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전남 보성(寶城) 기행

ilman 2013. 5. 22. 06:45
전남 보성(寶城) 기행 Photo 에세이 /'한국수필작가회' 09년 문학기행
                   
(2009. 5. 9/녹차밭-조정래문학관-서재필공원-대원사)

*. 보성 이야기
 사진출처: 전라도여행닷컴
  예로부터 전남 보성(寶城)은 살기 좋은 고장이라 한다.
보성은 한반도 남해안의 중앙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고, 한반도 남녘이라서 살기 좋은 기후다.
벌교 포구에서는 각종 수산물이 들어와서 먹을 것이 다양하며, 보성 평야에서는 오곡이 무르익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보성은 한자로 보배 '寶(보), '寶城'이라 쓴다.
 보성은 백제 시대 '복흘군'이라 하다가 신라시대에는 '보성'과 '패주'라 하였다. 그러다 고려에 와서 다시 '보성'으로 바뀌오 오늘에 이르렀다.
향찰식 표기의 복흘의 '복'이 '보'로 남고, 보배란 '貝(패)'의 훈(訓) 보배가 남아서 '보배스런 고장'이란 뜻의 보성(寶城)이란 명칭을 갖게 된 것 같다.

  보성은 삼경(三景), 삼보향(三寶鄕)의 고장으로 자랑거리가 많다.
'삼경(三景)'이란 보성군에 있는 산, 바다 , 호수를 말한다.
사진제암산. 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 1경 산(山)으로는 임금 '帝'(제')자가 들어가는 웅치의 '제암산(779m)' , 율어의 '존제산(704m)', 벌교의 '제석산(563m)'을 든다.
  제암산을 예로 들어 보면 산의 정상에 3m 가량의 임금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의 모양이 임금 '帝'(제)를 닮았다.
주변의 여러 바위와 봉우리들이 이 임금바위를 향하여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 신하들 같다하여 산 이름을 제암산(帝岩山)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제2경 바다는 득량만, 보성만(寶城灣) 등의 청정해역이요, 보성강 따라 있는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그 3경(景)이 된다.

  삼보향(三寶鄕)이란 보성이 의향(義鄕) , 예향(藝鄕) , 다향(茶鄕)의 고장임을 뜻한다.
예로부터 임진왜란과 을사보호조약을 전후 하여서 충신열사 및 민족의 선각자가 많이 배출된 고장이라서 보성을 의향(義鄕)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예향(藝鄕)이라 함은 보성이 서편제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섬진강을 좌우로 하여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뉜다.
보성의 판소리의 비조인 박유전 선생을 위시해서 벌교에 있는 채동선 음악관이나 조정래 문학관이 예향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서편제의 그 중심에 서 있는 박유전 명창은 어떤 사람인가.

*. 박유전 명창 이야기
  박유전(朴裕全, 1835년~1906년)은 조선 말기의 판소리 명창이다.
전북 순창에서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박유전은 자랄 때 왼쪽 눈을 다쳐서 애꾸눈이 되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그런 아이가 당시에는 천민 계급인 광대(廣大)를 따라 다니며 노래를 배우는 바람에 동내에서 축출되다 싶이 떠나야 하였다. 할 수 없이 부모는 보성으로 이주하여 자라면서 박유전은 그 추한 미모를 뛰어넘어 조선에서 8 명 안에 뽑히는 명창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는 대원군 집권시절이었는데 대원군은 판소리의 애호가였다.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그를 불러 그의 판소리 '심청가'를 듣고 너무나 감격하여서
  “네가 제일(第一) 강산(江山)이다.”라고 말하면서 그가 살고 있는 강산리(岡山里)의 음을 따서 강산(江山)이라는 호를 내리고 검은 수정알로 만든 오수경(烏水鏡)을 하사 하여 그의 애꾸눈을 가리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그를 자기 가까이 두게 하려고 강산을 무과에 급제 시켜 선달이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그는 특히판소리 '심청가', '적벽가'를 잘 불렀는데 그보다 '새타령'이 더 유명하였다.
강산 박유제는 대원군 말년에 전라남도 보성 강산리에 내려와서 여생을 보내며 정창업, 김창환 계통의 서편제와 구별되는 강산제를 창시하였다.
  서편제란 섬진강의 서쪽의 보성지방의 판소리로 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애절하게 구성지고 소리의 끝이 길게 이어진 노래로, 섬진강 동쪽의 활달한 동편제와 구별되는 판소리를 말한다.
그래서 박유제 이후 보성을 고장으로 한 사람치고 판소리 한 가닥을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 녹차의 고장 인 다향(茶鄕) 보성


  우리 한국수필작가회의 문학기행은 우리 임병식 회장의 고향인 보성 녹차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녹차 밭은 보성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차는 연간 강수량이 1,500mm 이상인 곳에서 잘 자란다. 일교 차가 크고 서늘한 기후 조건에서 양질의 차가 생산되는 것이다.
보성은 대륙성기후와 해양성기후가 교차 되는 곳이어서 안개가 자주 낀다. 이것은 차나무가 자라는데 필요한 수분의 공급원이 되어 주어서 한반도에서는 차나무가 자라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곳으로 보성이 꼽히게 된 것이다.
보성 녹차 밭이 이렇게 유명하게 된 것은 1939년인 일제 때 차 전문기술자들에 의하여 한국 제1의 차 재배지로 선정 되고 ,이듬해에 인도산 차 종자인 '비니오라레'를 수입하여 뿌린 것이 시초였다. 그보다 먼저 세종실록에도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차 재배지로 보성을 꼽았다.

  지금 보성에서는 1,363 농가가 녹차밭을 재배하여서 전국 차생산량 의 37,7%가 이곳에서 만들어 지고 있다.
  나는 보성의 녹차 밭을 두 번째 왔다. 그 때마다 탐미주의(耽美主義)를 생각하게 한다.
미를 지상의 최고로 생각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 미를 위한 인공의 미 창조의 유미주의(唯美主義)를 생각하며, 저 녹색의 바다를 이룩한 인간의 힘 앞에 저절로 숙연히 머리를 조아리게 되기 때문이다.

녹색의 바다인가, 등고선의 S란인인가
삶의 의지와 합창, 환호 앞에 우뚝 서서
눈으로
차를 마시게 하는
보성의


밭이여!


*.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관'

  서울에서 내려와서 당일 일정으로 보성을 둘러 볼 수 있는 곳은 당연히 제한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성다원(寶城茶園)도 제대로 둘러 보지 못하고 언덕에서 먼 발치로 보고 ' 조정래 문학관'을 들렸다가 보성의 맛 꼬막을 먹으러 간다.
 보성문학관에서 우리가 보고 온 것도 한 작가의 집념이 만든 빛나는 역사였다.
작품을 어떻게 써야 하나를 몸으로 가르쳐 주는 학습실 같았다.

-신문사 문학담당 기자와 문학평론가 39인이 뽑은 80년대 최고의 작품 1위 '태백산맥'(-문예중앙)
-한국 대학생 1,650명이 뽑은 '한국 최고 소설' 1위 '태백산맥'( -중앙일보)
  -독자 500명이 뽑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1위 '태백산맥' (-조선일보)
  -서울대학교 신입생 218명이 뽑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1위 '태백산맥'
  -1997년 서울 6개 대학 도서관 문학 작품 대출 1위 '태백산맥'(- 동아일보)
  '중앙일보' 선정 '20세기 한국의 베스트셀러 30가지'에 '태백산맥' 선정 (- 중앙일보)


  '200쇄 인쇄 700만 판매'를 기록했다는 조정래의 대하 소설 '태백산맥'의 6년에 걸친 집필과정이 안이하게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꾸짖는 것도 같았다.
  그보다 국문학도로서 살아온 내가, 그 배경이 되는 지리산을 적지 않게 종주하였으면서도 '태백산맥'을 읽지 않았다니- 하는 자책이 앞서기도 하였다.
  문학관을 나오면서 나의 감상은 한 마디였다.
'집에 돌아가면 우선 태백산맥을 읽자.'

나도 조정래처럼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떳떳한 말을 독자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되자고-.

*. 여행의 행복
  여행은 잘 보고 잘 먹으면서 잘 자고 다닐 때 더욱 행복해 지는 법이다.

그때 먹는 음식은 물론 그 고장 향토음식(鄕土飮食)이어야 한다. 비싼 음식이 아니라 그 고장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일 때 여행은 더욱 행복하여 진다.
벌교 바이오리나스트 '채동선 음악당' 앞에 '고려식당'이라고 하는 꼬막정식 집이 있어 벌교 꼬막을 자랑하고 있다. 
청정해역 벌교의 질 좋은 갯벌에서 잡은 꼬막은 알카리성 식품으로서 소화가 잘 되는 고단백 식품으로 허약한 사람에게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참꼬막 정식'은 김 조각에 고소한 참기름을 듬뿍 넣고 알싸하면서도 새큼한 꼬막회무침에 밥을 비벼서 한 입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렵쇼. 이게 바로 밥 도둑입니다. 꼬막부침개에 전라도 보성이 주는푸짐한 인심의 밑반찬의 정과 맛이 또한 일품입니다.

벌교지역에서 생산되는 꼬막은 단백질과 필수아미노산 타우린 성분이 풍부해서 간 해독은 물론 보양 음식으로 좋다.    보성의 참꼬막은 주름 골이 깊고 껍질이 단단하다.
그날 채취한 싱싱한 꼬막를 깨끗하게 씻어 끓인 물에 살짝 데쳐낸다.
한 번 삶아낸 꼬막 속살을 발라낸 다음 부추, 당근, 미나리 등 채소를 넣고 갖은 양념으로 묻쳐내는 것이 꼬막 회무침이다.
  식사 후 서울로 올라가는 나는 일행과 떨어져서 광주를 향한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오기 힘든 이 먼 곳에 왔던 길에 '송강 정철의 유적지'를 둘러 보고 싶어서였다.
우리 한국수필작가회의 광주 회원의 차를 이용하여 가다가 내심 나는 환호하였다.
아름다운 곳을 어찌 나만이 탐하랴. 함께 가던 광주팀이 광주 가는 길에 있는 서재필 공원을 들르고 거기에 백제의 천년 고찰 대원사까지 관람하자고 하는 멋진 분과 함께 하였기 때문이었다.

*. 서재필 공원

  송재 서재필(徐載弼) 선생( 1864~1951)은 보성에서 태어나서 개화기를 정치가, 독립운동가, 의사 등으로 선구자의 삶을 살다가신 분이다.
1884년 갑신개혁을 주도해 3일 천하를 이룬 뒤 이의 실패로 그는 일본을 통하여 미국에 망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서 부모, 형, 아내는 음독 자살하였고, 두 살 된 아들은 굶어죽는 멸문지화(滅門之禍)의 불행을 겪었다.

미국에 망명하여서 고학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부득이 미국에 귀화한 송재 서재필은 한국 최초의 의학박가가 되기도 하였다. 송재 서재필의 업적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1895년 4월 7일에 창간한 '독립신문'이었다.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 영자신문, 일간신문, 한글신문이 독립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순한글 신문이요, 최초로 시도한 띄어쓰기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는 외국 생활에서 국민을 개화 계몽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뼈아픈 실패의 경험은 그것이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승만보다 12살이나 위인 독립투사여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입후보 하였으나 낙선되어 미국으로 영구 귀화해간 분이다.
서재필 기념공원은 그의 외가집 터에 생전에 유품 800여점을 전시한 유물전시관, 조각공원, 생가 등을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서재필 기념관은 미국 펜실바니아에도 있다.
*. 백제의 고찰 대원사
  사찰(寺刹)은 답사여행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문화재다.
그 고장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대원사는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신라 지증왕 때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천봉산 기슭에 초창한 백제 고찰이다.
천봉산(天鳳山, 609m)은 보성, 화순, 순천의 경계를 이룬 산이다.

- 선산군 모레네 집에 숨어 살면서 불법을 전파하던 아도화상은 하룻밤 꿈속에 봉황의 꿈을 꾸었다.
"아도, 아도! 사람들이 오늘밤 너를 죽이고자 칼을 들고 오는데 어찌 편안히 누워 있느냐? 어서 일어 나거라, 아도, 아도!”
봉황의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창밖에 봉황이 날개짓 을 하고 있었다. 봉황의 인도를 받아 광주 무등산 봉황대까지 왔더니 봉황이 홀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도화상은 석 3달 동안 봉황이 머문 곳을 찾아 호남 일대의 산을 헤메다가, 마침내 봉소형국(鳳巢形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을 찾아내고 기쁨의 춤추며 산 이름을 천봉산(天鳳山)이라 부르고 그 기슭에 대원사를 창건하였다.

그런데 누가 왜 아도화상을 죽이려 하였는가에 대하여 진기한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하여 온다.

  -신라 21대 소지왕의 6촌 동생 지철노(智哲老)는 남근(男根)이 지나치게 커서 배필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 때 모량부 상공의 딸 거녀(巨女)를 소개한 이가 바로 아도화상이었다. 소지왕이 죽자 아도화상은 은근히 지철노(智哲老)를 왕위로 밀었는데 이것이 권신(權臣)들의 미움을 사는 일이 되어, 요승(妖僧)을 죽이자고 결의하는 바람에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에 이 대원사에는 20여 전각이 있는 거대한 사찰이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다 소실되어. 극락전(전남 유형문화재 87호)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현장 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나는 몇 년 전 이 절에서 1박한 일이 있고 이번 방문이 두 번째다.
그때나 오늘이나 이 절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티베트박물관'도 있지만 그보다 '태아령'이라 생각한다.
태아령(胎兒靈)이란 부모와 인연은 맺었지만 이 세상 햇빛을 못 보고 죽어간 가엾은 어린 영혼들이다. 더 쉽게 말해서 산아 조절을 위해서 부모로부터 살해당한 불쌍한 태아 영가를 천도하는 절이란 말이다.
일찌기 이 절의 주지 현장 법사가 임신 중절을 하려고 의사가 메스를 들이댈 때 도망가려는 태아의 모습을 CT촬영으로 보고 깊게 감명을 받아 태아령을 위한 천도제를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모의 무거운 죄업을 참회하고 전생과 금생의 나쁜 인연을 없애어 삶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절의 멋진 연못과 연화문을 지나 있는 대원사귀자모신(大原寺鬼子母神)도 '하리티라'는 부처다. 어린 유아들을 보호하고 산모들의 출산을 돕는 사랑의 신이다.
그거기서 좀더 올라가면 이 절의 본당인 극락보전 우측에 지장보살이 아이를 안고 서 있는 입상이 있고 그 아래 빨간 모자를 쓴 동자 석상이 여럿이 보인다.

  -빨간 모자 동자승: 아버지의 씨앗은 두뇌에 깃들어 있으며 이를 '백(白)보리'라 한다.
어머니의 씨앗은 단전에 깃들여 이를 '적(赤)보리'라 한다.
빨강색 동자승은 어머니로부터 버림 받은 낙태아의 영혼이 지장보살을 어머니로 하여 업을 풀고 새로운 환생을 준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태어나는 어린이가 65만명이지만 어머니의 뱃속에서 그 부모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생명이 160만이 된다니 이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

그 태아를 위한 것이 태아령이니, 부모된 자 대원사에 들리거든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거기서 더 올라 산 기슭에 '황희 영각'(黃喜影閣)이 있다. 조선왕조를 전체 재상 중 가장 명망있고 후세인들에게 추앙을 받는 재상이 황희 정승이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도 방촌 황희 정승이 청백리(淸白吏)였기 때문이니 오늘날의 위정자들은 깊이 본받을 일이다.

그분이 어떤 분인가 다음 태종(太宗)의 황희 정승에 대한  이야기로 대신한다.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하였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였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지 못하게 하였다."
  대원사는 방촌이 남원에 유배 왔을 때 동향의 대선배이신 원오국사(圓梧國師)를 찾아 사찰 환경 개선과 불사에 조력하여 주었던 절이요, 방촌 황희의 네째 아들 직신공(直身公)이 척불숭유(斥佛崇儒)로 탄압 받던 시절 대원사를 보호한 인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내가 시조시인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 어느 누구보다 많은 시조를 암송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멀고 먼 황희 영각에 와서 방촌 선생의 시조를 이렇게 나직히 읊조릴 수 있으니 말이다.

대추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듣드르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 장수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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