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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 (거창, 함양, 1,190m) 산행 Photo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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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성철용 (Homepage) |
2006-08-16 03:55:45, 조회 : 513, 추천 : 0 |

황석산 산행 Photo 에세이 (2006. 8월./황암사- 식수 준비하는 곳- 정상-거북바위-조망안내판- 산내골-령암사-탁현3거리/고양우정산악회 따라) *. 화림동(花林洞)의 8담8정(八潭八亭) 일산에서 경남 함양군 안의면(安義面)의 진산(鎭山) 황석산(黃石山)을 향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35~6도를 오르내리며 기승을 부리는 유난히 더운 요즈음, 집에서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날씨에 이 무더위를 뚫고 꼭 산행을 해야만 하는가. 그보다 우리 우정산악회 일행이 산을 다녀오는 동안 그 주변의 명승지를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오랫동안 적조하였던 S 시인이 차를 가지고 황석산 기슭까지 오겠다고 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황석산 부근 명승지로는 '화림동(花林洞)의 8담8정(八潭八亭)'이 있다. 화림동(花林洞)은 일명 '안의계곡'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남덕유에서 발원한 남강의 지류인 남계천 따라 안의와 서하에 걸쳐 있는 계곡이다. 아름다운 꽃, 무성한 노송의 숲 사이에 맑은 계류가 기암괴석의 넓은 너럭바위를 씻으며 휘돌아 흘러가는 곳이라 하여 화림동(花林洞)이라 이름 한 곳이다. 제3경인 용추비경과 함께 제4경인 화림풍류는 함양8경 중에 하나일 정도로 절승(絶勝)이요 명승지(名勝地)다. 화림동 계곡은 옛날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치는 길목에 있는 곳으로 그 강변의 주변 경관이 빼어나서 쉬면서 시를 읊고 갔다는 곳이다. 남명 조식이 이곳을 자주 찾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 화림동에 있는 8담8정(八潭八亭) 중에 팔정(八亭)으로는 현재는 경상도의 정자문화를 대표하는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 4 정자만이 남계천 따라 남아 있어 옛 선비들의 운치 있는 생활을 엿보게 하여 주는데 태풍에 유실되었는가, 농월정은 안타깝게도 주춧돌만 남아 있다. 정자란 주위보다 비교적 높은 위치에다 자연을 배경으로 사방이 두루 보이는 곳에 세운다.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으로 마루를 만들어 풍류객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이러한 정자들은 이 고장 옛 선인들과 관련된 이야기로 해서 그 이름과 경치로 운치를 더하여 주고 있다. 정자들은 옛날 거창(居昌)이 고향인 S 시인(신계식)의 안내를 받아 다녀온 곳이어서 요번에는 카메라에 담아오고 싶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기행문을 쓰기 훨씬 전이어서 건성 보고 왔기 때문이다. 산행하는 사람들이란 아무리 유명한 명승고적의 옆을 지나가도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말과 같은 사람들이어서 오늘도 원효, 의상, 서산, 사명대사 등을 배출하였다는 그 유서 깊은 심진동의 용추사(龍湫寺)는 물론 10m의 절벽을 내리 꽂히는 힘찬 물줄기를 자랑하는 용추계곡 용추폭포(龍湫瀑布)도 생략하고 말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그 중의 한 부류라서 정유재란의 순국 순절의 황석산성(黃石山城)에 올라 6.25로 얼룩진 거망산(擧網山, 1184m)이라도 먼빛으로나마 보고 싶은 마음으로 생각을 바꾸고 산을 오르고 있다. 이 나이에 이 먼 고장의 산은 다음에는 올 수 없는 곳이지만, 부근의 명승지야 언제든지 차를 가지고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닌가 해서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기에는 섭섭한 일이니, 그 정자에 얽힌 옛 선인들의 운치는 생략하더라도 황석산 주변의 모습의 일부라도 사진만이라도 다시 보기로 하자. 여기 사진은 허락없이 가져온 다른 분의 작품이라 양해 하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 황암사(黃巖祠)를 지나며 우리들의 황석산 들머리는 황암사(黃巖祠, 국가 사적지 322호) 우측 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행은 역시 화암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서둘러 그냥 지나치지만 어찌 나까지 그럴 수 있을까. 그래서 멋진 솟을대문을 지나 황암사의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고 내려오다 보니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후미 리더인 산악회 조 회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일행과 같이 끝까지 가지 않고 황석산성이 있는 정상에서 도중 하산 길로 탈출할 것이니 염려 마시라. 여의치 못하면 거창에서 자고 가겠노라'고 사정사정하여 앞서 보내고 맨 후미에서 혼자 등산하는 자유를 얻었다. 후미에서 혼자 산행한다는 것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고, 남에게 아무런 간섭 없이 초행길의 이 자연 속의 나를 내 몸이 허하는 속도로 여유롭게 산행을 할 수 있어서 좋다. 게다가 '일행과 너무 떨어지지 말아야 하지- ' 하는 마음이 휴식을 제한하여 줌으로써 어느 정도의 속도를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도 부족한 시간은 점심을 행동 식으로 함으로써 앞서간 이들과 보조를 맞추자는 것이 내 체력과 타협한 나의 궁색한 속셈이다. 황암사에서 정상까지는 5.2km로 2시간 30분 코스였다.
 황암사 사당문은 굳게 잠겨 있는데 당우 좌우에 '황석산성순국선열충혼비'와 ''황암사기념중건비'가 나를 반갑게 맞는다. 이곳은 이 고장 선열들의 의총과 사당을 모신 민족혼이 빛나는 성지였다. 왜놈들이 조선시대 임진란에 이어 정유재란 때 14만의 대병력이 총포로 무장하고 재침하였을 때였다. 영호남의 요충지인 황석산성에 침략한 2만 7천명의 왜군을 맞아 수성장 곽준 안의 현감과 조종도 전임 함양 군수가 창칼로 무장한 의병과 부녀자들 500여명과 함께 3일 동안 처절한 공방전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순국한 영령을 모신 곳이 황암사다. 그때 그 선열들의 애통한 얼이 베어있는가. 쓰르라미가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금년 유별난 찌는 듯한 더위가 너무 맵다고 매미가 맴맴 울고도 있었고-. 원추리꽃이 피어 있는 봉전천 계곡을 따라 잡초를 헤치고 완만한 산길을 오르다 보니 황암사에서 2.1km 지점에 '식수 준비하는 곳'이란 이정표가 있다. 지금부터 계곡을 버리고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 찜통 폭염 속의 산행 금년 들어 제일이라는 더위를 뚫고 잡풀을 헤치며 산을 오르다 보니 땀이 전신을 적신다. 모자를 벗고 대신 등산 스카프를 이마에 둘렀는데도 땀은 눈속까지 스며든다. 도중 도중 만나는 개울에 타월을 적셔서 짜지도 않고 목에 걸쳐서 온 몸을 젖게 하였건만 더위는 가시지 않는다.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부터는 마시려고 가져온 물을 수건에 뿌리면서 겨우 겨우 황석산이 보이는 능선에 도달할 때까지 아마도 50번은 더 쉬면서 오른 것 같다. 그런데 큰일 났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중요한 고비마다 카메라가 이상을 보이듯이 디카를 위해 배터리를 4개나 준비해 왔는데 모두가 수명을 다한 모양이다. 메고 다니는 카메라에 땀과 함께 흘러내린 카메라가 젖어서인가. 그보다 그저께 북악산을 다녀와서 엊저녁 늦도록 기행문을 쓰다가 배터리쓰 충전에 소홀한 것 같다. 할 수 없이 카메라 폰을 사용해 보지만 그걸 인터넷으로 사용해 본 적이 없어 그 용법이 영 자신이 없다. 등산 서적에서 권하는 이 산의 등산 정 코스는 용추사를 거치는 코스인데 아무래도 도중에 탈출 코스로 하산을 서둘러야 될 것 같다. 등산코스 :* 1코스 : 서하면 우전마을 ⇒ 황석산성 서문 ⇒ 황석산 ⇒ 거망산 ⇒ 용추사 일주문 (6시간 소요) *2코스 : 용추사 일주문 ⇒ 사평분교 ⇒ 거망산 정상 ⇒ 황석산 ⇒ 서하우전 마을 (4시간 30분 소요)
*. 선열의 얼이 깃든 황석산(黃石山)
함양군의 '안의(安義)'는 본래 '안음(安陰)'이라 부르던 고장이었다. 그런데 안의현에 사는 7세 여아가 아이를 낳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자 조선 영조는 '안음(安陰)'을 '안의(安義)'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그 고장의 음(陰氣)가 너무 센 것을 걱정해서였다.
이 고장이 말하는 황석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황석산은 거창 남녘에 솟은 범상치 않은 바위산이다. 백두대간 줄기에서 뻗어 내린 네 개의 산 기백·금원·거망·황석 가운데 가장 끝 자락에 흡사 비수처럼 솟구친 이 봉우리는 덕유산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가을철에는 거망에서 황석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광활한 억새밭이 특히 장관이다. 황석산은 향양군 안의(安義)의 진산(鎭山)으로 정상은 북봉과 남봉(정상)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두 봉우리 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봉으로 이루어졌다. 그 산정 일대에는 황석산성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수풀 길을 헤치고 능선을 바라 오르다 보니 거북이 등 같이 조각 조각 갈라진 무늬의 바위 위에 오가는 사람들이 서낭당 같이 돌을 얹어 놓았는데 거기서 비로소 황석산(黃石山) 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른 쪽에 높이 솟아 있는 피라밋 모양이 황석산 같은데 왼쪽의 봉은 그보다 크고 거대한 바위가 허리를 들어내고 있고 머리에는 푸른 숲을 이은 것이 우람하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간 곳에 이정표가 있다. 드디어 황암사에서 4.2km를 올랐으니 정상이 1.0km 정도가 남은 것이다. 고추잠자리 같이 주저앉을 자리만 있으면 수없이 앉아 쉬엄쉬엄 기진맥진 가다보니 정상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우리 일행이 바위 끝마다 서서 정상 정복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거기서 점심을 하고 있나 보다. 그 정상까지 0.6km 남았다는 이정표 옆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데 저 아래 산기슭에서 청아한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들려온다.
*. 황석산성(黃石山城)
출처: 한국의 산하 황석산성순국선열충혼기념비/구상 정상 부근까지는 약간의 경사가 있는 오름 능선 길이다. 그 능선 끝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황석산성이다. 봉우리와 계곡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 동문(東門)이었다. 내가 알기에는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가 백제와 대결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산성인데 아쉬운 것은 복원한 산성이라 고풍스런 맛이 전혀 없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정유재란 때 조총으로 무장한 왜놈들을 맞아 싸우다가 동문을 지키던 조방장(助防將) 김해부사 백사림(白士林)이 도망치는 바람에 성(城)이 함락되고, 그로 인하여 함양군수 조정도와 안의현감 곽준과 그 군민 500여명이 장렬히 순국한 곳이 황석산성이었다. 산성은 황석산 정상을 두고 칼날 같은 자연 암릉을 보완하면서 높이 3m, 길이 2,700m로 쌓아 이어 주고 있다. 정상은 등산로에 있지 않고 안부에서 가파른 경사의 순 암벽을 타고 50m나 더 계속 올라야 있는데 튼튼한 굵은 흰 밧줄이 있어서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위에 지친 등산객들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았다. 정상에 서니 직사각형의 정상석은 작은 막대기를 하나 세워 놓은 것 같이 초라하고 나무 한 구루 없는 뾰족한 바위들의 모임이라서 변변한 앉을 자리 하나 없지만 가리는 것 없어서 전망만은 일품이었다. 출처 칠전팔기, 피바위 그 중에 황석산성이 동문에서 남문으로 뻗어 있는데 그 코스 따라 가면 왜놈과 싸우다가 패할 때 몸을 던져 절개를 지켰다는 '피바위'가 있고 그 길은 거연정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산 너머 산이요, 그 산 너머 또 산이라 그 산하 한 가운데 나라 위해 바친 목숨 500명 충혼의 넋이 ' 피바위'를 맴돈다.
정상에서는 올라온 방향으로 곧장 절벽을 받줄 타고 내려갈 수도 있다지만 일행을 따라 이를 피해 내려왔다. *. 거북 바위에서 출처: 한국의산하 이런 무더위가 아니라면 저 북쪽의 거망산(擧網山, 1184m) 으로 해서 여기서는 꼭 들러야 할 용추사 터와 용추폭포를 보던지, 더 준족(駿足)이라면 기백산(1331m), 금원산(1353m)까지 욕심 내 보련만 거긴 일찌감치 포기하고 하산길을 찾는데 능선 위에 거북바위가 이런 마음 위로하려는지 나보고 가란 듯이 서 있다. 그 건너 보이는 것이 거망산이다. 거기서 조금 더 가서 전망 안내도가 있고 그 밑 안부가 바로 탁현으로 가는 하산길이다. 그런데 그 하산길은 내 평생 등산에서 가장 어려웠던 코스 같다. 가파른데다가 너덜겅이고, 금년 유난히 많이 온 장마 비에 길이 아예 없어져 버린 위험한 급경사 길이었다. 산봉이 있듯이 끝이 있겠지 하며 내려오는데 끝은 없고 분명 산내골인데 계곡도 없었다. 그러다 만난 계곡은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탁현을 흐르는 지우천(知雨川)에 몸을 담그고 금년 처음 미역을 감으면서 나는 마냥 행복하였다.
나는 황석산을 다녀와서 대상포진이 눈에 와서 일주일 이상이나 병원을 다니고 있다. 더위에 내 또래로는 너무 무리를 한 것 같다. 그런데도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후에도 북악산과 주왕산을 다녀왔으니 산을 사랑하는 이 행복한 중병(重病)은 언제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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