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수원 화성(水原華城) 이야기

ilman 2014. 4. 25. 15:13
 
수원 화성(水原華城) 이야기
 
*. 수원의 어원
   수원(水原)이란 이름은 고구려 때에는 ‘매홀(買忽)’, 신라 때는 수성(水城), 고려 때는 수주(水州)라 하였다.
이는 모두 '물골' 즉 '물의 고을'이란 뜻이지만 막상 수원(水原)에 와서 보니 이름처럼 물이 많은 고장이 아니라 물이 귀한 지역이었다.
장지천(長芝川), 원천천(遠川川), 수원천(水原川)이 합류하여 황구지천(黃口池川)으로 흐르고 있지만 그 지류들은 한결 같이 여름철이 아니면 겨우 바닥을 적시는 정도이어서 인구  120만(2010년)이 사는 이 대도시의 식수를 먼 한강 팔당에서 끌어다가 먹는 실정이다. 
 그래서 수원이란 이름은 물이 많아서 생긴 이름이 아니라 물이 부족한 고장이어서 수원(水原)이란 이름이 생긴 것 같다.
그래 그런지 전원도시였던 시절 수원에는 '파장저수지', '광교저수지', '일왕저수지', '일월저수지', '서호저수지' 등 호수가 많았다. 
 전철 수원역에서 내려 수원의 중심가인 매산로와 팔달로를 거닐다 보니 서울 명동 이상으로 사람들이 붐비는데 유난히 외국인들도 눈에 많이 뜨인다. 수원은 옛날에 보던 전원도시, 교육도시가 아닌 대도시로 발전한 도시였다.
 
 *. 효원의 도시 수원
  '개성(開城)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는 풀도 나지 않고, 수원(水原) 사람은 발가벗고도 80리를 뛴다.'는 말이 있다. 
전자는 개성 사람들의 상혼(商魂)과 절약 정신을 뜻하는 말이라지만, 후자는 수원 사람들이 억척스럽고 부지런하다는 뜻과 함께 효(孝)와 관계 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수원에서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온 청년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옷도 안 걸친 채로 서울과 수원 사이의 80리 길을 단숨에 달려왔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수원을 ‘효의 도시’라고도 한다. 수원시민의 날인 10월 15일에는 전국의 효자 효녀를 선정하여 시상하며 효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나, 팔달산(八達山)의 서장대 아래 ‘효원의 종’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다는 수원화성 성곽을 구경하러 팔달문을 거닐다 보니 시민들이 앉는 의자에 함께 앉아 익선관(翼善冠을) 쓴 왕이 막걸리를 기울이는 동상이 있다. 정조대왕 상이었다.

그 옆에 그 설명 '不醉無歸(불취무귀)'란 말이 이에 어울려 멋을 더한다.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은 정조대왕이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들이 풍요로운 삶을 살라는 말일 것이니, 정조의 애민사상(愛民思想)을 엿볼 수 있는 말이렷다.
 
*. 사도세자와 정조대왕 
 수원이 이만큼 발전하게 된 데에는 정조대왕이 뒤주 속에 갇혀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효심 이야기를 먼저 하여야 겠다.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이복형인 효녕세자(孝寧世子)가 요절하자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신질환으로 인한 갖가지 기행(奇行)을 일삼다가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받았다. 
영조는 처음에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서인(庶人)을 만들고 이어 뒤주 속에  8일동안 갇혀 굶어 죽게한  역사상 가장 비운의 왕자였다.  
사후에 이를 후회한 영조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주어 그 넋을 위로해 주었다.
이를 그의 아내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가 기록한 글이 '한중록(閑中錄)'이다.
사도세자와 그 세자비였던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로 태어난 정조(正祖)는 영조의 뒤를 이어 25세에 즉위하여 49세에 죽어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화성시 융릉(隆陵) 서쪽 언덕 건릉(乾陵)에 묻힌 조선 제 22대왕이다.
 정조는 당쟁으로 인하여 비명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고혼(孤魂)을 위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을 벌여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도 하였다.
먼저 양주(楊洲)의 배봉산(拜峰山)에 모셨던 유해를 수원 남쪽 화산(花山) 기슭으로 천봉(遷奉)하여 융릉(隆陵,舊, 顯隆園)이라 하였다. 그 근처의 용주사(龍珠寺)를 중수하여 그 원찰(願刹)로 삼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게 하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여 넋을 위로하며 맺힌 한을 풀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배봉산 기슭의 주민들을 지금의 수원으로 옮겨 지금과 같은 계획적인 도시로 만든 것이 무엇보다 정조의 큰 업적이다.
정조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인 신해사옥(辛亥邪獄,1791년)을 일으켜 천주교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했으나,  한국의 르레산스라고 불릴 정도로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하기도 한 왕이었다.
정조의 업적 중에 가장 큰 것이 국력을 기울여 만든 수원 화성(水原華城)이다.
 
*. 유네스코 지정 수원 화성(水原華城) 트레킹
 수원화성을 아무것도 모르고 가면 그게 그것 같다.
각가지 성루가 많기 때문에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성곽(城郭) 길만 다녀오는 격이 되고 만다.
 다음은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수원화성(水原華城)에 대한 그 기초 지식을 정리한 필자의 성의다. 모든 지도는 위쪽이 북쪽이니 이를 참고고 동서남북을 기억할 일이다.
 수원화성은 읍성으로 둘레 5,520m의 높이 4~6m로, 산성(山城)이 아니고 평지의 도심(道心)에 있는 평산성(平山城)이다.
위 그림 서쪽의 파란 녹색지대는 팔달산(八達山 143m)으로 일명 탑산(塔山)이고도 하는 산이다. 
팔달이란 명칭은 이태조가 지은 말이다.

 -조선 태조가 정란을 피하여 이 산 밑에 은거하던 이고(李皐)에게 태조가 벼슬길에 나오기를 권하자, 이고가 말하기를 '집 뒤의 산이 들 가운데에 있어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사방이 내려다 보이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사양하였다. 이에 태조가 이 산을 팔달산이라고 명명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서 보면 싸움은 성 밖으로 나와 벌판에서 서로 자웅을 겨루는데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난리가 나면 살던 터전을 버리고 성에 들어와서 함께 모여 싸우다 보니 전쟁이 날 때마다 인명 피해가 컸다.  수원화성은 도심(道心)에 있는 평산성(平山城)이라서 어느 성(城)보다 외적의 침입을 위한 방어 기능이 다양하다.
이 화성 탐방은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다. 성밖을 도는 길이요 또 하나는 성 위를 걷는 길이다. 
지도 중간에 남북으로 긴 것이 수원천(水原川)인데 우리가 있는 팔달로 근처에 있는 것이 홍예(虹霓, 무지개) 9개가 있는 남수문(南水門)이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것이 북수문(華虹門)이다.
아내와 나는 남수문을 기점으로 트레킹을 시작한다.
성터 따라 오르니 마주치는 누각이 있다. 동남각루(東南角樓)였다.

 각루(角樓)란 군사적 요새지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만 든 곳을 말하는데 수원화성에는 동남각루,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서남각루(화양루), 서북각루 4곳이 더 있다.
수원화성에는 사방에 사대문으로 팔달문(남), 창룡문(동), 장안문(북), 화서문(서)를 두었다.
 거기 있는 이정표를 보니 내가 가는 것은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평산 성의 성길이라서 전망이 좋았다.
문 위로 연결되어 팔달문에 이르는  굽어보는 성터길도 그랬고, 팔달산에 만개한 벚꽃 길도 그랬다.
여기서 동대문 격인 창룡문까지 가는 길에

"동삼치- 동이포루- 봉돈- 동이치- 동포루- 동일치 -동일포루" 를 거쳐야 하는데 성(城)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이어서 그게 그것 같아 구별하기가 힘든다.
 위에서 '치'가 3번 나왔는데 치는 치성의 준말이다.

치성(雉城)
이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도록 한 구조물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군을 감시하고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 치'는 꿩 '치(雉)'자로 꿩은 자기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雉城)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수원화성에는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 서일치, 서이치, 서삼치, 서남일치, 서남이치, 남치, 북동치 등 10개의 치성이 있다. 
 포루(鋪樓)란 위화 같은 치성(雉城)위에 설치한 누(樓)이다. 평상 시에는 군사들의 대기나 휴식의 역할을 하다가, 유사시에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때 쓰이는 누각이다.
수원화성에는  동일포루, 동이포루, 동북포루, 서포루, 북포루등 5개의 포루(鋪樓)가 있다.
 
포루에는 포루(鋪樓)와 포루(砲樓)가 있다.
후자 포루(砲樓)는적이 성벽에 접근하할 때이를 막기 위해서 화포를 쏠 수 있도록 치성을 발전시켜서 만든 형태다.  수원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5개의 3층 포루가 있는데 사방으로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가 있다. 열쇠모양의 구멍으 대포를 쏘는 구멍이다.

봉돈(烽墩)이란 한 마디로 봉수대(烽燧臺)를 말하는 것으로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평상 시에는 5개의 횃불 구멍 중 남쪽 첫 번째에서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올려 이상이 없다는 봉화 신호를 보낸다.
 
 
 

 

 
 
 
4대문 중 동대문격인 창룡문(蒼龍門)을 지나니 시야가 확 트인다. 직진하면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이 있는데 보수중이다. 
중국 요동지방에 있는 평돈(平燉)을 본떠 벽돌로 동그렇게 돈대를 만들어 쌓았다는 한국에 오직 여기뿐인 공심돈대를 못보고 지나친다.
  드디어 동장대(東將臺, 연무대)가 나타난다.
이 성에는 2개의 장대가 있는데 팔달산 정상 서장대와 더불어 성 주변의 이상 유무를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라서 넓다란 연병장이 있다. 그래서 일명 연무대라 칭하는 곳이다.
바로 그 아래가 화성열차 승차장이고 그 승차장 앞이 국궁(國弓) 활쏘기 체험장이다. 

 

 화성쳘차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머리에 왕이 타는 가마를 형상화한 3량의 열차를 달았는데 위 수원화성 안내도에서의 붉은 줄이 화성열차가 가는 코스다.
 편도 30분 소요에 성인 1,500원씩 받고 있지만 공휴일에는 1시간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
 동장대 아래에는 암문(暗門)이 있다.
수원화성에는 동암문, 서암문, 서남암문, 북암문 4개의 암문(暗門)이  있다. 이 암문이 장대(將臺) 근처에 있는 것을 보면 적에게 들키지 않고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할 수 있게 만든 군사시설이 암문이기 때문인 것 같다
. 그래서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암문을 만들어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 둔 돌과 흙으로 적이 모르게 암문을 메워 폐하도록하였다.
 
거기서 얼마를 더 가니 멋진 동북각루(방화유수정)능비가 아까 본 수원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수원천(水原川)의 남수문(南水門)에 이어 북쪽에 있는 북수문(北水門)이다.
북수문은 일명 화홍문(華虹門)이라고도 하는데 '화(華)'는 화성을, '홍(虹)'은 무지개를 뜻하는 말이다. 장마철 물이 넘치면 물보라를 이루며 수문이 넘쳐나는 모습을 그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수원의 랜드마크가 되는 카메라 포인트 지점이기도 하다. 

 

드디어 수원화성의 정문인 규모가 웅장한 장안문(長安門)이다.
정조가 13차례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자)의 능행을 오갈 때마다 수원화성에 들릴 때 이 문을 이용하였다는 문이다.
성문 밖에는 반달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항아리를 반을 쪼갠 것 같다해 붙여진 이름으로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이다.
그래서 이 장안문에는 성문 좌우에 방어시설인 적대(敵臺)를  만들어 성문을 보호하고 있다.  
                                 
장안성 좌우에 북동적대와 북서적대가 있다.
적대(敵臺)란   성문이나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그 두 적대에는 다른 곳에 없는 대포가 우랍스럽게 서 있다. 북동 적대의 홍아포(紅夷砲)는 사정거리 700m에 달하는 화기로써 성곽 또는 포루 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던 대포다. 적대는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기 위해 성곽보다 높게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 북동포루-북동치-북동적대-북서적대 북서포루- 북포루'를 지나 성에 2개밖에 없다는 3층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에 이르렀다.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望樓)였다. 
건물 아래 치성(雉城)은 돌로, 위쪽은 전돌(벽돌)로 쌓은 것이다. 그 앞에 서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던  정조가 만족하며 하던 그 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 바로 옆이 보물 제403호라는 서대문 격인 화서문(華西門)이다. 
 
화서문(서문)은 옛날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던 문이었는데 석축으로 쌓은 무지개문 2층에 문루가 있다. 이 문은 화성 어느 문보다 원래 모습을 그래로 간직하고 있어서 보물 제403호로 지정된 문이다.  그 문을 지키는 옹성들이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과 어울려 한 바탕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데 이를 앎인가. 수백 마리의 비둘기가 그 문루를 지키고 있다. 화서문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재공이 쓴 것이다.
화서문(華西門)부터는 성벽을 우측에 낀 팔달산의 오름길이 시작되는데 지는 개나리와 벚꽃 넘어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가 우리 노부부를 물끄러미 굽어보고 있다.
벚꽃이 꽃비처럼 내리는 산성를 오르다 보니 금년 봄도 이렇게 가는구나 하였다. 
 그 벚꽃은 필 때보다 피어 있을 때가 아름답더니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낙화 모습도 또한 아름답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화의 모습이 아름다운 눈송이 같다.
벚꽃보다 먼저 피는 목련은 꽃입(꽃잎)을 하늘을 향하여 뾰족히 내밀며 필 때의 그 찬란한 아름다움과는 달리 지는 모습은 너무 지저분하고 추하다. 그래서 나의 지금 소원은 목련 같이 태어나 살다가 벚꽃 같이 지고 싶다는 것이다.
드디어 이 화성의 일주를 마치는 팔달산 정상에 오르니 서장대(西將臺)와 서노대가 나란히 우리를 반기고 있다. 서장대도 동장대와 같이 성 주변의 이상 유무를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라서 그 주변에 넓따란 연병장이 있다. 노대(弩臺)란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해서 높게 지은 방어 시설로 이 성에 동북노대와 함께 2개가 있다.  
팔달산은 수원시의 중앙에 있는 산이라 사통팔달의 굽어 보는 수원의 전망에 시야가 시원했다.
팔달산에서 굽어 보던 화성궁을 향한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궂은 비였다.
그 비를 맞으면서도 부지런히 행궁의 이모저모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다 보니 아뿔사 행궁 옆에 있는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정조의 어진을 모신 '회령전'을 지나쳤구나.
여행을 마치고 보면 언제나 뒤내 남는 씁쓸한 뒷맛이 있다. 한번 더 와 성밖도 둘러 보고 화홍문과 창룜문 근처에 있다는 벽화거리를 보고 가라  부여 잡는 손길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