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일본 여행/ 일본 속의 한민족(韓民族)(1)

ilman 2017. 3. 28. 09:52

*. 일본이란 나라  

  일제 강점기에 인천에서 태어나서 소학교(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을 때 나의 이름은 나리다 데스요(成田哲鏞)였다.

내가 4살 때인 1940년에 일제는 한국을 영원한 일본의 영토로 삼기 위해서 조선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단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창 씨(創氏)란 내선일체(內鮮一體), 동조 동근(同祖同根)이라는 미명 하에 한국인의 성(姓)을 일본식 성(姓)으로 고치게 한 것이다.
당시 우리들은 학교에서 일본어 사용을 하지 않고 우리말을 쓰면 일본 선생에게 호된 기합을 받아야 했다.
일본어를 쓰다가 적발된 우리 반 친구 중의 하나를 얼음 위에 무릎을 꿇려놓고 오랫동안 손을 들고 있게 하는 바람에 무릎이 마비되어 평생을 소아마비자처럼 보행에 자유롭지 못하게 된 친구도 있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는 손기정의 일장기 말살 사건이 있던 다음 해인 1937년이었다.
이 해부터 일본제국주의 자들은 학교와 관공서에서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였다.
당시 학교 교육의 목적이 완전한 식민지 국민 양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침마다 일본 천황이 있는 쪽을 향하여 머리를 숙여야 했고 때때로 '덴노 헤이카 반 사이!'를 외쳐야 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덴노헤이카 만세'를 '망세(亡歲)'로 부르던 기억이 새롭다.   
  일본은 산이 많은 나라다.
산악국가인 스위스는 국토의 26%만이 평야인데, 일본은 그 평야가 20%뿐이라서 자고로 농산물로 자급자족을 할 수 없는 나라였다.
그래서 역사 이래 수 없는 왜구들이 우리나라는 물론 동남아까지 진출하여 노략질을 일삼아 왔고, 그때 그들이 노린 것이 식량이었던 것이다.
  한일합방 후 35년 간에도 일제는 한국에서 수많은 곡식을 공출하여 갔다. 그들은 자기들의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서의 식민지 한국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수탈하여 간 곡식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배가 고픈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밥 대신 늘 흰 죽으로 배고품을 달래야 했다. 한창 자랄 나이에 못 먹어서 70대가 된 우리들 세대의 키는 왜놈들처럼 작은 편에 속한다.
그 시절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라서, 각 가정에서 조상 대대로 써오던 놋쇠로 된 밥그릇, 수저, 요강, 세숫대야를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뺏어 가고 대신에 사기로 된 그릇을 주었다.  
  나는 일어(日語)를 하지 못한다.
'가다가나'를 배우던 소학교 1학년에 8. 15를 맞았기 때문이고 가족 중에 일어를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를 살다 가신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일어를 모르는 것을 평생 자랑하며, 검은 두루마기와 검은 신을 신고 살았다니 나도 그런 시대라서 그렇게 살아온 셈이다.
당시 우리들이 마음속으로 소곤거리며 존경하던 영웅은 그들이 완미지도(頑迷之徒)라고 폄하하던 우리의 독립군(獨立軍)이었고, 우리 사회가 해방 직후 가장 미워하던 족속들이 친일파(親日派)와 모리배(謀利輩)였기 때문에 일어를 배우겠다는 생각이 전연 없었다.  
  그렇게 우리민족에게 악독하기만 하던 일본이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일본이란 나라는 우리나라 동쪽 태평양 상에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홋카이도(北海島), 구주(九州) 등 네 개의 큰 섬과 6,500개의 작은 섬을 가진 나라다.
땅의 크기(37만 2천 313 km²)가 남북한을 합친 한국(22만 1,000 km²)보다 1.7배, 남한(9만 9,015 km²)보다 4배가량이나 큰 나라요, 인구가 한국보다 4. 5배나 많은 1억 2천 5백만으로 세계에서 9번째로 많은 사람이 사는 나라요, 1인당 GDP(국민생산량)은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세계 11위인 한국보다 약 7배나 높은 선진국이었다.
 

세계를 둘러 보았더니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한 수출은 오히려 일본 경제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전자 제품 40%, 자동차 제품 50%, 기계류 45%의 부품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여야 한다니 말이다.  

  좋은 이웃과 함께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 반대로 나쁜 이웃이었다. '나쁜 놈'이란 말은 '나뿐인 놈'이란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풀이를 할 수도 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사는 이웃에게 그 힘 때문에 강제로 우리의 보금자리마저 빼앗겼을 때의 불행을 더 말하여 무엇하랴.
동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관운장(關雲長)은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과거 역사상 우리의 이웃 일본은 약자(弱者)에게는 강하고 강자(强者)에게는 한없이 약한 못된 무리들이어서 우리가 마음속으로 저주하여 오던 족속들이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란 말속의 '약육(弱肉)'은 언제나 우리 민족이었고 그 고기를 즐겨 뜯어먹은 자들이 과거의 왜놈이었으니 말이다.
고려(高麗)도 왜구들의 등쌀에 망하였고, 한국의 그 귀한 모든 문화재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니 일제 35년 간의 식민지 생활을 몸소 겪은 우리들이 어찌 이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일본은 지금도 외치고 있다. 

  -35년 간의 한국지배는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준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 각국을 해방시키게 한 전쟁이었다.

 일본 서점에 들러 일본 지도를 보았더니 독도(獨島)는 '竹島'라고 써놓고 국경표시를 거기까지 하여 놓고 있었다.
  나는 정년퇴직하고 수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해외 여행기를 150 편 이상을 써왔지만 그중 이웃나라 일본은 대마도(對馬島)뿐 일본 본토는 처음 간다. 
  우리들 세대에게는 그렇게 마음속 깊이 원한이 쌓인 민족이 일본이기 때문에 이들 나라에 외화(外貨) 한 푼이라도 주고 오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 내가 조선일보 주최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부산에 왔다.
요번 가서는 될 수 있는 한 그 동안의  일본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오고 싶다. 
그 미움의 자리에다  그들이 어떻게 하여 우리보다 잘 사는 세계 선진국이 되었나를 배워올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