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피아골 단풍 산행 /Photo 에세이
(2006년 10월 26일/ 성삼재-노고단-돼지 평전 -임걸령-피아골 대피소 -직전마을/ 고양 늘 푸른 산악회 따라
*. 성삼재의 여정
새벽 5시 30분에 어둠을 뚫고 고양시 일산에서 달린 차가 지리산 성삼재에 우리를 내려놓은 것은 5시간 10분이 지난 11시였다.
지리산 들머리 성삼재에 서니 잊었던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난다. 65살 나던 해에 35kg나 되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 성삼재서 대원사까지 지리산을 7일 간이나 단독 종주를 하였다가 오늘 5년만에 다시 온 것이다.
백혈병 무균병실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퇴원한 후 잘 걷지도 못할 무렵이었다. 겨울 태백산 산행으로 용기를 얻었고, 그 여세를 몰아 퇴직 기념으로 종주를 한 것이다. 그 종주에 자신을 얻어 그 후 설악산, 한라산을 거쳐 작년에는 백두산 종주까지 할 수 있었다.
이런 산행이 그 무서운 암중의 암이란 백혈병동의 악몽에서 나를 해방시켜 준 것 같다. 산이 종합병원이라 하지 않던가.
그때 연하천(煙霞泉)부터 몰려오는 '루사 태풍'의 비를 맞으며 벽소령에서 3일간이나 묶여 있었다. 그러다가 장터목, 치발목 산장에서 자고 무재치기 폭포를 지나 대원사를 향하였다. 그렇게 다녀와서 쓴 글이 '전설 따라 지리산 종주'였다.
그 전에도 뱀사골을 거쳐 천왕봉을 갈 때에는 쇠다리 같은 시설물이 놓이기 훨씬 전이어서 물을 만나면 신발을 벗어 둘러메고, 로프 대신 칡뿌리를 잡고 오르던 일 등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렇게 화암계곡, 뱀사골, 칠선, 한신, 중산 등 지리산의 11 계곡을 두루 쏘다녔으나 피아골 계곡은 요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요즈음은 단풍철이고 그 당시에 없던 디카까지 갖추었으니 금상첨화라. 가서, 보고 기록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뛴다.
지금 내가 오르는 성삼재는 삼한 시절의 유적지다. 일설에 의하면 마한(馬韓) 때 성(姓)이 각각 다른 세 사람의 장수를 이곳에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姓三재)라 하였다 한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대피소까지는 2.5km다. 산행에서는 1시간에 3km를 걷는 것이 보통이라니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 중간쯤 해서 갈림길이 나오는데 가급적이면 직진할 일이다. 돌아가는 길은 직진하는 산길보다 3~4배나 우회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직진하는 길로 10여분 오르니 우회도로와 합류하는 길이 있고 거기 1920년대에 세운 서양인 선교사들의 휴양 건물이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이곳 노고단은 한여름에도 날씨가 서늘하고 아름다운 경관이 사방에 펼쳐져 있어 예전부터 건강을 위해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건물은 1920년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풍토병 치료를 위해 지었던 수양관(修養館) 건물입니다.
거기서 얼마 안 가서 드디어 좌측에 붉은색 3층 노고단 제1대 피소( 160명 수용)가 있고 그 좌측에 제2대 피소(50명)가 있다.
여기서 노고 단 고개로 향하는 0.3km/15분 직진과 1.3km/30분의 우회로가 있다.
*. 노고단을 가보셨나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이 지리산을 종주를 하던, 구간 종주를 하던 이 성삼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등산하는 사람 치고 노고단(老姑壇)을 모르는 이가 없다. 이런 분들에게 묻고 싶다. "노고단에 가보셨나요?"
거의 대부분인 경우 노고단 고개의 우측에 있는 돌탑을 노고단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노고단(老姑壇, 1,507m) 정상은 그 건너에 있는 산이다.
그 노고단 정상은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라 인터넷에 예약한 60 명에다가 현장 접수자 40명 도합 100명에 한하여 일정한 시간에 개방한다. 그래서 카메라로 노고단을 오르는 그 층계만으로 노고단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노고단'의 노고(老姑)는 원래 도교(道敎)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이니 산신할머니란 뜻의 높임말이다. 할미는 국모 신(國母神)인 서술 성모(西述聖母)를 말한다. 서술 성모를 선도 성모(仙桃聖母)라고도 하는데 이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의 선인들은 이분을 나라 수호 산신으로 받들고 봄, 가을마다 제사를 올렸던 곳이 바로 노고단(老姑壇)이었다.
이 노고단(1,507m)은 천왕봉(1,915 m), 반야봉(1,734 m)과 함께 지리산 3대 영봉의 하나로 이 지역은 여름에도 기온이 서늘한 아고산(亞高山) 지대로서 약 30만 평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원추리 군락이요, 각종 고산식물이 자라는 곳이기도 하다.
이 노고단은 고산 지대로서 전망이 매우 좋고 시원해서 신라시대에는 주로 화랑의 심신 수련장이었고, 1920 경 일제 시대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휴양지로, 6.25 때는 빨치산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던 역사적인 곳이다.
노고단에서 우리 산악인이 누릴 수 있는 행복 중에 하나는 날씨가 맑을 때 구름 속에 쌓인 반야봉(1,732m), 삼도봉(1,499m), 중봉(1,875m), 천왕봉(1,915m)과 세석평전, 삼신봉(1,284m)을 전망하는 것이지만 오늘 날씨는 하늘이 잔뜩 찌푸려서 가까이 있는 반야봉마저 시야를 가리고 있어 그 안복(眼福)을 누릴 수 없어 그 앞의 위치도로 감회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 임걸령을 향하여
노고단에서 돼지 평전을 지난다.' 돼지 평전'이란 옛날에 이 고산 지대의 평평한 평전(平田)에 멧돼지가 하도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뒤에 인적 없는 능선길을 혼자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두려운 생각인 난다. 혹시나 TV에서 보던 반달곰이 나타나면 어쩌나. 그래서 급히 지니고 다니던 배낭에서 종을 꺼내 배낭에 매달고 스틱을 뽑아 들고 간다.
산사(山寺)의 풍경(風磬)이나 운판(雲版), 인경(人定) 등의 소리가 짐승이 두려워하는 소리여서 뱀이나 짐승의 접근을 막는 소리라고 생각해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리산 곳곳에 두렵게도 전에 없던 곰 이야기를 써 놓았다.
-이곳은 반달가슴곰을 특별히 보호 관리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앞으로 사람과 곰이 공존할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 먼저 곰과 만나게 되면 먼저 위협하지 마시고, 돌을 던지거나 뛰지 말아 주십시오.
*. 손을 크게 휘두르거나 공, 스프레이, 방울, 호각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려 주십시오. *. 곰을 목격하거나 흔적을 발견하시면 즉시 연락해 주십시오. 지리산 남부사무소 061-783-9109~2/ 반달가슴곰관리팀 061-783-9120~1
*. 갑자기 곰을 만났을 경우 침착한 행동으로 천천히 그 장소에서 떠나도록 하십시오.
*. 계속 가까이 접근해 올 경우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손을 크게 휘두르거나 소리를 질러 사람의 존재를 곰에게 알리십시오.
*. 곰이 공격할 경우 막대기나 배낭을 사용하여 저항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그림처럼 급소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십시오.
이런 으스스한 생각을 하며 가다가 후미진 돼지 평전 길 커브를 돌다 보니 갑자기 길 가운데 검은 곰이 확 앞을 막아선다. 아! 길을 막아선 곰 만한 크기의 검은 바위였다. 헛것을 본 것이었다.
임걸령을 향하는 길에 거리를 알려 주는 이정표를 보니 노고단서 3.2m로 임걸령까지는 완만한 능선 길로 1시간 거리인데 임걸령 못 미쳐 피아골 3거리가 있다. 오늘도 맨 후미에서 가는 길이라 임걸령이나 피아골 산장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는 산행 대장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하산하는 지름길을 버리고 임걸령을 향하였다.
바위에 검은 점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비가 오는가 싶었다. 찌푸린 하늘을 보니 큰비가 올 듯한 하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방 그칠 비도 아니었다. 늘 준비하고 다니던 비옷을 산악회 버스에 두고 온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만약을 위해 방풍복 상의를 가지고 온 것이 여간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도중 피아골에서 올라온 젊은 부부가 있어 피아골 단풍이 어떠냐고 물으니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래도 여기보다는 낫던데요."
임걸령 샘터에서 많은 사람이 쉬고 있었지만 우리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아까 그 지름길로 내려간 모양이다.
산에서 샘을 만나면 나는 언제나 수통 가득히 물을 채운다. 집에 가지고 가서 산의 정기를 마시고 싶어서다. 그 물이 떨어질 때 다시 배낭을 챙기곤 했다.
-이곳을 임걸령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 이곳은 "임걸년"이라는 의적(義賊)의 근거지가 된 소굴이었다는 데서 '임걸'에다가, 이 고개가 피아골로 내려가는 재라서 고개 령(嶺)을 붙여 임걸령이라 하였다.
그런데 떠나올 때 보고 온 모든 지도도 그랬지만 여기 오는 도중에 있던 구간 거리 이정표에도 있던 피아골 하산길이 어느 해인가부터 폭우에 폐쇄된 모양으로 '등산로 없음'이란 표지판만 있다. 하릴없이 아까 지나쳐 왔던 피아골 3거리까지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든지-. 그것보다 일행과 30분 이상 뒤떨어진 데다가 20분 이상을 더 보태야 한다니-. 여차하면 피아골에서 자고 가야 되려나 보다 생각하며 지갑을 만져 보았다.
피아골 3거리 이정표를 보니 피아골 산장까지는 2.0km였다.
올라갈 때는 힘들어 늦고, 내려갈 때는 젊은이들처럼 쾅쾅 내딛고 내려올 수 없어서 자꾸 쳐지기만 했다. 이상이 오기 시작한 무릎 관절을 때문이었다. 그래도 단풍은 산의 능선보다는 좋았다.
금년 가을 가뭄에 단풍은 말라 비 틀어진 체 매달려 있었고, 길은 비에 젖은 낙엽을 밟고 내려오는 하산 길이었다.
거북이같이 꾸준히, 토끼처럼 쉬면서
피아골
단풍이 어떠하냐고
지리산에게 묻습니다.
*. 피아골 대피소
계속되는 급경사 하산길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비 오는 소리가 너무 요란해진다. 비 소리인가, 계곡 소리인가 하며 내려오다 보니 왼쪽으로 나뭇잎 사이에 하얀 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피아골 계곡이었다. 계류 소리가 점점 커지는 곳에 피아골 산장이 나타난다.
이 피아골 계곡 물은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般若峰:1,751m) 중턱에서 발원되어 임걸령 ·불무장들(不無長登, 1,446m)의 밀림지대를 거쳐 남매 폭포, 삼홍소(해발 600m), 통일소, 연주담, 피아골 대피소를 거쳐 20km를 흘러 직전 마을까지 이어지다가 연곡사 등을 지나 연곡천이 되어 섬진강으로 빠지는 동안 폭포와 담소(潭沼)로 뛰어난 계곡미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의 단풍이 '지리산 10경(景')의 하나로 손꼽히는 피아골 단풍이다.
피아골 단풍은 연곡사로부터 피아골 대피소를 향하여 이어지지만 그 가운데도 직전 부락(稷田部落)에서 연주담,- 통일소, 삼홍소까지 1시간 거리 구간이 특히 빼어나다.
하산 길에서 그 단풍이 시작되는 곳이 피아골 대피소였다.
대피소는 노고단 같이 신축 건물 아닌 뱀사골, 연하천, 치발목 산장보다 더 초라한 막돌을 쌓아 벽을 하고 그 위에 슬레이트 지붕을 한 그런 대피소였다.
주위에는 많은 탑들이 쌓여있었고 그중에서도 약수 시설이 그중 눈에 뜨였다.
함께 한 산악회 일행에게 너무 늦어 미안한 마음 때문에 피아골 대피소에서 일박하겠다고 막 전화를 걸려고 하고 있는데, 대피소에서 점심을 마치고 가던 우리 고양시 늘 푸른 산악회 후미의 몇 분을 만나고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그래서 편안한 마음이 되어 피아골의 단풍을 완상하면서 하산할 수가 있었다.
*. 삼홍소(三紅沼)에서
산이 좋아 그중에도 지리산이 좋아서 평생을 두류산(지리산)에 은거하며 살던 조선시대 대유학자 남명 조식은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이는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고까지 하였다 한다. 다음은 그 남명 선생이 피아골 단풍을 노래한 것이다.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 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마저 붉어라.
-삼홍소(三紅沼) /남명
-그래서 피아골 단풍을 삼홍(三紅)이라고 한다. 단풍에 산이 붉게 타는 (山紅), 붉은 단풍이 물에 비추어 물까지 붉게 비치는 수홍(水紅), 산홍(山紅)과 수홍(水紅)으로 사람의 얼굴까지 붉게 보이는 인홍(人紅)이 그것이다. 내 마음도 그 인홍(人紅))이 되어 피아골 단풍을 노래하여 본다.
붉은 물에(水紅)
얼굴마저 붉게(人紅) 물든
'지리 10경(地理10景)' 단풍 보러
피아골 와서 보니
그리던
내 마음마저
삼홍(三紅)으로 물들었다.
-일만
금년은 이상 가을 가뭄으로 단풍이 물들기 전에 말라 비틀어 매달려 있거나 떨어져 버렸지만, 지금부터 해마다 계속되는 피아골 가을 단풍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피고 있을 터인데 어찌 금년의 단풍만 가지고 피아골의 단풍을 탓하랴. 그래도 아쉬워 도중도중 잡은 카메라의 눈을 빌어 피아골의 단풍을 기록에 남겨 본다.
삼홍소
*. 피아골의 유래
천왕봉 가는 길에 있던 피아골 3거리에서 직전마을까지는 6km다.
- 그 '직전(稷田)'이란 무슨 뜻인가를 알고 싶어서 한글 사전을 찾아보니 어디에도 '직전'이란 단어는 없는 말이다. 한자 자전을 찾아보았더니 오곡(五穀)의 하나인 '기장 稷(직)' 자로 나온다. '기장= 피'가 아닌가 하고 찾고 찾다가 한한 대자전을 보고 무릎을 쳤다. '五穀之長 메 기장, "직 又 피" '라. '기장'이 '피'란 말이다. 이럴 땐 월척하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한자어 '직전은 순 우리말 되는 것이다. '직전 골이 피밭골'이요 ‘피밭골이 변하여 ’ 피아골‘이 된 것이다.
옛날 이 일대에 오곡의 하나인 피 밭이 많아 ‘피 밭 곡[稷田谷, 직전 곡]’이라 하다가 '피아골'로 변한 이름이다.
직전마을 가기 전에 찻길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이 '표고막터'였다 표고버섯을 기르던 곳이란 말이다. 그 찻길이 끝나는 곳에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표지판이 있다.
-여기는 피아골입니다. 왜 피아골이라 불릴까요?
1. 전쟁으로 인한 '피의 골짜기' 2. 피난지로서의 '피하는 골' 3.피밭(피전- 稷田 )이 있는 골짜기
여기서 '피'라고 하는 것은 오곡의 하나인 기장을 말하는 식용 피(稷:'기장' 又 '피')로 옛날에는 쌀과 섞어 먹던 혼식 중에 하나로 기름을 짜거나 가축 사료용으로 쓰이던 곡식을 말한다.
피아골을 피난지로서 '전란을 피하는 곳'이라고도 하였으나 사실은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다. 임란 · 여순반란사건도 그랬지만 특히 6 ·25 사변에는 공비들의 거점이 되어 아군과 공비의 '피아간(彼我間)'에 서로 격전하면서 피를 많이 흘렸다 하고, 이를 소재로 한 '피아골'이란 영화가 더욱 '피(血)'와 연관하여 '피아골'을 생각하게 되어서 핏빛 단풍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민족의 성산 백두산(白頭山)을 종주하다 보니 북으로는 한반도의 7배가 넘는 드넓은 만주 땅이 전개되어 있었고, 남산북야(南山北野)라 하는 말 그대로 남쪽의 북한 땅은 수많은 산들이 남을 향하여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 내 생각에 언젠가 더 늙기 전에 지리산 단독 종주로 나의 산행을 마감하리라 다짐하였다. 산악회를 따라 종주를 할 수 없는 것은 거북이처럼 느리고, 토끼처럼 자주 쉬는 지금의 산행 실력으로는 언감생심(言敢生心)이라. 어림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반달곰이 먹이 찾아 등산로에 나타난다는 표지판을 보니 오늘 피아골 산행으로 나의 지리산 산행을 접어야 할 것 같다.
*. 천년 고찰 연곡사(燕谷寺)
피아골을 수도권에서 당일치기로 오고 가는 것이라서 가고 싶던 천년 고찰 연곡사(燕谷寺)는 날이 저물어 생략하고 서울로 향한다.
그러나 후답자(後踏者)를 위해서 여기 온 김에 몇 자 글을 남겨야겠다.
연곡천 골짜기를 좌하에 두고 검은 수석을 부감(俯瞰)하면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측 길가에 초라한 사찰이 있는데 이 절이 진흥왕 6년(545)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는 연곡사(燕谷寺)다.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고 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담이 전하여 온다.
-화엄사 종주였던 연기조사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이 연곡사에서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할 곳은 국보 2점과 보물 4점으로, 도선 대사(道詵大師)의 부도라고 전하여 오는 연곡사 동부도 (국보 제53호)와 함께, 연곡사 북부도 (국보 제54호), 연곡사 삼층석탑 (보물 제151호), 연곡사 현각 선사 탑비 (보물 제152호), 연곡사 동 부도 비(東浮屠 碑) (보물 제153호)가 그것이다.
지금 화엄사의 말사인 이 연곡사는 임란과 병술 국치 때와 6.25의 병화를 겪어서 넓은 경내에 비하면 지금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 절에서 2km쯤 오르면 피아골이 시작되는 방금 내가 다녀온 피아골이 시작되는 직전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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