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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편계곡(金鞭계)의 행복 중국의 호텔은 유럽에 비하여 안락한 시설이었다. 물도 사 먹지 않을 만큼 준비되어 있었고 치약 칫솔은 물론 슬리퍼와 1회용 머리빗까지 있어야 할 것은 다 갖추어 있었다. 해외여행에서 호텔이 어떠하냐 하는 것은 아침 호텔식과도 관계있는 것이어서 걱정을 했는데-. 빵과 우유에 소시지뿐인 간단한 서구식 식사와 달리 중국의 음식은 같은 동양인이라서인지 입에 맞았다. 준비해간 술을 드는 데도 자유로웠다. 우리는 20분이면 장가계(장가제) 삼립국립공원에 도착할 수 있는 해발 600m의 투가족(土家族)이 사는 장가계촌 가까이 있는' 호남비파계빈관(湖南琵금琶溪賓官: 파파시)'에서 이틀을 묵는다. 팸플릿을 보니 장가계 3일의 일정으로는 제1일: 황룡동, 보봉호, 제2일: 천자산 원가계 제3일 황석채, 금편계인데 이틀의 우리의 일정으로 현지 가이드는 우리를 어떤 곳을 어떻게 안내하려나? 무릉원 국가중점 풍경명승지(武陵源國家重點風景名勝地)라는 장가계국립삼림공원 입구에 서니 확 눈에 들어오는 기봉(奇峰)과 좌우에 보이는 요란한 간판들이 눈을 황홀하게 한다. 이곳은 '무룽원(武陵源)'의 핵심 부분으로 130만㎢로 삼림이 97.7%나 된다. 옛날에는 '청암산(靑岩山)'이라 불리던 3천여 개의 기봉(奇峰)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솟아 있는데 그 봉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그 입구에 '부부암(夫妻岩)'이 있어 눈 코 머리카락까지 분명하다는데 불행히도 우리의 조선족 가이드는 아주 침착하고 유머가 풍부하며 지적 수준은 높은 능력 있는 사람인 듯한데, 알고 있는 것을 말해 주기를 퍽 아까와 하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무얼 물으면 "그건 전에 말씀 드렸는데요." 그뿐 더 이상 말이 없다. 가이드가 되어서 질문을 귀찮아 한다면 관광객이나 본인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주위에 마이크를 들고 열심히 설명하고 다니는 중국인 가이드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요란한 간판 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것이 '人間仙境 桃花源(인간 선경 도화원)'이란 간판이 있다. 인간(人間)은 사람이 아니라 글자 원뜻 그대로 세상(世上)이고, 도화원(桃花源)은 서양인들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뜻의 동양의 무릉도원(武陵挑源)을 말한다. '무릉도원(武陵挑源)'이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상향으로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는 그 곳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땅은 평평하고 집은 튼튼하며 기름진 밭과 아름다운 연못 그리고 뽕나무 대나무 등이 있다. 논두렁이 사방으로 통하고 새와 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속에 왔다 갔다 하며 씨 뿌리고 밭가는 남녀들이 입은 옷은 모두 바깥사람들과 같았다.' 이것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나오는 도연명의 세계다. '나는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배(小人輩))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벼슬을 버리고 41세에 향리에 돌아와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하면서 가난과 질병과 싸우면서 63세를 살다간 도연명의 세계인 것이다. 나는 비록 무명의 시인묵객이지만 살아 있는 도연명이 되어 그 거만한 중국인들이 국가4A급 풍경구라고 극찬하고 있고, 유네스코마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한 그 무릉도원 앞에 행복하게도 아내와 함께 서 있다. 카메라를 갖고 다니다 보면 횡재를 할 때가 있다. 요 상점 앞에서 거리의 사진사가 증명사진을 요란히 찍고 있는 모습이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은 뒤 배경을 만들고 사진사는 사진을 찍는데 맞추어 같은 또래의 구경꾼들의 웃음이 있다. 얼마나 재미있는 장면인가.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퐁퐁 솟아 나온다. 인간은 이렇게 자연보다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노 옵션, 노 팁으로 싸구려 관광을 왔으니 최소한의 구경만 시켜주어도 말할 수 없는 입장이니 걱정이 자꾸 앞선다. 삼림공원 입장 카드는 158위엔(2만4천원)으로 이천유효(二天有效)다. 하루를 중국인들은 '天(천)'이라 하니까 이틀이 유효한 티켓이었다. 이 카드를 기계에 넣고 엄지지문을 찍고 나서서야 우리는 무릉원의 경내에 들어섰다. 지금 우리는 '금편계(金鞭溪)' 계곡을 가고 있다. 금편계(金鞭溪)란 쇠 '金(금)', 책찍 鞭(편) 노란 색깔의 책찍 같은 모양의 금편암이 있는 한 줄기 깊으나 완만한 계곡을 말한다. 이 물은 서쪽으로는 비파계(琵琶溪)로 모여 들고, 동쪽으로는 삭계(索溪)로 흘러가는데 그 계곡을 끼고 뱀처럼 꼬불꼬불한 돌길이 양쪽으로 병풍 같이 둘러선 1천여의 기봉(奇峰) 사이를 노마만(老磨灣)에서 시작하여 수요사문(水繞四門)까지 7.5km를 걷게 된다. 돌이 많은 고장이라 그 돌을 직사각형으로 잘라서 만든 길은 아스팔트보다 멋있고 운치 있는 것이, 깊은 산속인데도 가파른 계단 없는 길이 2시간 30분이나 계속된다. 일행 중 76세의 할아버지 내외는 가마를 탔다. 가마는 대나무로 만들어 흔들흔들 자동적으로 쿠숀이 되어 안락해 보이는데 2만원, 2만원 하며 계속 따라 붙던 가마꾼이 1만원으로 낮추어 부를 때다. 이 사람들에게 주의할 점은 분명 1 만원이라고 해도 2만원을 내게 된다. 한 사람씩 따지는 저들의 계산법 때문이다. 금편계(金鞭溪)가 시작되기 전까지 계곡 우측에 이 곳을 다녀간 시인 묵객들이 써놓은 비석 40여 개가 있는데 그 비석중에 제일 유명한 곳에서 아내와 오늘 칠순을 맞은 이건형 여류수필가와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 비명에 하였으되 '人生不到張家界, 百歲豈能稱老翁'(인생부도장가계, 백세기능칭노옹)이라 쓰여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를 보지 않으면 100세가 되더라도 어찌 늙은이라 하겠는가. 이런 비석들을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찍다 보니 우리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산길의 오름 길에서도 사진 한 컷 찍는데 보통 5m나 뒤지던데 이곳은 평지 길이니 더 차이가 났다. 앞선 일행은 야속하게도 경보(競步)나 하듯이 가이드 따라 가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남편이 걱정 되어 아내는 남들에게 욕먹는다고 재촉을 하며 계단을 두 단계씩 건너면서 앞서 달려간다. 쫓아 가다 보니 아내의 뒷모습이 보인다. 일행 중 어떤 이는 단체 행동에서는 개인행동에서는 삼가야 한다고 민망스럽게도 언성을 높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금편계에서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였다. 생각해보라. 가마를 타고 갈 나이에 이 천하제일 기봉이라는 것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빠질세라 카메라의 눈을 활짝 열고 기를 쓰고 찍으면서 달려가던 이 행복한 사람을-. 여기가 아무리 아열대 지방이라고 하나, 그래도 가을이 오는 서늘한 깊은 계곡 길을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시면서도 불평 없이 미안하기만 했던 이 사람을. 이러한 때 나는 즐겁고 행복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아름답다. 자연을 탐하여 이 순간을 오래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하는 이 몸부림을 어느 누가, 무슨 기준으로 탓할 수 있으랴. 금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1,000여 기암 기봉이 물끄러미 나무 사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런 아침나절이었다. 그러나 아뿔싸 서둘러 먹는 밥에 첸다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어두운 계곡에서 클로즈업으로 찍은 시인묵객들의 시비 사진들은 거의가 흔들려 있다. 앞선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서 기다릴 촌각의 여유가 그렇게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혹(惑)했던 그 경치를 더 말해 무엇 하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하니. 그때 찍은 금편계의 사진을 보시라. 흔들림은 당시 서둘러야했던 이 사람의 행복한 고생의 흔적이이라 생각하시고.
수천의 봉우리가 늘어선 '신선의 계곡'이라고도 하는 기봉(奇峰)들이 다투어 그 빼어남을 경쟁이라도 하듯이 도열하여 있는 사이 계곡을 열심히 가고 있지만 처진 끝은 항상 혼자라서 누구 하나 여기가 어디라고 설명해 줄 이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 유명하다는 금편암, 자초담, 천시상회 등을 긴가민가하며 지나지만 나의 카메라에는 이를 노치지 않았지만 지나치지 않았나 걱정이 되었다. 어디서인가 피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갑자기 천원, 이천 원을 외쳐 대는 시끌법적 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런 곳이면 어김없이 거기가 절경이던데, 사람들이 놀라며 바라보는 것을 보니 이곳이 금편계곡이 끝난다는 수요사문(水繞四門)인가 보다. 가는 도중에 인력거가 즐비하게 있고, 혹은 투가족 여인이 고운 붉은 전통의상을 입고 물레방아 위에 앉아 '안녕하세요.'하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사진의 모델이 되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이들과 사진을 함께 찍은 이는 천 원 한 장을 줘야 한다. 어떤 이는 만원 짜리로 바꿔달라고 조른다. 장가계 광광객의 90% 이상이 한국인이어서 장가계에서는 한국돈이 그대로 통용되어서 장가계를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1,000원 짜리로 바꾸어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거기서 아내는 장가계를 수놓은 가방 다섯을 1,000원 씩 주고 샀다. 슬그머니 공항에서 2,000을 깎아준다고 해서 5,000원 주고 산 '장가계 훙광촬영집' 한국판을 물으니 3,000원이라지만 2,000원에도 팔 것 같다. 장가계 관광을 '와와 관광'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한국 여행객이 많아서이기도 하다는데 왜 그럴까? 가까워서인가. 아니면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민족성 때문인가. - 2023. 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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