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성북동 북정마을 이야기

ilman 2014. 2. 17. 12:43

성북동 북정마을 달동네 이야기

 

 며칠 전 나는 서울 시내에 마지막 달동네라는 성북동 북정마을을 다녀왔다.

 가서 보니 그곳은 내가 결혼해서 난생처음으로 내 집을 사서 살던 동네였으니  나는 달동네 출신 시인(詩人)이요, 여행작가(旅行作家)라서 남보다 한(恨)이 많았던가 보다.

 

*. '북정마을'의 어원   
서울 성북동의 북정마을을 소재로 영화 한 편 만들고 싶다는 KCCA  신(申) 회장 따라 북정마을을 가려고 4호선 한성대역(漢城大驛) 6번 출구로 나와서 3번 미니 마을버스를 타고 우리는 성북동 북정마을을 향한다.

옛날 같으면 85번 타고 가다가 성북초등학교 앞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삼선교를 지나니 옛날의 개천이 복개된 도로를 지나 미니버스는 30도 이상 경사의 언덕길을 굽이굽이 돌아 이 마을에서는 가장 넓다는 조그만 공터인 종점에 우릴 내려 놓는다. 거기가 북정마을의 중심가였다.
거기에는 구멍가게 하나, 카페도 하나가 있는데 겨울이라선가 카페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그 마당가에 우뚝 서있는 도나무통의 구식 난로를 보니 여기가 북정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같은 마당인가 보다.

주위 곳곳에는 개발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요란하다. 

이 북정마을에 최근 나는 두 번째 온다. 

 처음에 왔을 때는 이곳이 내가 젊어 살던 동네 근처려니 하고 왔더니 알고 보니 금년  48세가 되는 큰딸을 낳은 곳이 바로 북정마을이었다. 그때는 저기 보이는 성곽도 쌓기 전이었고 북정마을이란 이름 아닌 그냥 성북동 산동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5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 곳에는 옛 친구 차봉완 씨가 살고 있어서 만나 술 한 잔 하며 옛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물어 물어 찾아갔더니 무정한 세월은 벌써 그를 앗아 갔고 그의 부인만이 병든 몸으로 나를 반갑게 맞는다.

그런데 왜 이름을 '북정마을'이라 한 것일까?   

 그 어원이 무엇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공터 북쪽에 옛 사진을 전시해 놓은 곳을 가보니 그 실내 귀퉁이에 메주 크기 모양의 상자를 만들고 이를 집으로 묶어 놓은 것이 있다. 그 밖에는 맷돌 몇 개가 보이고, 

 다음은 북정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다가 문헌에서 찾아본 그 어원(語源)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이다. 

 

- 조선시대에 궁중에 바치는 메주 쑤는 권리는 지금의 청운동 창의문(彰義門, 일명 紫霞門)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는데, 조선 영조 44년부터는 북정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 권한의 일부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 후 온 마을에 콩을 삶는 소리가 '보글보글' 들렸고 분주히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이 '북적북적'댔다. 하여 그 소리를 본 따 이 마을 이름을 '북적마를'이라 하다가 우리말 음편(音便) 현상에 따라 '북정마을'이 되었다니 북정마을은 순우리말 이름이다.

이 마을 노인회장 명함에 한자로 '北亭分會長"이라고 쓴 것을 보니 순우리말 '북정'을 한자로 음차(音借)하여 '北亭'이라 쓴 것 같다. 그래서 이 북정마을에는 정자가 여럿이 있나 보다. 

이 마을을 비하(卑下) 하여 '똥골'이라고도 한다. 옛날 내가 살던 이 마을에는 지금처럼 개천이 복개가 되지 않고 실개울이 이 마을 중심을 갈라 흐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인가 장마가 와서 개울물이 좔좔 흐르는데 갑자기 똥냄새가 마을에 진동했다. 위 동내에 사는 어느 집에서 돈을 아끼려고 흐르는 물에 인분(人糞)을 퍼 버린 모양이다. 그런 일이 자주 있어서인가 '똥골'이란 창피한 이름이 생긴 것 같다. 북정마을을 찾아온 사람들은 타임머신(Time Machine)을 타고 우리나라의 1960년, 70년대로 되돌아온 듯한 가난한 서민들이 사는 동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좁디 좁은 비탈 골목길이나 닥지닥지 붙은 마당 없는 집들 하며, 이를 아기자기 정성껏 꾸며 놓은 등등으로 해서 이 마을(성북로 29길)은 서울시가 선정한 '2013년 우수마을공동체'로 뽑힌 곳이다. 이 고장에 독립운동가, 시인이며 승려인 만해 한용운 님의 가옥 심우장(尋牛莊)이 있어서인 것 같다.  

소설가 상허 이태준(李泰俊) 가옥(서울시민속자료 제11호)이 있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은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달밤>, <돌다리>, <황진이> 등의 작품을 집필한 소설가다. 

 이태준은 정지용, 가람 이병기와 더불어  '문장'지에서 소설 분야를 맡아 곽하신 , 최태응(崔泰應), 임옥인  등을 추천해준 광복 이전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한국 대표적인 소설가다. 

  이 성북동 일대는 1930년대 서울이 확장되면서 주거지로 개발되었는데 지금은 500호의 서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옛날 내가 이 근처에 살 때는 지금처럼 성곽이 없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성을 새로 중축한 것이다.서울시는 이곳을 민속촌이나 한옥마을 같은 명소로 개발하려는 모양이다.저 현수막들은 그래서 주민들이 기득권을 찾고자 서울시에 맞서서 데모하는 현수막 같다.

처음 왔을 때 우리는  북정마을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란 토박이 전직 고교 강 선생님을 구멍가게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홀로 왔다면 그 분이 말하는 

이 고장의 역사를 담아 전시하고 있다는 미술관도 가 보고, 내가 살던 집도 찾아보고, 1960, 70년대 같은 이발소에서 머리도 깎으며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함께 온 동료 따라 심우장을 향한다.

심우장(尋牛莊)은 시인 만해 한용운(1879~1944 64세)이 1944년까지 살던 집이다.

일본 강점기에 일인(日人)을 미워하여 당시 일어를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망국의 서러움을 검은 고무신, 검은 두루마기로 표현하며 평생 사시던 분이다. 3.1 운동에서는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문'을 태화관 앞에서 낭독하고 서대문형무소로 직행하신 분이기도 하다.

심우장은 남향을 하지 않고 북향(北向) 하고 있다. 미운 놈은 등지고 앉듯 왜놈들의 본거지인 조선 총독부들 등지고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북은 온돌방 그 오른쪽에 부엌이 있다. 부엌 뒤로는 식사를 준비를 하는 공간인 찬마루방이 있다.

 심우장에 가서는 향나무를 보고 올 일이다. 
만해 한용운 시인이 직접 심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심우장은 전체 규모가 북쪽으로 향한 기와집이 심우장 본체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부엌이 있는 5칸에 불과한 작은 집으로 한용운 서재였던 온돌방에는'尋牛莊'이란 액자가 걸려 있다.

'尋牛'(심우)란 '심우도((尋牛圖)'의 준말로 불도(佛道)의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동자가 소(牛)를 찾는 과정에 비유한 불교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한용운이 만년을 보낸 심우장은 화려함보다는 소박한 집이다. 여기서는 그분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지 관광객을 위해 화려하게 치장한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정마을은 고향 같다.

지나가는 길에 들린 마을이 아니라 찾아 온 길이라서 그런가.  마음이 울적할 때, 옛날이 그리워질 때 찾아올 수 있는 고향 같다.

형편이 닿는 대로 주머니를 맘껏 열어도 아깝지 않은 그런 고향 사람들이 사는 마을 같다.
내가 달동네 살던 사람이라 그런가. 달동네 출신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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