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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청평산[오봉산] 산행기/ Photo 에세이

ilman 2013. 1. 15. 11:20

춘천 청평산[오봉산] 산행기/ Photo 에세이


*. 영하 14도 강추위
“고집이라고 말 하지만 고집을 좋게 말하면 의지(意志)라고도 할 수 있는 거야.”
“의지(意志) 좋아하시네.”
이 강추위에 나이에 맞지 않는 산행이라고, 그렇게 산행하다가 죽은 자기 친구의 남편 예들 구체적으로 들어가며 협박하는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에스키모 인처럼 완전 무장을 하고 밖에 나섰다.
 바람이 없어서인가 생각보다 춥지가 않았다.
12월 초 춘천 청평산 간다기에 버스 타러 갔다가 첫눈에 송추의 오봉으로 행선지를 바꾸어버린 산악회처럼, 강추위로 혹시 취소되거나 버스가 텅텅 비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름이 베스트 산악회라서 인가. 좌석을 가득 메운 사람 중에서 처음 따라가는 산악회인데도 인사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일산 다른 산악회에서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 배후령을 들머리로  

 

   옛날에 춘천 가는 길은 한국에서 아름다운 곳 중에 하나라는 양수리를 지나서, 소양강을 끼고 달리는 도로는 환상적이라고 할 만큼 마음을 설레게 하는 길이었는데 동서울에서 홍천강으로 새로 난 길은 3시간 만인 9시 30분에 배후령에 우릴 내려놓는다.
 우리들은 배후령으로 해서 선두그룹은 5시간 코스의 부용산으로 해서 청평에 내려오고, 나 같이 자신이 없는 사람은 청평산 청평사의 3시간 코스를 탄다.
배후령은 춘천시 북산면과 물의 고장 화천군 강동면 경계에 있는 영(嶺)으로 해발 600m다.

오봉산(청평산) 정상이  799m이니까 약 200m만 오르면 정상이라서 그리 힘들지 않은 산이다.
“여기는 배후령 정상입니다. 물의 나라 화천” 등을 사진 찍다 보니 오늘도 맨 후미에 쳐져있는데 바짝 뒤를 좇아오는 사람이 있다. 후미를 책임진 산행대장이었다.
도중에 청평사로 하산하려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천천히라도 백두산 종주를 한 등산 30년 이상의 산꾼이라고 사정사정하여 후미 가이드를 보내 놓고 여유 있는 산행 길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종일 나와 내 아내의 남편과 함께 하였다.
호남에는 기상 관상대가 생긴 이후 20일 간이나 폭설이 내린다는데, 오늘도 눈과 강풍이 분다는데 이곳 춘천은 눈은 자취 눈이요, 바람은 아주 잔잔하였다.
 15분쯤 올라왔는가 하는 곳이 주능선 길이 시작되는 안부인데 어디로 가란 이정표인가 있으나 마나 한 부실한 [←등산로→]표지가  있을 뿐이다. 지도로 보니 오른쪽 길이 마적산 길이다. 말 타고 무리 지어 도둑질하러 다니는 마적(馬賊)인가 했더니 말의 발자취라는 마적산(784.7m 馬蹟山)이었다.
주능선은 서쪽 마적산에서 다섯 봉우리의 청평산을 지나 배치 고개 너머에 있는 부용산(芙蓉山, 882m)으로 해서 봉화산(736m)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 청평산 제1봉
  제1봉 주능선 길은 완만한데 오름길보다는 내림 길이 길었다. 그러다 조금 오르니 싱겁게도 바위 몇 개가 있는 청평사 제1봉(나한봉, 715m)이 나타난다. 거기서는 멀리 나머지 네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제2봉(관음봉). 제3봉(문수봉), 제4봉(보현봉)으로 정상이 제5봉(비로봉)이라는데 가도 가도 제2봉이라는 표지판이 없다.

첫 번째 아슬아슬한 바위 길을 쇠줄을 잡고 지나니 갑자기 가파른 오름길인데 두 번째 쇠줄이 나타난다. 저 봉이 2봉인가 보다 하고 가파른 올름 길을 올라보니 바위 위에 작은 바위가 앉아 있고 거기 노송 하나가 구김살 없이 가지를 창공에 활짝 펴고 있다. 청솔 바위였다.
거기서는 전망이 툭 튄 곳이라서 북쪽으로 화천의 오음리 분지와 그 넘어 사명산(1197m)이 보였다. 소양강과 파로호 사이에 솟아있는 산이라서 양대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산으로 인제군, 양구군 등 4개의 군이 보인다 해서 四明山(사명산)이라 했다는 산이다.
다시 건너편의 가파른 절벽을 천신만고 끝에 오르니 거기 까만 오석으로 된 비가 있다. 이곳을 오르다가 추락사한 신동섭 씨를 기리는 진혼비(鎭魂碑)였다.
“사랑하는 산을 통하여/ 극복 의지를 키우다/ 여기 산화하니 진혼 하노라/ 1989. 9.3”
이런 글은 육하원칙(六何原則)을 따라 써야 하는데 빠진 것이 있다. 누가 세웠다는 것은 꼭 들어가야 할 것인데 깜박 잊은 모양 같다.

*. 부실한 이정표 

 오봉산 비로봉 3봉(청솔 바위?)에서 4봉(진혼비?)이라고 생각되는 구간은 아기자기한 절벽과 암릉 구간으로 이 청평산 등산의 하이라이트 중에 하나였다.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만약에 쇠줄을 놓치기만 한다면 진혼비 하나를 더 세워야 할 정도로 위험한 구간이기도 했다. 그런 곳을 나 홀로 감탄하며 두려워도 하며 드디어 정상에 오르니 멋진 정상석이 서 있다.
그런데 돌을 주섬주섬 쌓고 거기에 겨우 올려놓은 표석이어서 발길로 한번 차면 우르르 무너져 내릴 형국이다.
게다가 그 앞 나뭇가지에 붙여놓은 이정표를 상품 싸는 붉은 비닐 줄로 걸어놓았는데 '제3봉 문수봉'이다. 정상인 5봉은 비로봉인데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다른 산에서는 도저히 보지 못한 부실한 이정표에 노한 어느 산꾼의 짓거리가 아니었을까?
배후령에서 올라온 주능선 갈림길에도 있던 부실한 이정표가 정상에서도 이 모양이니 더럭 겁이 난다. 이정표를 믿고 산행할 수 없어서다. 차라리 제1봉의 표지가 없었으면 오히려 헷갈리지 않을 것 같다.
 춘천시청에도 관광 담당 부서가 있을 터인데 담당자들은 이를 시정해 주었으면 한다. 섭섭한 것은 춘천시에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과 등산회가 있을 텐데 컴컴한 새벽길을 밟고 먼 길에서 달려온 나그네를 이렇게 맞아도 된단 말인가.
정상은 소나무에 가려서 전망이 좋지 않아 하산 길을 서둘렀다. 이정표가 없어서 청평사 가는 길이 맞나를 의심하면서-.

*. 청평산 제1의 하이라이트 하산 길

  청평산(비로봉)에서 하산하는 길은 암릉 구간으로 조심해서 내려와야 할 청평산 산행으로 제1의 하이라이트 길 같았다.
저 아래 멀리 소양호가 보이기 시작하는 바위 능선 하산 길이었다.
제일 먼저 마주친 길이 구멍 바위라고도 하는 홈통바위, 배낭을 지고 겨우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으로 두 개가 이어져 있는데 쇠줄이 있긴 하여도 너무 가팔라서 내려가기가 몹시 힘들어 궁둥이를 바위에 대고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
여기서는 망부석 바위를 사진 찍어야 할 곳인데 안전에 신경 쓰느라고 사진 찍을  엄두도 겨를도 없었다.
드디어 중요한 두 번째 갈림길이다. 직진하면 천단이요, ←청평산, ↑ 부용 계곡,  ↓청평사(해탈문)이다. 여기 오기 얼마 전에 청평사 해탈문 쪽으로 하산하지 말고 직진하라고 총무한테 연락을 받았는데 어쩐다지?  멀리 보이는 소양호가 얼어서 배편 대신 육로로 배후령을 통해서 가자는 이야기인가?
오늘 내가 추위를 무릅쓰고 청평산을 찾아온 것은 앞서 말한 12월 초 와보지 못하고 끝낸 산행이 아쉬워 옛날을 생각하고 쓴 "짝사랑 청평산 산행기"에 퍼온 남의 사진을 내 그림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는데-.
단체 행동에서 개인행동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어서 '부득이한 경우라면 춘천 찜질방에 가서 자고 가지-. '하는 마음이 정하여 지자 핸드폰을 꺼버렸다. '꾸지람을 받아가면서까지 하는 등산하는 것을 피하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해탈문까지는 1km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여전히 가팔랐고, 길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서 발이 무릎까지 빠지기도 하는 데다가 낙석 지대여서 발을 내디디기가 힘들었다.

이 계곡은 성동 계곡이어서 낙엽 속에 있는 빙판길로 몇 번이나 넘어지는 바람에 내림 길에 몸을 낮추어야 해서 힘이 더 들고 위험했다.
'사리탑'이란 표지가 얼마나 반갑던지-. 이제 고생이 끝이라는 생각에서 반가움은 더했다. 표지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다 보니 왼쪽에 솔잎을 가득인 절 기와지붕이 보인다. 탑이 옥내에 있나 보다 하고 돌아 올라가 보니 적멸보궁(寂滅寶宮)이었다. 부처님의 진진 사리를 모신 곳이 4 대처로 청평사가 그 하나란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적멸궁(寂滅宮)이란 불상을 봉완 하지 않고 법당만 있는 불전이란 말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적멸보궁 좌측의 바위에 '淸平息庵'이란 진귀한 암각 네 글자가 있다. 이 글씨를 고려 이자현(1064~1125)의 글씨라고 보는 것은 이자현의 호가 식암(息庵), 또는 청평 거사(淸平居士)이라서인 것 같다. 청평 거사는 940여 년 전 고려 시대 사람이니 그때도 이 산과 절의 이름이 청평산 청평사이었을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릴없이 사리탑을 지나치고 내려오다 보니 해탈문(解脫門)이 멋있게 서있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가는 문이 해탈문인데 절마다 절 입구에 서있는 일주문 같이 생겨서 이 위에 절이 있나 하고 통하여 올라가 보니 보니 아까 적멸보궁을 가는 길이었다.
드디어 차가 다일 수 있는 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얼마를 가니 두 개의 부도가 나타난다. 고려 말이 청평사에서 입산수도하다가 돌아가신 환적당 및 설화당 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였다. 부도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탑이다.

*. 당나라 공주와 상사뱀 전설

 청평사에는 애화 맺힌 당나라 공주의 전설이 있다. 그 흔적이 공주 굴, 공주탕, 공주 탑이다.
"중국 당나라 때 태종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눈물의 씨앗이 사랑이던가.
공주는 평민 청년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이를 안 태종의 노여움으로 청년을 사형을 당하고 죽어서 상사뱀이 되어 자는 공주의 몸에 칭칭 감아버리어서 아무도 이 뱀을 때어 낼 수가 없었다. 어느 노승의 말에 따라 신라에 영험 있는 절을 찾아 청평사 근처에 이르러 목욕하고 굴(지금의 공주 굴)에서 잠을 잔 범종소리 은은히 들려오는 아침이었다. 아침밥을 구하러 간다는 공주의 말을 듣고 상사뱀이 몸을 풀어주자 청평사 법당에서 법회를 올리고 있었다. 상사뱀이 공주를 찾아 회전문에 들어서는 순간 벼락을 맞고 상사뱀은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소문을 들은 태종이 기뻐하며 금 세 덩어리를 보내어 공주가 거처할 건물과 공주의 귀국할 여비로 나머지는 후일 건물을 고칠 때 쓰라고 오봉산 어디엔가 묻어 두었다. 공주는 한 동안 상사뱀의 극락왕생을 빌며 부처님의 은공을 보답하려고 청평사에 삼층석탑을 세워놓고 귀국하였다."
그때 목욕하던 웅덩이를 공주탕 삼층석탑을 공주 탑이란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런 전설이 청평사 가는 주차장 서쪽 끝에 공주와 상사뱀 전설이 당시 공주의 모습과 함께 그 유래 탑이 서 있다.

*. 청평사 가는 길

  나는 지금부터 청평산 정상에서 역으로 보고 온 순서에서 벗어나 편의상 일반적인 순서대로 청평사 입구에서부터 로 말하려 한다. 글이란 읽는 사람을 고려하여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청평사 가는 길 우측에 거북바위가 9 가지의 폭포 소리를 들으며 앉아있다.
거기서 조금 올라간 곳에 구성폭포(九聲瀑布)가 있기 때문이다.
 여름 한철 물이 불으면 참선하는 이의 마음가짐에 따라 폭포 소리가 9가지로 들린다는 폭포다. 그 폭포 너머에 길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삼층 공주 탑이 있고 안내판도 없어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다시 오름길에서 왼쪽에 아깝게도 방치된 멋진 후락한 누각을 지나다 보면 부도 군이 나타난다.
석진 대화상 부도와 이자현의 부도를 지나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의 일부인 영지(影池)를 만나게 된다. 그림자 '影(영)' 못 '池(지)'로 오후 서너 시가 되면 청평산의 모습이 비친다는 못이다.
이 정원은 사찰 청평사의 정원으로 고려조 이자현은 청평사 위 청편 선동(淸平仙洞)에서 거북바위까지 1km에 달하는 9,000여 평 자연에  친환경적으로 최소한의 인공만을 가하여 자연의 멋을 살려 주위의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꾸미었다.
정원도 집과 같이 가꿈에 따라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기대를 갖고 막상 가서 보니 그 설명 표지 판뿐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을만한 후세인의 아무런 노력도 가꿈도 보이지 않아 '이게 뭐야!' 하는 실망을 갖게 발길을 돌리게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정원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정원은, 일본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경도(京都)의  사이호사(西芳寺)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년이나 앞선다는 우리 민족의 자랑 '청평사 영지(影池)'가.

*. 김시습 나옹화상이 노닐던 청평사
  청평사는 천년 고찰로 신라 진성여왕 때 지어졌다고 하나 절 입구에 있는 청평사지 강원도 기념물 제55호)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광종(973년)에 영현(永玄) 선사가 백암 선원으로 창건하였고, 그 후 은거하여 살던 이자현이 고려 선종(1089년)에 세 번째 중건하여 문수원(文修院)이라 하던 것을 보우 선사가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소 청평사라 개칭하였다.
 청평사에는 국보 제115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문수원기와 장경비가 있었으나 6.25 사변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겨우 보물 제164호로 지정된 회전문과 돌 축대만이 영화롭던 옛 모습의 일부를 보여줄 뿐이다.
청평사 일원은 이자현, 나옹화상, 김시습이 은거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김시습이 이 절 부근에 유할 때 지은 글 '南窓(남창)'을 나도 매월당 마음 되어 시조로 의역하여 본다.

朝日將暾瑞色分(조일장돈서색분)       아침에 돋는 해에 새벽빛 퍼지는데
林비開處鳥呼群(임비개처조호군)       숲 안개 새들끼리  벗들을 부르는 소리
遠峯浮翠開窓看(원봉부취개창간)      창으로  
隣寺疎鐘隔헌聞(인사소종격헌문)      먼산 푸른빛
-題 淸平山細香院南窓에서              33천 하늘 여네

*. 하나 남은 보물 회전문(廻轉門)

  이 절의 오직 하나의 보물 회전문(廻轉門)은 빙빙 도는 회전하는 문인가 했더니 불교 윤회사상과 연관된 이름이다.
사찰의 중문(中門)으로 지금은 양쪽이 비어있지만 이곳에 불교 수호신 사천왕(四天王)을 모시던 곳이다. 공주와 상사뱀 전설에서 짝사랑하던 청년이 상사뱀으로 태어나서 회전문으로 들어가려다 벼락 맞아 죽는다는 것이 이 이름과 신통하게도 똑 들어맞는다.
이 회전문 앞에서 보면 회전문, 대웅전, 청평산 주봉이 한 줄에 놓여 있어서 어떤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정면이 대웅전이요, 좌측이 관음전, 우측은 나한전이고 그 뒤로 국보였던 극락보전과 산신각이 있다. 그 왼쪽에 있는 500년 수령의 높이 8m, 둘레 120cm의 주목은 천년 사찰의 역사를 증언하여 주는 듯 이 서있다. 이 절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이 태극무늬가 두렷한 그 층계들이다. 6.25의 소실을 이겨낸 것이기 때문이다.

나한이란 부처님의 제자로 16 나한, 500 나한 등이 있는데 대개는 머리가 없는 대머리로 다른 절에서는 점잖이 앉아 있던데 청평사의 나한들은 그림에서 나 보듯이 활동적이다.
 세밑이 가까워 오고 있는 나에게 내가 묻는 말이 있다. 나의 송년 산행은 청평사가 끝인가. 아니면 더 욕심을 내야 하나? 나의 인생의 마지막 산행은 언제쯤 접어야 할까? 무릎에 자꾸 신경이 가서 글루코사민을 복용하기 시작한 나이이기 때문이다.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 불유구)라. 하고자 하는 마음 따라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공자의 말처럼 고희(古稀)에 서서 내가 나에게 묻고 있는 말이다.
나의 마음속의 나의 소원은 청평사의 나한처럼 오랫동안 동적이고 싶구나

(2005. 12. 22 청평산 [오봉산] 배후령-제1, 2, 3, 4, 5봉-해탈문-청평사-선착장 7km 3시간 30분/ 고양 베스트 산악회 송년 산행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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