻의 '목멱(木覓)' 대신에 국사당(國師堂)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이곳 국사당은 오늘날 민속 신앙 보존과 연구에 메카의 역할을 하여 왔다.
마침 굿을 하고 있었는데 무당이 예비군복을 들고 치성 드리고 있는 모습은 군인 가서 죽은 자식의 천도(薦度)를 비는 모양이다. 무당의 얼굴이 깨끗한 것이 아마도 인간문화재인가 보다.
이 국사당을 더욱 유명하게 하여 준 것이 그 위에 있는 선바위다.
인왕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크고 작은 두개의 바위는 풍우 때문인가 좌골이 푹푹 파이고 움푹움푹 들어간 곳이 어찌 보면 사람이 서있는 듯한 모습이라 '서다 입(立)'자 선바위인지 알았더니 그 앞 표지 설명을 보니 ‘禪(선)바위’이다.
이곳이 이 태조와 무학대사가 국토 창업을 기도하던 자리였구나 하고 생각하니 바위 모양이 무학대사가 장삼을 입고 서 있는 모습 같게도 보인다.
이 지역은 산비탈이라서 절은 다닥다닥 암자 같은 크기로 그 사이 골목 따라 찾아가야 했고, 무속과 연관 되어서 큰 시주 자가 찾아오지 않는 곳이어서인지 절들은 모두 규모와 함께 화려하지가 않았다.
이곳에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이른 아침녘인데 오늘 '부처님 오신 날 법요식(法要式)'은 10시부터라서 아내는 참배만을 하고 행사 준비를 위해 만든 관욕(灌浴)하시는 아기 석가모니의 모습을 보며 성터를 따라 등산길에 올랐다.
인왕사를 다시 내려와 철조망에 난 문에 들어서서 성을 끼고 난 길을 가다 보니 계단 가운데에 흰 페인트칠을 한 층계길이 정상을 향하여 주-욱 올라가고 있다. 캄캄한 밤에 군인들에게 길 안내를 위해서 등산 처음에서 끝까지 층계에 칠한 흰 페인트였다.
1.21 사태로 알려진 김신조를 포함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이 김일성의 청와대 폭파 밀명을 받고 청와대 뒷산까지 왔던 일이, 인왕산을 1968년부터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만들게 하였고, 향토예비군의 편성의 계기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영삼 문민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국민에게 주는 첫선물로 25년만에 개방된 산이지만 국가 안보상 지금도 곳곳에 초소가 있고 위병이 있다. 그러나 총을 든 군복의 위병이 아니라 운동모자에 사복을 단정히 입고 오가는 사람에게 친절히 웃으면서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어서 이웃집 친절한 대학생들을 만나보는 것 같이 정겹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오르는 이 산성 길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낙산과 남산과 이 인왕산을 18km로 빙 둘러 타원형으로 연결하고 있는 이 태조 때인 1395년에 쌓은 ‘사적 제 10호’로 지정된 서울성곽의 일부이다. 이 성을 쌓는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흰눈이 펄펄 내려 울타릴 만들었네.
서울은
雪(설)의 울타리
그래 서울이라 이름 하네.
그래서 ‘설울’은 '불삽'이 '부삽', '솔나무'가 '소나무', '불나비'가 '부나비' 되듯이 두 단어로 된 복합어 사이 ‘ㄹ’이 탈락되는 현상에 따라 서울이 되었다 전설이 전한다. 이런 풀이를 민간어원설이라 한다.
인왕산의 멋은 무엇보다 암산이고 암산이기 때문에 수석 같은 신기한 바위들의 모습이 많았다.
수석이 자연의 산수미를 탐한 인간 소유의 것이라면, 여기 있는 바위들이 하는 몸짓은 수석과 큰 정원석을 넘어 자연 그대로의 물형석이요, 추상석이요, 움직일 수 없는 천연그대로의 회화적인 미의 세계다.
인왕산에 오면 선바위처럼 둥근 모자 모양의 바위를 모자 바위라 했고, 돼지가 코를 든 모습이라 하여 돼지바위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인왕산 하면 지금도 떠오르는 것이 인왕산 호랑이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태종 5년에는 경복궁 내전(內殿)에, 연산군 11년에는 종묘까지 침입하는 등 민가의 피해가 많았고, 옛날에는 사람들이 무악재를 넘을 때, 호랑이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서야 함께 재를 넘었다는 것이다.
인왕산 정상은 인수봉처럼 하나의 커다란 바위로 그곳을 오르면 바로 정상이었다.
지금까지 시멘트 층계가 눈에 거슬리더니 인왕산 정상 가까이 바위를 깎아 만든 층계는 멋스럽기 그지없다. 이 층계를 만드느라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땀을 흘렸을까.
정상의 널찍한 공터 끝에 초소가 있고 그 한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있다. 삿갓바위였다.
인왕산의 가장 큰 멋은 우리 서울을 내려다보는 조망에 있다. 다른 어떤 산보다 한눈에 바라보이는 서울. 돌산이라 나무 하나 가림 없이 천지가 사방으로 팔방으로 탁 트였다.
동쪽에 북악산이 보이고 그 넘어 북한산이 보이는데 의정부 쪽의 전두환 대머리 같다는 552m 사패산, 739.5m의 도봉산 능선, 삼각산, 국민대학 뒷산인 705m 보현봉까지 선명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서울 시내의 마천루를 넘어서 아름다운 남산 뒤에 한강, 다시 넘어 관악산 등등.
우리 한강에 비하면 영국 런던의 템스 강이나 파리의 센강은 한강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아주 적은 강이다.
유럽 7개국을 흐른다는 다뉴브강이나 이집트의 나일강, 인도차이나 반도의 메콩강도 우리 한강에 비하여 크기에서도 그렇지만 아름다움에서도 견줄 바 못 된다.
이탈리아나 그리스도 그러했지만 서유럽 등에는 지평선뿐, 산이 있어도 그 산에는 나무가 없었다.
알프스의 나라를 빼고는 대부분의 유럽의 나라들은 평야뿐 산이 없다. 오죽해야 폴란드란 폴(평야) 란드(나라)란 이름이겠는가.
나는 세계를 돌아본 후에야 비로소 한국의 산하의 아름다움을 알고 내가 한국인이며 그 중에서 그 산을 사랑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로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 한국의 산하도 세계의 아름다운 산하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왕산 정상 바로 밑이 치마바위가 있다.
인왕산 바위에다 다홍치마 걸어두고
남편을
그리다 죽어
치마바위 전설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